비행기를 처음 탄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매일같이 가게 문을 여느라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수입이 대단치도 않던, 결정적으로 차가 없던 우리 가족은 가족 여행이란 걸 거의 간 적이 없었다. 지하철 2호선이 닿는 곳으로의 나들이라면 몰라도. '전혀' 가지 않았다고 말해도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글쎄…. '전혀'는 좀 심하지 않니'라며 머리를 긁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집의 막내딸인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비행기를 타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건, 숫기 없는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나의 뻔뻔함 덕분이었다. 총 9남매인 친가 친척들은 여름마다 봉고차 두 대를 나눠타고 동해로, 남해로 놀러 갔다. 장사하느라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돈도 없는 우리 가족은 빼고.
당시의 나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어린아이가 수줍음이 많은 거야 흔한 일이지만, 그게 그러니까, 나의 수줍음은 좀 병적일 정도였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를 제외한 할머니, 친가 친척, 이웃, 그 모두에게 수줍었다. 의사소통은 고개를 까딱이는 거로 일관했다. 좋으면 끄덕. 싫으면 절레절레. 그나마 '예', '아니오'를 표현하는 것도 부끄러워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때가 더 많았지만. 고모가 우리 수지 목소리 까먹겠다며 아무 말이나 해보라고 내 어깨를 쥐고 흔들 정도였다.
그런 애가 동해로, 남해로 놀러 가는 봉고차 어딘가에는 늘 끼어있었다. 수줍어도 여행은 가고 싶으니까. 엄마 아빠가 동행한다면 친척들 단체 여행에 따라가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말했다시피 우리 가족은 친척 단체 여행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엄마 아빠가 가지 않는 상황에서 수줍음 많은 내가 여행에 가겠다고 따라붙는 건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갔다. 수줍음 때문에 여행을 안 가는 건 좀 억울하니까. 매년 여름. 나는 엄마 아빠 없이도 당당히, 봉고차 구석에 쪼그려 앉아 코로는 고모부들의 고약한 담배 연기를 마시며 귀로는 잔인하도록 시끄러운 뽕짝을 들으며,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바다를 보러 갔다. 좋았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고모들은 할머니를 모시고 통영에 간다고 했다. 통영. 토옹여엉. 동그라미가 많아 통통대는 통영의 발음이 좋았다. 하지만 내 신경을 건드린 건 통영의 발음 따위가 아니었다. 고모들은 비행기를 타고 간다고 했다. 비행기라니! 비행기! 나는 오빠를 졸랐다. 가자. 우리도 가자.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오빠도 비행기를 타 보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빠는 비행기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오빠의 관심은 고모가 떠난 고모 집에 남아 사촌오빠들과 비밀스러운 작당을 하는데 쏠려있었다. 하여간 오빠들이란. 나는 가지 않겠다는 오빠를 졸라 일단 고모들이 모여 사는 경기도 성남 달동네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할머니 댁 방구석에 언제나처럼 말없이 앉아, 눈치를 살폈다.
"수지 너 갈 거냐?"
"……."
네. 갈래요. 미친 듯이 가고 싶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타고 싶습니다. 오빠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오빠를 흘겼다. 나에게는 오빠가 필요했다. 딱히 오빠와 여행을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눈치가 보여서였다. 아무리 고모들이고 삼촌들이지만, 비행기씩이나 타고 가는 여행에 부모 없이 애 혼자 달랑 따라간다는 건 열 살이었던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염치없는 일이었다.
아. 고모 중 한 명만 제발 가라고 졸라줬으면. 우리 수지랑 비행기도 타고 통영 바다도 보고 싶다고 말해줬으면. 할머니가 우리 수지가 가지 않으면 자기도 가지 않겠노라고 노인네 특유의 땡깡을 부리며 나에 대한 애정을 과시해줬으면. 고모들은 바닷가 콘도에서 먹을 김치와 쌀, 고추장 따위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모들의 관심을 듬뿍 받는 고추장이 되고 싶다. 고모들은 나는 빼고 가도 고추장은 안 빼먹고 데려가겠지. 할머니가 세 번째로 물었다. 수지 너 갈 거냐?
끄덕.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끄덕임.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작 열 살이었던 내 머릿속에 삶이 비행기 한 번 못 타고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삶은 내 계획과는 달리 어떻게든 흘러갈 수 있고 갑자기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던 걸까. 그리하여 나는 고모들과 김포공항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 생애 첫 비행기를 타는데 드는 노력이 고작 고개 한 번 까딱하는 거였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 참 편했다.
