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짓는 땅을 물로 채우면 논이 되고, 가만히 두면 밭으로 남는다. 즉 논밭은 농토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한자어를 쓰던 시절에는 논밭을 신라 경덕왕처럼 전답(田畓)이라 불렀다.
자연 그대로인 맨땅이 먼저 있었고 그 후 밭에 물을 채워넣는 인위가 뒤따르면서 논이 만들어졌으므로, 밭농사가 논농사보다 앞서 이루어졌다. 잡곡은 밭에 씨만 뿌려놓으면 대체로 자라지만 논에서 재배하는 벼는 그에 비해 훨씬 일손이 많이 가는 농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벼농사는 반달돌칼이 사용된 청동기 시대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밭에 물을 채우면 논이 되고 물논에서 ㄹ을 탈락시키면 무논이 된다한자의 꼴로 살펴보면 논[畓]은 물[水]로 채워진 밭[田]이다. 이는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논에 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논은 곧 '물논'인 것이다. 만약 요즘처럼 가뭄이 심해 논에 물을 대지 못하면 이 논은 차차 밭으로 변한다. 그 상황이 더욱 심해지면 모래밭이 되고 급기야 사막이 된다.
'물논'은 발음이 어렵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편한 것을 좋아하므로 결국 ㄹ을 탈락시킨다. '무논'은 그렇게 하여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 점에서 무섬마을의 '무섬'은 무논의 사촌이라 할 만하다. '물섬'에서 ㄹ이 탈락한 결과가 '무섬'인 까닭이다. 물 위에 뜬 섬 같은 마을, 그것이 무섬마을이다.
이제야 무섬마을로 들어서는 다리의 이름이 수도교인 것이 이해가 된다. 처음 내성천을 건널 때는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라면 그냥 무섬다리라고 하지 왜 수도교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무섬마을의 행정구역이 수도면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결국 수도교(水島橋)는 무섬다리를 한자로 옮겨적은 결과였다.
수도교를 돌아보면서 우리 일행은 '수도교를 재가설하는 날이 오면 그때는 무섬마을을 상징하는 모양새의 멋진 새 다리를 놓고, 이름도 무섬다리라 부르면 좋을 것'이라는 데 뜻을 같이 했다.
그리고 한 가지에 더 의기투합했다. 마을로 들어선 때가 마침 점심 나절이었으므로 속담 '금강산도 식후경'의 가르침에 순응하기로 합의했다. 서양 사람들은 저녁을 푸짐하게 포식하고, 동양 사람들은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 왔다지만, 그것도 전통사회의 풍습일 뿐 현대에는 별로 그렇지도 않은 셈이다.
다리 끝에서 좌회전을 하니 곧장 주차장이 붙어 있고, 바로 앞에 '무섬 골동반'이라는 이름난 식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무섬골동반은 개인의 영업장이 아니라 영주시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마을기업인데, 생신상, 무섬선비정식, 무섬골동반, 무섬세면이 주요 차림표다.
식당 이름도 무섬골동반, 음식 이름도 무섬골동반골동반(骨董飯)은 비빔밥을 가리킨다. 비빔밥이 언급된 가장 오래된 요리서는 저자 미상의 19세기 저술 <시의전서(是議全書)>이다. 당시에는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고 간랍(전)은 부쳐 썬다. 각색 나물은 볶아놓고 튀각을 튀겨서 부셔 넣어 비벼 준다. (중략) 완자는 구슬만큼씩 빚고 계란은 골패쪽만 하게 썰어 얹는' 방식으로 차린 이 음식을 '부븸밥'보다는 흔히 '골동반'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1550년 풍기군수로 부임했던 퇴계 선생도 '부븸밥'을 먹고는 "무섬골동반이 맛이 좋군"하고 상찬했을 것이다.
우리 일행은 식당 이름이 무섬골동반이니 밥도 무섬골동반을 먹기로 했다.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수도리와 골동반보다 무섬마을과 비빔밥이 사물의 정체성을 훨씬 정확하게 표현해내는 것만 봐도 한글은 역시 세계 최고의 문자'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자화자찬을 즐기며 먹은 덕분은 아니겠지만 무섬골동반은 모양도 맛도 깔끔했다.
