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와 그 후손들의 묘가 있는 맹림(孟林)을 보기 위해 다시 취푸(曲阜)를 찾았다. 지난 국경일, 노동절에 이어 세 번째다. 단오절 3일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라 기차에 사람이 많은데, 미리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1시간 반 입석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라도 맹림을 찾는 편이 3맹 중 맹묘(孟廟)와 맹부(孟府)만 보고, 맹림을 보지 못한 찜찜함을 간직한 것보다는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취푸역 앞에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기사와 맹림까지 왕복 24km 거리를 120위안(2만 원)에 흥정하고 쩌우청(鄒城)으로 향한다. 맹림은 취푸와 쩌우청 사이의 외딴 산중에 있어서 이렇게 택시가 아니면 가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로 치면 KTX가 오가는 취푸동역 광장 앞에 커다란 공자상이 새롭게 세워지고 있다. 점점 높게 숭상 받는 공자에 비하면 2인자 맹자의 묘는 그야말로 그윽하고 한적한 산 속에 묻혀 있는 셈이다. 그런데 늘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공자보다 어쩌면 고요한 휴식을 즐기는 맹자가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택시가 작은 농촌 마을을 지나 드넓은 평야를 달린다. 보리를 갓 베어낸 논에 옥수수를 심었는지 노란 보리 밑동 사이로 파란 옥수수 싹이 자라 오르고 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삭을 맺어 탈곡을 마친 보리 밑동에서 성인의 여유가 느껴진다.
택시가 농로를 지나 드디어 맹림 입구 시산터우(西山頭) 마을에 도착한다. 맹림 진입로에 송나라 때부터 심어진 측백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공림(孔林)의 진입로에는 공자의 제자의 수와 나이에 맞춰 좌우에 각각 72, 73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맹림도 그에 못지않게 적잖은 측백나무가 힘겹게 찾아온 이방인을 기품 있는 자태로 맞이해준다.
맹자가 죽을 때 나이인 84세에 맞춰 84그루인지 세다가 그게 뭔 의미가 있나 싶어 그만둔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나이를 말할 때 공자와 맹자 같은 성인도 피해갈 수 없었던 73세와 84세를 직접 입에 담지 않고 작년에 72세, 83세라고 표현한다.
측백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신도를 따라 올라가자 풍수계(風水溪)라는 작은 시내를 가로지르는 어교(御橋)라는 다리가 나온다. 현세인 차안과 내세인 피안을 구분하는 경계를 상징한다. 공자의 무덤처럼 이곳도 풍수를 고려한 명당임이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관광객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마을 노인들이 아침을 먹고 산책을 나왔는지 옹기종기 앉아 찾아온 이방인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이 틀림없는지 그 눈빛이 한결같이 선량해 보인다.
어교를 지나자 검은 얼굴을 한 맹림, 아성림 비석이 신도 양옆에 서 있고, 그 뒤로 부서진 비석이 정작 내용이 적힌 비문은 어디다 잃어버리고 받침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래도 돌에 새겨진 조각이 예사롭지 않아 사진을 찍는데 관리사무소에서 뭐라 소리를 지른다. 표를 사라는 줄 알고 갔더니, 지금 맹림이 공사 중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발길을 돌릴 수 없어 올라가는데 우거진 고목 숲 사이로 맹자의 후손들의 묘가 도처에 들어서 있다.
얼마 안 가 정말 쌓인 기와 사이로 인부들이 오가며 횟가루, 석고를 개고, 작고 날렵한 기와를 크기별로 선별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어수선한 공사장 사이로 살짝 들어가려는데 책임자 같은 사람이 와서는 지금은 공사 중이라 못 들어간다고 한다. 순간 애써 찾은 맹림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절박함이 동시에 몰려온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맹림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막 왔다는 거짓말이 입에서 술술 나온다. 워낙 찾는 사람이 없는 터에, 멀리 한국서 왔다고 하니 정성이 기특했는지, 아니면 맹자의 측은지심이 동했는지, 그럼 저 왼편으로 조심히 들어가라고 입구를 알려준다.
공사 구조물 아래로 고개를 숙여 들어가니, 1567년 맹자 제59대손 맹언복(孟彦璞)이 지었다는 향전(享殿)이 더 멋진 옷을 입기 위해 혼란스런 공사장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다. 맹림은 송대에 조성되었다가 소실되었고, 1562년에도 건설되었다는 기록이 향전 앞 비문에 남아 있지만 그 터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보수와 단장을 마치면 오래 안식을 누리길 바란다.
향전은 매년 4월 2일 거행되는 맹자의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다. 중국 최고의 고건축 전문가들의 손길이 다섯 칸 향전의 곳곳을 어루만진다. 제례 물품이 쌓여 있었을 향전 안도 빈 공간을 덩그러니 드러낸 채 새 단장을 기다리고 있다. 언제 이런 모습을 볼까 하는 생각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공사 중이야' 하는 마음이 어느새 운 좋게 역사적인 보수 공사현장을 보는 듯한 뿌듯함으로 바뀐다.
향전을 지나자 가로8m, 세로 20m의 맹자의 묘가 뒤뜰에 넓게 자리해 있다. 1834년 맹자의 70대손이 세웠다는 비석에는 '아성맹자묘'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문화대혁명 때 동강난 이 비석은 쇠로 다시 이어졌지만, 비석을 받들고 있는 교룡의 입 부분은 볼썽사납게 망가져 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맹자는 군주도 백성을 위태롭게 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대단히 혁명적인 사상가였다. 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舍生取義) 호연지기를 주창한, 고대의 몇 안 되는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학자였다. 그러나 젊은 홍위병들 눈엔 그저 타도의 대상일 뿐인 낡은 봉건 전통으로 인식된 것이 안타깝다. 유물이 많아 몇 개가 훼손되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공림에 비해 맹림은 몇 안 되는 유물에 남은 상처가 더욱 측은하게 여겨지는 면이 있다.
삶은 온갖 우환 속에 있고, 죽음은 편안한 안락에 놓이는 것(生於憂患, 死於安樂)이라고 했던 맹자의 말을 떠올리며, 돌담이 사각으로 둘러쳐진 맹자의 묘를 한 바퀴 돌아 나온다. 마침 나이 지긋한 기술자들이 도르래를 돌려 지붕 위로 기와를 올리더니 골 깊게 지붕을 이어 간다.
세월과 자연이 아닌 그 무엇도 저 기와 지붕을 함부로 허물어뜨리는 일이 없길 바란다. 공사가 한창인 맹림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어교 주변에 올라갈 때보다 더 많은 마을 주민들이 앉아 있다. 뭐 볼 것도 없는데 여기까지 왔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맹자까지 찾아뵙는 기특한 녀석이라고 소곤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시선이 뒤통수에 모이는 듯해 근질근질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