김포공항. 탑승 대기 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비행이다. 나의 미션은 창가 자리에 앉는 것. 나는 친척들의 수를 계산해 작은 아빠 앞으로 섰다. 좁은 기내 복도 양쪽에는 의자가 세개 씩 달려있었다. 나는 잽싸게 창가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내 옆으로 작은 아빠 가족이 앉았다. 작은 아빠, 작은 엄마, 세 살 된 사촌 동생의 고개가 모두 내 쪽으로 쏠렸다.
동생이 처음 비행기 타는데 좀 양보해야 하는 거 아니니 너?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좀 뻔뻔한 아이였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세 쌍의 뜨거운 눈을 외면하고 창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차피 어린 사촌 동생은 비행기 창문 같은 데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래. 너에게는 앞으로도 긴 인생이 펼쳐질 것 아니겠니? 창가 자리는 다음 기회에 앉으렴.
비행기가 떴다. 귀가 막혔다. 침을 꿀꺽 삼켰다. 왼쪽 귓속 공기가 팍, 하고 터졌다. 오른쪽 귀는 아직 꽉 막혀 있다. 비행기 날개 아래로 하얀 구름이 보였다. 와. 구름. 구름을 하늘 위에서도 볼 수 있다니. 말끔한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 언니들이 음료수를 나눠줬다. 하늘 위에서 마시는 거야. 이 오렌지 주스. 작은 플라스틱 컵을 들고, 속으로 건배했다. 나를 하늘 위로 떠올려준 인류 기술문명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이 비행의 일등 공신, 수줍음을 능가하는 나의 뻔뻔함을 위해.
김포에서 김해까지의 비행시간은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았다. 김해 공항에서는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비행기가 이어준 서울과 통영이라는 세계는 토끼굴에 떨어진 엘리스가 도착한 이상한 나라보다 신기한 세계였다. 시장에서는 오징어순대라는 걸 팔았다. 고모가 바위에서 갓 따 내 입에 넣어준 아이보리색 굴은 어린 혀의 돌기를 일제히 환호하게 했다. 밤에는 마른오징어를 구워 콘도 앞바다를 산책했다. 더는 고추장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고모들은 나에게 친절했다. 내 손을 잡고 바다를 걷던 얼굴이 동그란 셋째 고모가 말했다.
"우리 수지랑 이렇게 바다도 걷고 너무 좋다!"
동유럽, 다시 낯선 세계다
우크라이나에 온 건 순전히 비행기 때문이다. 최저 항공 검색 사이트 스카이스캐너(Skyscanner)의 검색 결과에 따르면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가장 싼 비행기는 우크라이나 국제 항공이었다. 기분 좋은 파란색으로 장식된 항공사 홈페이지 리뷰란에는 잦은 항공기 취소와 지연, 해결되지 않은 환불 문제로 고객의 불만이 가득했다. 우크라이나 국제 항공을 이용해 본 사람들의 의견은 하나였다. 타지 마라.
탔다. 뭐로 가든 유럽으로만 가면 된다. 비행은 나쁘지 않았다. 인터넷의 부정적인 리뷰들은 과장되어 있기 마련이다. 5시간의 비행 끝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도착했다. 40도를 웃돌던 인도 델리의 공기는 비행기의 작은 문을 통해 10도의 선선한 공기로 둔갑했다. 영혼이 휘몰아치게 경적을 울리던 도로의 차들은 이곳에선 마치 우리의 영혼을 살며시 다듬듯, 코블스톤 위를 부르르르, 부르르르르, 부드럽게 지나갔다.
몸을 360도로 빙빙 돌리다 갑자기 멈춰선 기분. 몸의 회전은 멈췄지만, 육체는 인도에서 우크라이나라는 나라로 이동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바쁘게 회전 중이다. 빙빙 도는 머릿속 중심을 잡기 위해 두 눈으로, 코로, 귀로, 익숙한 무언가를 찾았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밀크 초콜릿 피부 대신 금발의 하얀 얼굴들이 도시를 장식했다. 거리를 장식하는 배낭 여행객들의 행렬도, 향신료 냄새도 말끔히 사라졌다. 아무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도시는 조용했다. 이렇게 조용하고 정적인 공간이 지구 상에 존재한다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질 만큼. 더스틴은 초조해 보였다. 더스틴이 초조한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초조해 보인다.
"경찰을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어. 여기는 부패가 심해서 괜히 눈에 걸렸다간 벌금이라도 내야 할지 몰라."라고 더스틴이 말하는 순간, 훤칠한 키의 백인 경찰이 눈앞에 등장했다. 셔츠의 구멍을 채 깁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 잘못이 없는 우리는 숙제를 안 해온 학생처럼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치를 살폈다. 모자 아래 드리운 그늘에 감춰진 경찰의 파란 두 눈이 우리를 보고 친절하게 웃었다. 와, 잘생겼다.
