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김해한옥체험관지방으로 답사여행을 다닐 때 가장 큰 애로점은 숙소문제다. 전국 곳곳의 모텔은 그 요상한 분위기나 청결상태가 비슷비슷하다. 답사 기간 동안 호텔에 머물면 쾌적하게 지낼 수 있지만, 늘 얕은 주머니라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국내 지방답사는 가능한 당일치기로 다녀오거나, 아니면 밤차를 타고 열차에서 하룻밤을 묵기도 한다. 하지만 정히 하룻밤을 묵어야 할 경우는 모텔보다는 민박이나 산장에 들곤 했다. 왜 나그네들이 내 집처럼 편히 쉴 수 있는 한옥 여관은 모두 사라졌는지….
이번 남도기행은 김 교수가 김해한옥체험관을 숙소로 마련해 주기에 여간 쾌적치 않았다. 사실 여행에서 잠자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답사여행 중에는 푹 숙면을 해야 다음날 일정 소화가 수월하다. 김해한옥체험관에서 자고난 넷째 날도 잠에서 깨자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몸을 닦은 뒤 아침산책으로 '가야의 거리'를 산보한 뒤 돌아와 숙소에서 이번 남도기행의 주 목적인 가야대학교 특강을 위한 교안을 다시 살펴보며 강의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젊은 날 지겹도록 한 수업이지만 이제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야말로 오늘이 '마지막 수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그 결과는 어떨지? 그 판단은 어디까지나 학생들 몫이다. 오늘은 첫날 강의 때보다 더 일찌감치 나섰다. 박물관 역에서 경전철을 탄 뒤 가야대 앞에서 내렸다. 대학 앞 밥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가야대학으로 갔다.
엊그제와 같이 '가락관' 같은 308호실에서 창작실기 특강이 있었다. 이날은 '말과 글의 중요성' 예화로 미국의 제40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크게 주목받지 못한 할리우드 출신 배우가 백악관 주인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그의 달콤한 연설 솜씨였다는 얘기와, 조선조 광해군 때 허균의 예화를 들었다. 광해군 시대 장안의 갑부는 현재 아는 이가 없어도 허균의 <홍길동전>은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예술은 길다"는 얘기였다.
나는 가능한 낮은 자세로, 솔직한 체험 얘기로 강의하면서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는데 초점을 맞췄다. 경상도 구미 벽촌 금오산 기슭의 소년이 학교 선생님과 작가가 되고자 꿈꾸었던 얘기와, 서울에서 고교를 다니다가 가정사정으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죽으려 하다가 한 장애인을 만난 뒤 주머니 속의 알약을 버리고 새 삶의 의욕을 가졌다는 얘기를 했다.
새로운 출발로 신문배달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때때로 신문을 대문 틈으로 넣고 나면 갑자기 집안에서 개들이 대문 밖으로 뛰쳐나와 바짓가랑이를 물었다. 그때 그들의 주둥이를 워커 발로 차면서 "X놈의 개XX! 너희마저 사람 차별을 하느냐! 나는 장차 신문사장이 될 거다"라고 큰소리 쳤다는 그런 허황된 꿈 얘기를 했다. 나는 그런 꿈 탓인지 교사로 33년 지냈고, 작가로 30여 권의 책을 펴냈으며, 시민기자로 10여 년 1천여 꼭지의 기사를 쓰면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도 내 돈 들이지 않고 여러 차례 다녀왔다는 얘기도 했다.
창작실기 특강이번에 펴낸 장편소설 <약속>은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발굴하다가 한 어린 인민군포로의 사진을 보고 어린 시절 고향에 정착한 북한 인민군의 얘기를 소설화한 작품이다.
포연이 자욱한, 생사가 한순간에 교차되는 6.25 전장(戰場)에서 평북 영변 출신의 소년 인민군 김준기와 서울에서 의용군으로 입대한 적십자간호학교 최순희라는 소녀가 분홍빛 사랑을 나눴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 8월 15일 정오에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굳게 했다. 준기는 그 약속 때문에 포로 송환 때 북으로 가지 못하고, 반공포로로 남녘에 남아 해마다 약속한 날 대한문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21년 만에 극적으로 최순희를 만난다는 이야기다. 마침내 약속한 여인을 만나자 김준기는 그제야 북에서 기다리는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는 어머니와 약속한 것을 지키고자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기어이 어머니를 찾아간다는 분단의 아픔 속에 한 가정의 통일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이 작품 창작과정과 그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시간의 특강이 끝나자 학생들은 박수로 답해 주었고, 사인 판매도 순조롭게 끝났다. 김성 교수는 학생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여 책값의 절반을 당신이 부담해 주었다. 40년 전 1970년대 한때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동료애가 오늘까지 이어질 줄이야.
