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4년 교단을 떠나 곧장 강원도로 내려왔으니 강원도민이 된 지 어느 새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횡성군 안흥면에서 5년 6개월, 이후 원주로 옮겨 2015년 6월 말로 5년 8개월이 되었다. 안흥에 살 때는 '안흥산골에서 띄우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그 고장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140여 차례 기사화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한 원주시민으로 이 고장의 풍물과 이야기들을 그때처럼 욕심내지 않고, 발길 따라 무심(無心)한 마음으로 그려보고자 한다. - 기자 말
쾌적한 도시 원주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고 하더니, 지금 생각해도 경상도 태생인 내가 늘그막에 강원도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특히 횡성군 안흥에서 지낸 5년 6개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남을 꿈 같은 산촌생활이었다. 사실 내가 서울을 떠나 그 마을로 처음 갈 때 전재고개를 넘는데 눈물이 흘렀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을 테지만, 내가 과연 이 고장에 잘 적응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2009년 가을, 아내가 이런저런 이유를 말하며 이웃 도시 원주로 이사를 가고자 종용할 때는 간도 크게 "당신만 가라"고 버틸 만큼 나는 그 산골고장에 정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그곳을 떠나며 작별 인사로 당시 한광수 안흥면장에게 인사차 찾아가자 그분은 "이 고장에 당신 뼈를 묻으라"고 간곡히 붙잡았지만 끝내 떠나왔다.
원주로 옮긴 뒤 평생 처음으로 아파트생활을 하며 새로운 도시문화에 적응하였다. 5년이 지난 이제는 원주라는 도시가 낯설지 않게 되었다. 내가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돼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원주에 대한 얘기를 했다.
"원주는 자연재해가 적은 도시입니다. 외지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인지라 텃세가 없습니다."그동안 몇 년 살아보니까 그 기사 말대로 큰 가뭄도, 수해도 없는 도시로 산 좋고 물 맑은 쾌적한 도시였다. 그리고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도 없는 알맞은 규모의 도시로 군부대와 군인들이 많았다.
안흥 전재연재 첫 기사로 어디를 찾을까 하다가 자기 근본과 주특기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의병 전적지부터 찾아 나섰다. 지난 주말 먼저 민긍호 의병장 전적지를 찾았다. 의병대장 민긍호 전적비는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에 있었는데, 이전에 두어 번 지나친 곳이라 누구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찾아갈 수 있었다.
나는 집을 나선 후 횡성 행 버스를 탄 뒤 횡성 정류장에서 내려 20여 분 기다리자 낯익은 안흥행 버스가 왔다. 그 버스에 오르자 여전히 손님이 없었다. 이즈음 메르스 여파 탓인지 내가 살던 그때보다 더 손님이 없었다. 횡성에서 안흥으로 가는 길은 수백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 길은 큰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는 횡성군 우천면에서 안흥면으로 가자면 해발 800여 미터의 전재를 넘어야 했다. 내가 이 고장을 살 때 옆집 노씨에게 귀에 익도록 들은 말은 "옛날에는 전재에 산적들이 나타나 이따금 소장수들의 소도 빼앗고, 소 판 돈도 빼앗아 갔다"는 아주 높고 험한 고개였다. 그 구불구불한 고갯길이 그새 터널이 생기자 버스는 그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외면하고 아스팔트 포장의 전재 터널 길을 사뿐히 통과했다.
안흥면사무소 정류장에 내려 점심 요기를 하고자 밥집에서 찾았더니 주인이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요기를 하고 거리에 나오자 면서기도, 안흥찐빵마을 회장님도 반색을 했다. 그새 안흥찐빵 주인은 찐빵을 한 봉지 비닐에 담아 가방에 넣어주었다. 곧 월현리 가는 버스에 오르자 주천강 길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버스가 강림을 지나자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다. 기사가 행선지를 묻기에 민긍호 의병장 전적비에 간다고 말하자, 그는 곧 버스정류장이 아닌데도 내려주었다.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 주천강 강가에 세워진 의병대장 민긍호 전적비는 문자 그대로 적막강산으로 뻐꾸기만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다.