"호스텔 어떻게 가는지 알아?"더스틴이 물었다.
"아니?"
"어제 찾는다고 막 뒤지더니?"
"호스텔 주소 찾는다는 거였는데? 공항에서 어떻게 가는지는…."직업적 육감으로 우리의 곤란한 표정을 포착한 택시 기사가 다가왔다. 인도를 5개월간 여행한 여행자의 육감으로 우리는 택시 기사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발걸음을 늦췄다. 외국인에게 다가오는 택시 기사치고 믿을만한 사람은 없다. 특히 공항이라면. 긴장으로 어깨가 하늘 위로 바짝 솟구쳤다.
"택시?"
"노."
끝. 갔다. 택시? 한 번 묻더니 싫다고 하자 바로 돌아섰다. 김새네. 그래도 조금 졸라야 하는 거 아닌가…. 공항 주위를 맴도는 택시 기사가 영어 한마디 못하면 장사는 어떻게 하나…. 우리는 공항 안내원의 도움으로 공항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키예프 시내에 도착했다. 너무 쉽고 간단해서 좀 심심한걸. 호스텔로 걸어가는 길에 공원 하나를 지났다. 공원에서는 아이스크림(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온몸을 가린 긴 사리 대신 가슴이 훤히 드러난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이 파란색 분홍색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공원 노점에서는 심지어 생맥주도 팔았다. 잠깐 앉자. 우크라이나의 이 정적, 평온함은 뭐랄까. 충격적이다.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도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만큼.
비행기는 낯선 세계를 연결한다. 혹은 비슷한 두 세계를 낯설게 한다. 비행기의 좁은 출구를 통해 연결된 김포와 김해는 완연히 다른 세계였다. 차로 5시간 걸리는 가까운 거리도, 비행기를 통해서라면 신기하고 낯선 세계가 되기에 충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첫 비행이 내 생의 마지막 비행은 아니었다. 스물 두 살, 이민 가방에 짐을 가득 싣고 미국 중부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태국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중국으로 갔다. 말레이시아로, 인도로 비행했다. 비행기는 매번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야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만으로 가슴이 터질 듯 기뻤지만, 좀 재미없고 시무룩해진 지금의 나는 비행이라면 딱 질색이다.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생생하고 끔찍한 추락 장면. 비행기를 이 정도 탔으면 그만 좀 떠오르면 좋으련만. 비행기 사고는 이륙할 때 가장 많이 일어난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머릿속 장면은 매번 더 구체적이고 생생해진다.
비행기가 뜨고 긴장이 좀 누그러들 때가 되면 선택의 고통이 시작된다. 치킨 누들을 먹을까 비프 라이스를 먹을까. 승무원이 저 멀리서 카트를 끌고 올 때부터 고민하지만 내가 고른 기내식은 언제나 맛이 없다. 장기 비행은 최악이다. 좁은 이코노미석에서 자는 쪽잠은 항공사 광고에 등장하는 폭신한 구름 위 남자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기분 나쁜 잠에서 깨면 기내식을 먹을 시간. 밥을 먹고 다시 잠이 든다. 일어나 밥을 먹는다. 장기 비행은 사육이다. 그나마 공짜로 마시는 맥주와 와인이 도움이 되지만, 요새는 술도 밥도 안 주는 저가 항공을 주로 타는 바람에 술 마시는 재미마저 없다.
그래도 아직 남은 게 있다면, 설렘이다. 통영이라는 낯선 세계로 나를 데려다줬던 비행의 설렘. 익숙했던 세계는, 비행기의 좁은 문을 통해 새롭고 낯설어진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가까워질 무렵, 목적지 도시의 강한 엑센트가 묻어나는 기장의 안내 방송과 구름 아래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일본에서 말이 잘 통할까. 중국 음식이 입맛에 맞을까. 인도는 어떤 곳일까. 비행기 문이 열리면, 그 나라의 냄새가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다. 낯선 공기. 낯선 냄새. 낯선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말. 그렇게 도착한 낯선 세계들을 통해, 나는 조금씩 변했다. 아니,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지도. 분명한 건, 그 낯선 공기는 적어도 변하고 싶다는 기분을 들게 했다. 이 낯선 세계에서라면, 이전의 나를 버려도 된다.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이전과 전혀 다른 여행을 할 수 있다.
동유럽에 왔다. 다시, 낯선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