그날 김 교수는 계속 강의가 있다고 경전철 역까지 태워주었기에 나는 그분의 끈끈한 친절에서 벗어났다. 사흘간 속옷을 갈아입지 못해 몸이 찝찝하여 곧장 귀가 하고자 부산 행 경전철을 탔다. 부산에서 김해로 올 때는 한밤중이라 언저리 경치를 볼 수 없었는데, 가는 길은 쾌청한 정오라 언저리 경치를 완상할 수 있었다. 부산으로 가면서 아름다운 산하를 두리번거리는 새 경전철은 낙동강 철교를 지나 사상 역에 사뿐히 닿았다. 나는 그곳에 내려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로 가고자 환승하려는데 바로 옆이 사상시외버스터미널이었다.
거제도로 가다 이번 남도기행을 앞두고 여정을 짜면서 인터넷에서 그 일대 교통을 검색하자 바로 이곳이 남해 각지로 가는 버스의 출발점이요, 종점이었다. 70 노인이건만 아직도 10대 소년과 같은 호기심 많은 나그네가 참새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는 것처럼 어찌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사상 역을 벗어나 곧장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자 거제 행 버스가 있었다. 일단 버스표를 사고 보니 10여 분밖에 남지 않았다. 시장기를 느꼈지만 점심을 먹을 시간은 부족한 터에 마침 터미널 곁에 어묵집이 있었다.
어묵은 부산 어묵이고, 또 부산 어묵은 부산에서 먹어야 제 맛이 났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부모님은 부산에서 사셨다. 그래서 방학 때면 부산에 와서 지냈는데, 그때 길가에서 팔던 그 어묵 맛을 평생 잊을 수 없어, 나는 지금도 부산에 가면 어묵가게나 시장 노점에서 선 채로 몇 꼬지씩 어묵을 사먹곤 한다. 3천원어치를 사자 한 대접 가득하게 어묵을 주었는데, 역시 부산 어묵의 옛 맛이 남아 있었다. 국물까지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마신 뒤, 차에 오르자 오후 1시 20분으로 거제 옥포 행 버스가 곧 앞문을 닫았다.
거제 행 버스는 내가 거쳐 온 김해국제공항을 거쳐 을숙도로, 신호대교로, 송정경제자유구역을 지나 가덕도로 향했다. 지난날은 거제도를 가자면 부산 부두에서 여수행 배를 타고 갔는데, 이제는 그 한려수도 뱃길은 끊어지고 '가거대교'로 연결되어 그 섬들이 육지로 돼버렸다. 사실 나는 자연에 인공을 가미한 그 경이를 보고자 거제 행 버스에 올랐던 것이다.
내가 2004년과 2007년 두 차례 미국 버지니아 주 남단 노퍽 시의 맥아더기념관을 방문하면서 대서양 채스피크 만을 가로 지르는 해상 도로와 해저터널을 보고 그 광경에 얼마나 감탄했던가. 그런 기적이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다니…. 이러다가는 부산과 시모노세끼를 잇는 해저터널이 생길 날도 다가올지 모르겠다.
거제 행 버스는 가덕도로 가는 해저터널로 들어갔다. 그런 뒤 다시 지상으로 나온 뒤 버스는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가거대교' 위를 달렸다. 그러자 언저리 다도해 섬들이 잇달아 반겨 맞았다. 잠시 남해바다를 두리번거리는 새 버스는 거제도 옥포에 닿았다.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하고 그곳 버스정류장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려는데 '고현행'이라고 쓴 시내버스가 나를 유혹했다.
