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제도, 청년 멍들인다] 기획에서는 현재 대한민국의 취업준비생들이 과도한 취업 사교육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 원인이 기업들의 채용 절차에 있음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각 꼭지마다 자기소개서 대필, 면접 사교육, 인적성검사, 탈 스펙 채용 등 복잡한 채용 절차에 의해 비대해지는 취업 사교육 시장을 조명하고 채용 절차의 합리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 기자말
'자소서 대필업체에 맡기는 거 어떨까요? 가격대가 어느 정도 될지... 제 주변 사람들도 대필 많이 맡기던데, 공채 자소서 대필해도 괜찮을까요?'한 취업 고민 사이트에 올라온 글. 취업용 자기소개서를 대필업체에 맡기려는데 어떤지 조언을 구하는 내용이다. 댓글에서 다른 사람이 '면접에서 들통난다'고 조언했지만, 글 게시자는 자신의 필력으론 여러 군데 공채 자소서를 쓰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대한민국 국민은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OO학교 O학년 O반 OO번'의 고유명사를 획득한다. 자기소개에 '소속'만큼 좋은 재료는 없다. 하지만 무럭무럭 자라 대학을 졸업할 즈음, 자기소개는 새로운 국면에 마주한다. '취업 자기소개서'. 자기소개, 지원동기, 경력사항,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말하며 '좋은 일꾼'임을 증명하는 것. 난생 처음 써보는 '나'에 대한 글에 여생이 달렸다. 결국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다.
취업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한 20대의 노력은 눈물겹다. 취업을 목적으로 한 그룹스터디, 합격 자기소개서 모음 사이트, 합격자들의 자기소개서 첨삭, 취업 자기소개서 대필 업체까지. 취업준비생들에게 대필은 이미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자소설'을 위한 취준생의 눈물은 결국 돈과 만났다. 업체에서 써준 자기소개서는 어떨까. 대필시장을 직접 찾았다.
9만 원 입금 하루 만에, 난 딴사람이 되었다자기소개서 대필 의뢰를 하기로 마음먹은 날 아침, 늦잠을 자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학교로 갔다. 강의실 좌석에 앉자마자 수업 내용은 녹음기에 맡겼다. 수업 후에 잡힌 팀 과제에 가져갈 자료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팀 모임이 끝나고 학사지원부에 들러 준비해둔 졸업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 다음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걸어가며 토익 단어를 외웠다. 강의실에 도착해 의자에 앉았지만 쉬지 못했다. 가방에서 원고지를 꺼내 고등학생 논술 첨삭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다음 학기 등록금 마련을 위해서다.
수업 10분 전, 당일 수업의 발표 준비를 했고, 정신없이 75분이 지나갔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편의점에서 김밥 한 줄을 사 먹으며 봉사활동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역삼역으로 향했다. 대필 의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제야 기억났다.
학점, 어학, 대외활동, 등록금 마련, 봉사활동. 하루의 일정이 이렇다보니 재학생으로 살면서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기란 쉽지 않다. 졸업 전에 취업한 선배의 일화는 마치 전설처럼 내려오곤 한다. 기업의 공채 발표가 나면 약 일주일 정도의 서류제출 기간이 주어진다. 밤에 짬을 내 써야 하는데 몸이 고되니 잠들기 일쑤다. 당장 눈앞의 일을 포기해야 불확실한 취업 자기소개서를 조금이나마 쓸 수 있다. 그래서 대필은 편했다.
인터넷으로 자기소개서 대필을 검색한 뒤 대필 업체 J사이트를 클릭했다. 화려한 이력의 대필 작가들. '컨설턴트'라 불리는 이들은 기자나 작가 경력에 대필 경력이 3~5년 정도 됐다. 의뢰 게시판엔 5842개의 게시글이 있었다. 하루에 2개 이상의 의뢰가 들어오는 꼴. 의뢰양식은 표에 자신이 살아온 성장 과정, 이력, 자격증 등을 입력하는 방식이다.
양식을 완성해 업로드하자 입금 문자가 도착했다. 2500자에 7만 원. 만약 24시간 안에 받으려면 2만 원을 추가해야 했다. 마치 토익의 특별 접수기간을 연상케 하는 시스템이다. 빨리 받기 위해 9만 원을 입금했다. 의뢰가 완료됐다.
전화가 울렸다. 늦은 10시, 대필작가였다. 내 인생을 대신 써주는 그의 목소리는 묵은 파김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고객에게 왜 조금이라도 스토리를 짜서 보내지 않았는지 물었다.
작가 : "자료가 너무 부족해가지고요. 좀 엮어 보려 그러는데 잡히질 않는 거예요."나 : "어떤 걸 써야 될까요?"작가 : "경력 사항이 지금 몇 가지 있는데 이거를 어떻게 기업과 연결시켜서 얘기를 하면 좋을까. 띄엄띄엄 있어서요. 양이 적은 건 아니에요. 어떻게 맞추면 좋을까. 그게 좀 그렇구요. 양에 비해서 단편적으로 나와 있어가지고. 좀 그렇네요."나 : "어떤 얘기를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감이 잘 안 잡혀서."작가 : "그죠. 이렇게 해놓으니까 본인도 감이 안 잡힐 거예요. 스토리식으로 엮어놓지 않아서. 저도 웬만하면 그냥 하는데 하다가 연락드린 거거든요."그는 자기소개서가 '면접'에까지 갈 것을 확신했다. 자신이 스토리를 함부로 구성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면접을 볼 때 너무 자기랑 동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입금한 지 23시간 46분 만에 이메일로 자기소개서가 도착했다.
"구직활동 하면서 내 사상 드러내기 부담스러워"
다운로드 받은 자기소개서는 '거짓'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한 적이 없고, 어머니는 '김장담그기 봉사'와 무관하다. 아버지는 복부비만이며 어머니는 일이 바빠 봉사할 여력이 없다. 업체에 제출한 '나의 단점'은 잠이 많다는 것이었는데 자기소개서엔 '지나치게 꼼꼼하여 일의 속도가 늦어진다'고 적혀 있었다.
경력사항은 깔끔하게 잘 정리됐다. 모든 이력이 의뢰서에 쓴 만큼 담겨있었다. 복잡한 문장들은 정중한 느낌을 주었다. 이 정도라면 바쁜 하루 일정에 5분 정도 투자해 대필을 맡길 만하다. 글을 쓰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자격증 준비에 자기소개서를 쓸 시간이 없다면,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매끄러운 글을 쓸 능력이 부족하다면 생각이 날 '서비스'였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이 시대에 취업용 자기소개서도 시류에 편승한 것이다.
최근 항공사 취업에 성공한 김유진(27, 가명)씨는 "내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면 그야말로 아웃팅"이라고 했다. 청년에게 취업자소서란 '아웃팅'의 위험만큼이나 부담스럽다는 뜻이다. 자기소개서가 꽤나 복잡한 문제임을 시사한다.
취업준비생들이 취업용 자기소개서에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애초에 '자소서'는 있는 그대로 쓰일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확고한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기업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쓰기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취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도 '맥주 한 캔 마시며 영화관람'이라고 답을 하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결국 대필시장은 어차피 '숨겨야 할 바에야 잘 숨기는 사람에게 의뢰하자'는 소비자의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나'를 드러낼 수 없는 현실. 김씨의 말이 떠오른다.
"어차피 진짜 내가 아닌데, 뭐 돈 주고 사면 어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윤 솔 시민기자는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http://seoulyg.net) 대학생기자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