무섬골동반은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마음의 양식'도 한 가지 덧붙여서 선물로 주었다. 음식으로 마음에 점을 찍은 곳이 바로 조지훈 시인의 처가를 원형대로 복원한 집이었던 것이다. 음식박람회, 요리경연대회 등에서 받은 수많은 수상 경력을 뽐내는 무섬골동반 강성숙씨는 '영주 향토음식 지킴이'를 새겨넣은 명함을 주면서 "요즘도 해마다 몇 번씩 김난희 여사께서 이곳을 방문하신다"고 자랑했다.
김난희 여사는 조지훈 시인의 부인이다. 본명이 김위남이었는데 결혼 직후 시인이 새 이름을 지어 아내에게 바쳤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이 부인께서 무섬마을에 오시는 날이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사의 방문일을 어찌 알고 그 날에 맞춰 무섬마을을 찾을 것인가.
경북 북부 지방의 ㅁ자 고택은 폐쇄 신분사회의 상징무섬골동반 바로 앞에 우람한 고택이 서 있다.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제작된 편액을 뽐내는 집이다. 이름은 해우당고택. 1830년에 초창되고 1879년 중수되었는데, 무섬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전통가옥이다.
물론 해우당고택은 건물의 소재지가 말해주듯이 ㅁ자형 구조를 보여준다. '물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ㅁ자형 거대 고택이 경북 북부 일원에 밀집하여 분포하기 때문이다. ㅁ자형 가옥구조는 폐쇄적 신분사회를 상징한다. 따라서 경상북도 민속자료 92호인 해우당고택을 둘러볼 때 가장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집의 구조, 즉 ㅁ자형 가옥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무섬마을에서 고택 체험을 빼놓을 수 없다. 세계 최고의 자연천으로 이름높은 내성천에서 놀았는데 문득 돌아서서 떠나기에는 너무나 아쉽다. 더 이상 알려질 필요가 없을 만큼 이름값을 떨치고 있는 내성천은 새삼스럽게 소개하지 않아도 무방할 터, 오늘은 영주 최대봉 시인의 <무섬에 와서 보니>를 지면에 싣는 것으로 가름하고 그 대신 고택들을 두루 둘러보리라.
무섬에 와서 보니 알겠네메마른 눈짓이었을 뿐이었노라 떠나보낸 시간들이여기 켜켜이 모래로 쌓이고물길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둘 데도 놓을 데도 없이 정처 없는 마음자리일 때하도 외로운 발길이 하릴없이 물가로 향할 때여기 그리움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무섬에 와서 보니 알겠네백년의 별빛이 해우당 지붕에 와송으로 피어나고천년의 달빛이 물 위에 안개다리를 짓는그 아득한 적멸 속에서도나는 너의 웃음에 눈 감고너의 눈물을 가두었다네그러나, 오늘, 나무섬에 와서 보니 알겠네저물녘이면 강물도 모래와 더운 숨결로 몸을 섞고밤새도 더러는 물을 건너 숲으로 가 뒤척인다는 것을떠날 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하지만덧없이 흐르는 이 물가에 앉으면그 눈빛 글썽이며 다시 돌아 와너를 생각하네오늘, 무섬 이 모래 둔덕에 앉아
무섬마을의 입향시조 박수 선생이 1666년에 건립한 만죽재고택(晩竹齋古宅)부터 둘러본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93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로, 역시 ㅁ자형 고택이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ㅁ자형 고택을 완성해낸다.
무섬마을에는 만죽재고택 이외에도 8개 가옥이 추가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무섬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일곱 군데 중 한 곳이다. 무섬마을 외에는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성주 한개마을, 제주 성읍마을, 고성 왕곡마을, 아산 외암마을이 그들이다. 무섬마을은 중요민속자료 278호다. 무섬마을에서는 "어느 집이 문화재인가?" 묻지 말라는 말이다. 40여 전통가옥이 그저 '멋지다!'
