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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연재. 개실마을 초입에 있다. 김종직을 기려 유림들이 고종 원년에 세운 건물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도연재. 개실마을 초입에 있다. 김종직을 기려 유림들이 고종 원년에 세운 건물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 정만진

경북 고령 개실마을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은 경로당이다. 주차 후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마을 쪽을 향해 서면 길 건너 정면에서 경로당이 마주 보인다. 언뜻 보아도 고택은 아니다. 하지만 가능한 만큼 이곳저곳 둘러보는 것이 여행자의 정체성에 맞는 행동이므로 경로당에도 들어가 본다.

개실마을 경로당이라 해서 별다른 특징이 있지는 않다. 다만 현관 장식장에 '內務部(내무부)'가 연도별로 발행한 <새마을 運動(운동)> 자료집이 여러 권, 그러나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십수 년은 된 듯한 모습으로 꽂혀 있어 눈길을 끈다.

경로당에서 나와 도로를 따라 걷는다. 이미 여러 번 방문해 보았고, 초행자라 하더라도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곳이 개실마을이므로 주된 답사로를 찾지 못할 일은 없다. 오른쪽, 즉 대구 방향으로 걸으면 된다. 개실마을 입석, 점필재 종택 안내판, 문화해설사의 집 등이 모두 그쪽 도로변에 있는 것을 차를 타고 올 때 이미 보았다.

 개실마을 안길. 오른쪽 끝에 김종직 고택이 보인다.
개실마을 안길. 오른쪽 끝에 김종직 고택이 보인다. ⓒ 정만진

도로변이지만 지대가 낮아 자연스러운 독립 공간처럼 보이는 터에 검은 빗돌들이 줄을 지어 세워져 있다. 김씨들이 대대로 이 마을에 살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내용 등을 담은 빗돌들이다. 빗돌들은 도연재(문화재자료 111호)를 등진 채 도로 방면으로 서서 오가는 차량들을 응시하고 있다. 도연재는 서당 겸 재실 용도로 지어진 1886년(고종 1) 건물로 유림들이 김종직을 기려 건축했다. 

김씨세거비(金氏世居碑)를 읽어본다. 김씨세거비는 개실마을의 한자 표기가 아름다운 마을을 뜻하는 가곡(佳谷)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또 김종직의 참화 이후 밀양, 합천, 고령 등지를 떠돌던 그의 후손들이 1651년(효종 2) 비로소 이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도 알게 해준다. 입향조는 김종직의 6세손 김수휘라 한다.

마을 뒷산의 이름이 접무봉, 앞산의 이름이 화개산이라는 것도 김씨세거비를 읽어서 얻은 소득이다. 세거비의 비문은 "개실이 영원히 빛나는 땅이 되고 그 이름이 이 강산에 맑고 밝은 종소리로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마감된다.

 개실마을 복판에 마련되어 있는 아이들의 놀이마당.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들 너머로 점필재종택이 보이는 풍경. 그네를 타는 작은 사내아이의 머리 위로 점필재종택의 사랑채와 안채가 보이고, 사진 오른쪽 끝 산 아래에 사당이 보인다.
개실마을 복판에 마련되어 있는 아이들의 놀이마당.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들 너머로 점필재종택이 보이는 풍경. 그네를 타는 작은 사내아이의 머리 위로 점필재종택의 사랑채와 안채가 보이고, 사진 오른쪽 끝 산 아래에 사당이 보인다. ⓒ 정만진

도연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문화해설사가 상주하는 안내소가 나온다. 이곳에서 마을 안쪽으로 곧게 펼쳐지는 길이 개실마을에서 가장 넓은 골목이다. 그러나 신작로라고 할 수는 없다. 길 끝에 보이는 점필재 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62호)의 건축 시기가 그 증거다.

일제가 신작로라는 이름의 도로를 개설한 것은 강점기 이후부터이다. 선산김씨 문충공(김종직)파 종택인 이 고가의 안채는 그보다 100년 이상 앞선 1800년 무렵에 지어졌다. 사랑채도 1812년 전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개실마을의 골목이 비록 넓다고 하더라도 "신작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점필재 종택의 사랑채
점필재 종택의 사랑채 ⓒ 정만진

점필재는 김종직(1431-1492)이다. 성종 때 도승지 등을 역임한 김종직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된다. 항우가 초왕 의제를 죽이고 황제가 된 것을 비판한 <조의제문>을 생전에 쓴 게 화근이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실록의 원고)에 <조의제문>을 기록해둔 것을 안 류자광 등이 연산군을 부추겼다.