거제포로수용소내가 '고현'이라는 곳은 가보지 못하였지만, 숱한 작품과 다큐멘터리, 문헌을 통해서 접했던 익숙한 지명인가. 그리고 나도 장편소설 <약속>을 쓰면서 그곳을 여러 차례 그렸던 곳이다. 그 지명이 나를 그 버스에 오르게 했다. 20여 분 만에 고현 항에 닿았다. 그곳은 거제시청이 있는 중심지로, 지난날에는 거제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거제도 중심지다.
1950년 12월에 이르자 유엔군 측에서는 날마다 꾸역꾸역 늘어나는 포로들을 부산포로수용소에 수용하는데 한계에 이르렀다. 그런데다가 계속 늘어나는 포로로 그들의 집단 탈출이 두려워 찾은 곳이 육지와 가까운 거제도였다. 유엔군 측에서는 전선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일단 부산포로수용소에서 임시 수용한 뒤, 이들을 분류하여 LST(수송선)에 포로들을 잔뜩 싣고 마냥 토해 놓은 곳이 바로 고현 항이었다.
고현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이 2킬로 정도 된다고 하여 택시를 탔다.
"어디서 온교?""강원도 원주에서 왔습니다.""어디 어디 둘러볼 겁니까?""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만 잠깐 들러보고 갈 겁니다.""네에? 한려해상공원 거제는 볼 곳이 천지 삐깔인데요."나는 이 도시가 지난날 포로수용소였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곧 그 답을 택시기사가 말해 주었다.
"서울에 땅 한 평이 천만 원 간다고 해서 곧이듣지 않았는데, 요새 여기가 땅 한 평에 천만 원 갑니다.""네에?"이즈음은 서울과 지방 중소도시가 별로 구별치 못할 만큼 거리풍경이 비슷했다. 택시기사는 이 섬에 국제적인 조선소가 둘이라는 둥, 이즈음은 관광명소로 그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고 거제 자랑을 한껏 하면서, 언제 가족과 한 번 다녀가라고 열심히 홍보했다.
나는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내린 다음, 들고 다니는 가방이 부담스러워 마침 어귀에 있는 안내소에 들어가 부탁을 하자 오후 5시까지만 맡아줄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이후를 대비하는 듯, 굳이 내 이름과 손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는 내 이름을 듣고는 별난 이름 탓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서 오마이뉴스에 <어떤 약속>을 연재한 작가라고 했더니, 아마도 이들도 연재소설을 보았는 듯, 금세 반색하면서 이제야 오셨느냐고 반문했다. 솔직히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다른 곳은 거의 다 현장 답사했지만 이곳은 오지 않고 사진과 지도, 그리고 문헌, 인터넷 등으로 학습한 뒤 썼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당시 사진과 포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현해 놓은 듯, 내가 상상했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 소설 속의 주인공인 김준기가 분뇨통을 메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도 마네킹으로 재현해 놓았다.
나는 그날로 원주 집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촉박하여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을 한 차례 휭 둘러보고 거제고현버스터미널에서 부산 행 버스에 올랐다. 두 시간 후 부산 노포동 터미널에도착한 다음 그날 막차인 6시 40분 발 원주행 버스에 탈 수 있었다.
수컷은 늙으면 인기가 없다40여 명 정원 버스에는 고작 5명의 승객뿐이었다. 주중으로 고속도로도 한가한 탓인지 버스기사는 마구 가속페달을 밟았다. 평소 4시간 걸린다는 부산-원주 간을 3시간 30분 만에 주파하여 10시 10분에 원주터미널에 내려주었다. 늦은 시간에다 3박4일의 피로에 곧장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택시기사가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부산에서 오는 길입니다.""늦으셨네요.""버스기사가 마구 밟은 덕분에 30분 일찍 도착했습니다.""부인이 좋아하시겠습니다.""동물도, 사람도 수컷은 늙으면 인기가 없어요."젊은 택시기사는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렇겠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뒤 집에 귀가하자 늙은 아내는 거실 등을 켜놓고 있었다. 남편의 무사 귀가에 안도하는 눈치이면서도 한 마디 했다.
"좀 더 느긋하게 있다가 오시지 않고서…." "……."나는 그 말에 "뛰어봤자 부처님 손 안"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지만 입을 굳게 닫았다. 늙은 아내가 기다려주는 내 집이 나에게는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