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관련 TV프로그램, 맛집 블로그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여행길에 가장 중요하게 알아보는 정보 역시 맛집이다. 대단하고 새로운 얘기인양 호들갑이지만, 사실 '맛'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인류와 함께 해온 핫이슈다.
유명맛집 또한 매체들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왔다. 입소문으로 전해지고, 직접 체험을 통해 검증된 진짜 맛집들이다. 따라서 내 나라든 남의 나라든 여행길에 진짜 맛집에 가려거든 그 지역사람들에게서 듣는 게 가장 확실한 정보다.
충남 예산군 대술면 <동촌묵집>도 그 중 하나다.
30년 가까이 묵과 두부, 단 두 가지 아이템으로 많은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이곳은 예산사람들에게 새로운 뉴스는 아니다. 예산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한 번쯤은 가본 식당이다.
예산사람 뿐이 아니다. 일부러 이집 묵탕이나 묵밥을 먹으러 오는 외지인이 꽤 많다. 서울, 경기는 물론이고, 부산 같이 먼 곳에서 오는 이들도 있다. 대전-당진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외지차량들이 크게 줄어 드는 바람에 예전같지 않지만, 지금도 주말에 손님들이 더 많다는 걸 보면 시골동네 식당이라고 허투루 볼 게 아니다.
동촌묵집의 손맛인 박재순(73)씨는 "손님들이 다행히 잡숴주고 하시니께 그런거지"라면서도 "한창 잘될 때는 관광차도 오고, 그야말로 손님이 구름처럼 몰려왔어"라며 기억을 더듬는다.
바깥에 파라솔을 치고 손님을 받아도 부족해 기다렸다 먹고 가곤 했단다. 1990년대 얘기다.
이쯤되면 식당 어딘가에 '○○○○프로 출연' 같은 홍보문구와 사진이 걸려있을 법도 하건만, 어디에도 그런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
"방송국이라고 연락이 여기저기서 왔었는데 귀찮아서 다 거절했어. 손님 중에 사진 찍어서 어디에 올린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야 그런 걸 아나."심지어 <무한정보> 취재 전날, 방송인 이경규씨와 딸이 함께 와서 묵밥을 먹는 모습을 촬영했는데도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 땐 음식값 대신 사인도 받고 사진도 같이 찍어서 걸어둬야 장사가 더 잘 되는 거라고 하니 "그려? 난 음식값 다 받았는디? 그리구 내가 보니 연예인보다 촬영하는 사람들이 더 고생하던 걸? 그래서 그이들 밥을 더 줬어"라며 힘도 안 들인다.
무뚝뚝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속정 깊은 전형적인 충청도 정서다.
<동촌묵집>은 고 윤효정, 윤병규(80), 윤준돈(57)씨에 이르기까지 3대째 가업을 물리고 있다. 현재 간판은 20여년 전 집을 새로 짓고 나서 올린 것이고, 그 이전에는 간판도 없었다고 한다.
윤병규 옹은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정확한 개업년도는 모른다" 고 한다. 같이 있던 장영(76) 옹이 거든다.
"내가 1946년에 학교 들어갔는데 여기서 연필이랑 공책도 사고 사탕도 사먹었어. 그러니까 해방 전부터 있었던 거지." 적어도 70년 이상은 됐다는 얘기다.
"원래는 동네 구멍가게로 잡화점 이었어. 장복리에서 만든 엿도 받아다 팔고. 그러다 아버님이 예산양조장서 막걸리를 받아다 팔았는데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도고, 송악일대에서도 초상이 나면 우리집 막걸리를 가져갔어. 우리 6형제는 짐자전거로 막걸리 배달하는 게 일이었고." "스무말씩 들어가는 큰 술도가지를 세 개나 묻어놓고 도소매 했었잖어. 자루소주도 팔구. 그러구 보믄 그때 참 장사 잘됐어.""여기 아버님이 선견지명이 있었지. 다들 농사에 목메고, 이 일대는 특히 농사처가 많지 않어서 양잠에 매달릴 때 경제 돌아가는 걸 보신거지. 그 덕에 어려운 시절에 자식들 다 가르치셨으니께."윤병규옹의 동생인 윤병창옹과 그의 친구 장영옹이 기억의 조각을 맞추니 유서깊은 동촌묵집의 옛 모습이 그려진다.
장옹이 덧붙인다.
"근방에 있던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았는데, 이집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건 시대변화에 따라 두 번의 변화를 준 덕분이여. 아버님 대에는 술도매로, 그 다음에는 묵집으로."
묵집을 시작한 것은 25년전 쯤이다. 집을 새로 짓고 가게를 10평 정도 확장하고 나서 고민이 깊어졌다.
"대술은 깊은 산이 많고, 저수지가 몇 곳 있는 게 다인데 여기서 뭘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다가 예산서도 많이들 넘어오니 묵 쒀서 안주나 한 번 해볼까 하고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어."그동안 묵가루 조달은 축협, 강원도를 거쳐 북한산을 사용해 왔는데 남북교류가 끊기면서 지난 한해 동안은 중국산을 썼다.
"워낙 양이 많아서 조금씩 수매해서는 못당해. 나는 속이는 게 싫어서 손님들한테 다 얘기하거든? 작년에도 묵가루는 중국산이다, 콩은 무조건 국산이다, 다른건 양념 하나까지 다 내 남편이 농사진 것이다 그러고 얘기했어. 믿음이 제일 중요하니께."묵가루도 국산을 써야한다는 요구가 많아 올해는 판교에서 들여오긴 했는데, 여전히 묵가루 조달처가 고민이라고 한다. 묵을 쑤는 기술은 아들 준돈씨가 이어받았지만, 양념장과 김치, 육수 비법은 며느리도 모른단다.
"우리애가 가르치면 잘 하것지만, 난 안물려주고 싶어. 이게 보통 고생이 아니거든."<동촌묵집>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된다. 먼저 육수부터 안치고, 전날 불려놓은 콩을 삶는다. 어떤날은 새벽 6시에도 손님이 든다. 묵은 그날 그날 손님에 맞춰 두판씩 여러번에 나눠 쑨다. 문닫는 시간은 저녁 8시 즈음이다. 하루 종일 주방에서 묵을 쑤는 아들 준돈씨는 15년 전 박씨가 큰 수술을 받으면서 들어와 가업을 잇고 있다.
6.25전쟁 때를 빼고는 한결같이 동촌삼거리를 지켜온 <동촌묵집>. 긴 세월만큼 많은 사연들이 있지만, 누가 뭐래도 1990년대 후반 탈옥범 신창원 사건이 가장 큰 일이었다.
"신창원이 이곳에 머물면서 송석저수지에서 낚시하고 우리집서 묵밥을 먹었다고 일기에 쓰는 바람에 이 일대가 발칵 뒤집혔어. 한달 가까이 경찰차가 여전 깔려있으니 담배 한갑도 안 팔리는 거여. 그 때 대술경기 다 죽었지. 밤낮으로 고생하는 경찰들 안쓰러워서 내가 밥도 해줬지만, 경찰서에 민원도 넣었다니까. 나는 베풀 건 베풀고 할 얘기는 해야거든."배고프고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 여길 줄 아는 넉넉한 인심, 요즘식 친절서비스는 아니지만 은근히 전해지는 정, 정성으로 맛을 낸 음식, <동촌묵집>의 맛집 비결이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