하회마을, 양동마을 등과 더불어 마을 전체가 국가 중요민속자료 지정
섬계고택은 무섬마을의 과거 이름 섬계(剡溪)에서 택호를 따왔다. 섬계가 무슨 뜻일까? 계(溪)는 변에 수[氵]가 있는 것으로 봐서 물을 뜻하는 줄 알겠는데 계(剡)는 낯이 설다. 불[火] 둘에 칼[刂]이 결합된 모양으로 미루어보면 뜨겁거나 날카롭다 정도의 의미일 듯하다. 한자가 본질적으로 뜻글자이므로.
무섬마을에 온천수가 솟나? 그런 상상도 해보지만 말 그대로 상상에 불과하다. 이곳이 중국 섬계 지역의 지형과 비슷하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류성룡의 출생지인 경북 의성 사촌마을이 지레짐작으로는 사촌(士村)일 듯하지만 실제로는 사촌(沙村)인 것과 같은 경우이다. 물론 섬계고택도 ㅁ자형이다.
"소중한 사람에게 오늘의 추억을 편지로 전하세요"
고택이 너무 많아 하나하나 모두 거론할 수가 없다. 중언부언하자면 앞의 문단이 결코 만죽재고택과 섬계고택이 무섬마을의 옛집들 중에서 한옥 체험장으로 가장 뛰어난 곳이니 그리로 찾아가라는 '홍보'가 아니라는 말이다. 글을 쓰는 중이므로 글감으로 적당한 고택을 다루었을 뿐.
게다가 무섬마을에는 한옥체험수련관도 있다. 최대 80명까지 수용 가능한 집으로, 가족용 방도 별도로 갖추고 있다. 전통놀이, 다도, 천연염색, 풍등 날리기, 예절교육, 짚 공예, 별 보기 등 다양한 교육, 체험, 놀이를 체험할 수 있으며, 수시로 음악회와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무섬마을은 심지어 마을기념관까지 지어 놓았다. 이 점 역시 의성 사촌마을과 같다. 즐비한 문화재, 오랜 역사, 독립운동의 성지, 향약, 뛰어난 자연환경 등 찾아오는 이들에게 보여줄 것이 너무나 많다는 뜻이다.
마을기념관 대문에는 '느린 우체통'이라는 이름표를 단 빨간 우체통이 매달려 있다. 우체통 위에는 '소중한 사람에게 오늘의 추억을 편지로 전하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리고 우체통 아래에는 그림엽서까지 놓아둔 친절과 배려가 돋보인다.
엽서를 꺼내들고 내성천 강둑으로 올라선다. 멀리 영화와 사진으로 많이 본 적이 있는 다리가 강물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그리고 근래에 가설한. 하지만 느낌이 같아 정겨운 외나무다리 하나가 하류에 또 하나 놓여 있다.
평일인데도 다리마다 사람들이 걷고 있다. 젊은 정인들도 정겹게 손을 잡고 다리를 거니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나이 지긋한 부부와 여럿이 함께온 성싶은 벗들도 눈에 띈다. 그들은 이미 서로에게 '늦게' 당도할 편지를 띄우고 나서 저 다리를 걷고 있으리라.
언젠가는 이곳 무섬마을 같은 곳에서 한번 살아보아야 할 텐데...조지훈 시인의 처가에서 점심을 먹었으니 이제 그에게 답례를 할 차례가 되었다. 이곳 무섬마을에 처음 들어온 옛사람들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는 시인 듯 여겨지는 <낙화>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무논도 밭도 없는 무섬마을 같은 곳에 거주하면 무엇을 먹고 사나' 싶은 걱정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런 곳에서 '주민'으로 한번 살아 보아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이 일어난 때문이었다.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덧붙이는 글 | 한옥 숙박이 가능한 고택이 많아 모두 기록하기가 오히려 번거롭습니다. <무섬마을>을 검색하면 모든 고택들이 다 떠오르니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섬골동반>도 홈페이지로 바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전화는 054-634-800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