다행히 전적비 앞 제단에는 월현2리 주민 일동이 헌화한 꽃바구니와 국화송이가 있어 나그네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나는 제단 앞에서 깊이 묵념을 드린 뒤 전적비 뒷면의 비문을 읽었다
의병대장 민긍호 전적비문관동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는 여흥민씨 민치봉과 원주원씨 사이에 18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민긍호는 1897년 진위대(鎭衛隊)에 입대하여 1900년에는 원주 진위대 고성분견대 정교(正校, 현 상사)로, 1901년에는 특무정교로 근무하였으며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될 때까지 원주 진위대에서 근무에 충실하였다. … 민긍호 의병대는 강원도 ‧ 충청도 ‧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강년(李康秊), 윤기영(尹起榮) 등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약 1천여 명을 지휘하여 횡성 ‧ 충주 ‧ 원주 ‧ 여주 ‧ 고성 등의 지역에서 100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민 의병대장은 1907년 관동창의대장이 되어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 삼산리전투와 처현동전투, 죽전리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1907년 추운 겨울이 되자 일본군은 의병대 토벌을 강화하였다. 이에 민긍호 의병대장은 의병대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50~60명 씩 분산시켜 일본군 공격에 대항하였다. 1908년 2월 27일 오전 11시 강림 박달치 부근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월현리 10리 지점에 있는 궐덕리(현, 고비덕)에서 숙영하였는데, 일본군경은 이 정보를 탐지, 포위 공격하였다. 민긍호 의병대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3시간 30분 만에 탄환이 떨어져 전세가 기울었다. 그러자 민긍호 대장은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경에게 스스로 체포되어, 원주 일본군 수비대로 압송되는 도중, 강림5리 창말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날밤 의병대 60명이 민긍호 대장을 구출하기 위해서 박달치 동북방으로부터 일본군경을 습격한 뒤, "민긍호 대장님은 어디 있는지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라" 크게 외쳤다. 이 소리를 듣고 민 대장이 포박된 채 탈출을 시도하자 다급해진 일본군은 그 자리에게 사살하였다. 이렇게 민긍호 의병대장은 1908년 2월 29일 43세의 나이로 장렬히 순국한 것이다. … [찬(撰) 박찬언 제자(題字) 이병렬 장군]
영혼이 망망대해를 떠돌지라도민긍호 의병대장은 생전에 강원도 관찰사가 귀순을 권유하자 "나의 뜻은 나라를 찾는데 있으므로, 강한 도적 왜(倭)와 싸워서 설혹 이기지 못하여 흙속에 묻히지 못하고 영혼이 망망대해를 떠돌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통박하며 일본군경과 맞섰다고 한다.
나는 민긍호 의병장 전적비 참배를 마치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녹음에 깃든 주천강 언저리가 고즈넉하고 더없이 아름다웠다. 마침 다리 건넛마을 들머리의 밤나무 밤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하여 그 향기가 나그네를 유혹했다. 밤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한숨 자거나 장기 한 판 두면 아주 기가 막히게 좋을 듯했다. 가까이 가서 밤나무를 한창 카메라에 담는데 그 마을 주민이 다가왔다.
"왜 남의 밤나무를 찍으시오?" 경계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왜 이 마을에 왔소?""민긍호 의병장 전적비 참배를 하고 가는 길입니다.""하도 세상이 수상하여 결례를 했소. 아무도 찾아주지 않은 우리 마을 전적비를 찾아주시다니, 참 고마운 선생이오."그제야 촌로의 태도가 180도로 달라졌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들었다는 민긍호 의병대장의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비문과 비슷했다.
"아무튼 고맙소. 내 집에 가서 찬 물이라도 들고 가시오.""감사합니다. 곧 버스가 올 시간입니다."내가 강 언덕으로 오르자 버스가 정류장에 곧 도착했다. 역시 텅빈 버스를 타고 원주로 돌아왔다. 저물 무렵 원주시내로 돌아와 원주시 명륜동 치악체육관 옆에 있는 민긍호 의병장 기념상을 둘러본 뒤 치악산 밑 내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