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로 시작하는 하루
이른 새벽,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찾는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들여다보는 스마트폰. 옆에서 아내는 눈이 부신 듯 부스럭거렸지만 어쩔 수 없다. 그보다 더 긴요하게 체크할 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메르스 관련 소식이다.
간밤에 메르스 관련 새로운 소식은 없는가? 혹여 사망자가 늘거나 자가격리자가 늘지는 않았을까? 우리 집이나 나의 직장이 메르스 확진 환자가 거쳤던 강동경희대병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지역 사회에 이상은 없는가? 다행히 별다른 뉴스는 없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일어나서 자기들끼리 거실에서 놀고 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까르르 까르르대는 녀석들. 부스스한 얼굴로 방밖을 나서니 세 녀석이 웃으며 조르르 달려와 매달리기 시작하고, 첫째 까꿍이가 그 와중에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아빠, 오늘도 유치원 갈 수 있는 거지?""응. 괜찮을 것 같아.""야호! 유치원 갈 수 있다.""그렇게 좋아?""응. 유치원에 가서 친구들하고 놀 수 있잖아. 아직 친구들이 다 오지 않지만 그래도 좋아."까꿍이의 유치원 휴원은 지난 15일부로 끝났다. 메르스로 인해 지난 5일부터 12일까지 1주일이 넘게 유치원에 나가지 못했던 까꿍이는 14일 저녁, 자기 전부터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드디어 유치원에 가게 되었다며 신나 하는 녀석. 방학 끝날 때는 벌써부터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끙끙대더니 이번에는 웬일이래.
그러나 메르스 사태 이후 까꿍이의 등원 절차는 조금 달라졌다. 꼭 마스크를 써야했고, 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그 앞에서 체온을 쟀다. 운동장에서 못하더라도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꼭 열을 잰다고 했다. 열이 37도가 넘으면 유치원에 못 들어오는 게 방침이라나. 까꿍이의 말에 따르면 유치원에 들어가서도 틈만 나면 세정제로 손 소독을 한다고 했다.
물론 거창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까꿍이는 이 사소한 차이만으로도 위협을 느끼는 듯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뭔가 찜찜하거나 위험하다 싶으면 무조건 '메르스로부터 괜찮냐'는 질문이 우선이었다. 부모로서 그 모습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지만 시기가 시기니 만큼 그러려니 할 뿐이다. 이 또한 지나가겠거니.
메르스? 취소, 또 취소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도착한 사무실. 업무를 시작하기에 앞서 동료들과 티타임을 갖는데 역시나 주요 화제는 메르스다. 오늘은 누가 또 이렇게 걸렸다, 우리의 의료 시스템이 이래서 문제다, 세월호에 이어 메르스까지 경제가 엉망이다, 저기 창밖으로 보이는 강동경희대병원 때문에 길가에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등등.
그러나 역시 대화의 끝은 메르스와 관련된 업무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중간지원조직의 주요 업무는 어쨌든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이나 장터를 진행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을 모아야 하는 특성상 이 모든 것들이 현재 취소 혹은 연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되었지만 현재는 기약 없이 연기되고 있는 사회적경제 아카데미와 격주 토요일마다 지역의 벼룩시장과 함께 열렸지만 역시나 번번이 취소되고 있는 사회적경제 장터. 그리고 7월 초에 진행하기로 했지만 부득이 10월 말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던 마을공동체-사회적경제 공동 주최의 마을축제까지.
혹자들은 그런 것까지 걱정하며 어떻게 사업을 하느냐고, 그냥 진행하라고도 이야기 했지만 주최 측의 입장으로서 이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만약의 사태도 사태지만, 흥행 역시 중요한 고민거리이기 때문이었다. 교육을 하겠다고, 장터와 축제를 하겠다고 장을 폈는데 메르스 때문에 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그 모든 것을 보류할 수밖에.
다만 문제는 연간 사업들이 지금처럼 계속 취소되고 연기될 경우이다. 공공기관으로부터 사업을 위탁받아 진행하는 중간지원조직의 경우 1년 단위의 실적과 회계 정리가 매우 중요한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 사업들이 메르스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 집중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8개월 동안 차근차근 진행돼야 하는 사업들을 단 6개월 만에 혹은 4개월 만에 끝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일이 몰리는 만큼 힘들 수밖에. 지금이야 메르스 덕분에 조금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는 태풍 전 고요에 불과하다.
도대체 언제쯤 이 메르스 사태가 진정될 수 있는지. 정부는 계속해서 사태가 곧 진정되리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정부의 말은 대개가 틀리지 않았는가.
박물관? 동물원? 마트? 안 돼!메르스 사태는 또한 우리 가족의 주말 풍경도 바꾸어 놓았다. 평소 주말이면 토요일, 아빠가 진행하는 사회적경제 장터가 끝난 뒤 아이들과 함께 마트도 가고, 그 다음 일요일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박물관이나 동물원, 놀이공원도 갔었는데 그 모든 것이 정지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지하철을 타거나 길거리를 지나다닐 때 마스크를 꼭 써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막상 아이들을 사람 많은 곳에 데리고 가려니 꺼림칙한 게 사실이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성인보다 면역력이 높지 않으니까.
덕분에 아이들의 주말은 단조로워졌다. 아이들은 아빠가 노는 날이면 늘 그랬듯이 박물관에 가자, 동물원에 가자, 마트에 가자 등을 외쳤지만, 메르스라는 한 마디에 자신들의 주장을 거둬들여야만 했다. 메르스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자기들도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금세 시무룩해지는 아이들. 그렇다고 어찌 주말에 집에만 있을쏘냐. 눈치를 보던 까꿍이와 산들이가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럼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으로 놀러 가자는 것이었다. 어쨌든 집만 아니면 된다는 녀석들.
그래, 아직 메르스가 공기로 감염된다는 증거도 없는데, 까짓거 나가자. 숲과 들에서 노는데 설마 메르스에 전염되겠나. 다녀와서 잘 씻으면 되겠지.
결국 우리 가족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동네 뒷산의 놀이터로 향했다. 공원에는 종종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돌멩이 하나에, 갑작스레 등장한 토끼 한 마리에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빨리 녀석들이 아무 걱정 없이 돌아다녀야 할 텐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을 씻기고 다시 TV 앞에 앉는다. 평소 같으면 진작 들어가서 잠을 자야하는 까꿍이도 아빠의 눈치를 보며 같이 뉴스를 보겠다고 한다. 메르스가 언제 끝나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다. 과연 일곱 살짜리 꼬마아이의 눈에 비치는 요즘 세상은 어떤 곳일까? 녀석은 시간이 지나고 2015년 6월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평소와 아주 조금 다른 일상을 영위하는 요즘. 부디 메르스 사태가 조속히 진정되길 바란다. 정부는 거대 자본의 탐욕이 아닌, 이런 소시민들의 마음부터 헤아려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