류자광 등은 <조의제문>이 '세조를 헐뜯으려고 쓴 글'로 '연산군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반역'에 해당된다면서 관련자들을 참형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무덤 속에 있던 김종직의 시신이 땅밖으로 끌려나와 참수되고, 김일손 등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된다. 이곳 개실마을은 사화의 처참한 핏빛이 서려 있는 우리 역사의 생생한 현장인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한국사> 중 무오사화 앞뒤 부분

사림파의 형성은 주자학의 보급과도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졌다. 신흥사대부에 의해 수용된 주자학은 성균관(成均館)과 향교(鄕校)교육을 통해 널리 보급되었고, 이에 따라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많은 사류들이 배출되었다. 선초 재지사족으로 상경종사(上京從仕)한 신진사류들은 부모봉양을 위해 본관지나 부모 소재지의 수령으로 부임하면서 성리학의 보급과 지방교육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성리학적 실천윤리로서 <소학(小學)>과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림은 여말선초 이래 비조직체로서의 사류(士類)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과 그의 문인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의 교육활동에 의해 영남·기호지역 사림들의 인간적·학문적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성종 16년(1485) 이후 훈구세력에 대응되는 정치세력, 즉 사림파로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은 훈구세력과의 갈등과 충돌을 예고하였다. 성종대 중반 이후 훈구세력 기용의 부당성과 소릉복위(昭陵復位) 주장 등 과감한 언론을 행사한 이들은 연산군의 즉위 이후 그 세력의 한계가 노출되면서 훈구파로부터 탄압을 받는 사건, 즉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하였다.

무오사화는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고, 이에 반대한 인물들을 추장(推獎)한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가 빌미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조대 이래 정치·사회·경제적 여러 특권을 향유하고 비리를 저질러오던 훈구파를 사림파가 견제하려 한 데서 발생하였다. 이로써 성종대 이래 중앙정계에 진출했던 사림파는 일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가 폐위·사사(賜死)된 사실로 발단이 된 갑자사화(甲子士禍)는 궁중과 결탁한 조신(朝臣)과 부중(府中)의 조신간의 대립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무오사화에서 잔존한 사림파도 화를 입었다. 그러나 이는 '전향 사림파'의 출현, 동조세력의 확장을 통해 중종대 이후 사림파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후 전개된 연산군의 난정(亂政)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종식되었다. * 본래 한자만 노출되어 있는 것을 인용자가 한글로 바꿔쓰고 한자는 괄호 안으로 집어넣었음.


 김종직 사당
김종직 사당 ⓒ 정만진

김종직을 기리는 사당은 점필재종택 안으로 들어가 담장을 오른쪽에 끼고 50미터가량 걸으면 나온다. 사당의 문은 잠겨 있다. 하지만 뒤로 대숲이 울창하고, 맑은 날이면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배경을 이루어 그 풍광이 아름답다. 바람에 댓잎 서걱이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사당에 참배하러 온 사람의 기분이 된다.

개실마을 최고의 고택은 당연히 점필재종택이다. 물론 개실마을에는 그 외에도 옛집들이 제법 여러 채 있다. 당연히 그런 집들은 손님들에게 민박의 기회도 제공한다. 해설사의 집 앞에 세워져 있는 마을 안내판에는 연풍고가, 맥산댁, 덕동댁, 못골댁, 하동댁, 웅기댁 등등 열다섯 채나 되는 집들이 숙박 가능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숙박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을 안 골목을 돌아보면서 집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개실마을의 민박집 풍경
개실마을의 민박집 풍경 ⓒ 정만진

마을 뒤로는 등산로도 있다. 점필재종택을 왼쪽으로 두고 오른쪽으로 마을 끝까지 가면 등산로 입구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앞 주차장 뒤에는 뗏목 체험장도 있다. 이곳 뗏목 체험장은 물이 얕아 위험할 것이 전혀 없다. 따라서 젊은 부모들이 유아들까지 뗏목에 태워준다. 본격적인 뗏목을 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체험장이다.

개실마을에서 숙박을 하였거나, 마을을 둘러본 후 시간 여유가 있는 분들을 위해 고령을 대표하는 역사관광지를 소개해 본다. 이미 점필재종택을 보았으니 이제 맨 먼저 떠오르는 곳은 대가야 왕릉 전시관이다. 이곳에 가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잠정 등록된 주산 고분군까지 둘러볼 수 있다. 대가야박물관도 왕릉전시관 바로 옆에 있다.

대가야 군청을 가운데에 두고 왕릉전시관과 대척점에 우륵 박물관이 있다. 고령에 와서 이곳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곳에서는 가야금을 만드는 체험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병장 김면 유적지가 기다리고 있다. 이런 곳을 빠뜨리지 않고 찾는 정신, 그것은 정말 중요하다.

덧붙이는 글 | 고령군청이 발간한 <2017 올해의 관광도시 고령>은 개실마을에서 하루에 200명까지 숙박할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공식 문의 전화는 010-3826-7221.



#개실마을#김종직#경북고택#김면#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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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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