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박수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상기된 표정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가 미리 준비된 대형버스에 오르는 일본 대표단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사죄할 마음도, 반성의 태도도 없는 일본을 상대로 단지 각주에 강제징용 문구 몇 자 넣도록 한 게 무슨 성과라는 것인지…."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5일(현지시각) 독일 본. 일본 군함도 등 23개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반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독일로 날아간 이국언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아래 시민모임) 대표가 등재 확정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말이다.
비인간적 강제징용이 자행된 현장이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 철강, 조선 그리고 탄광'이란 핑계로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만장일치로 인정받았다. 한국 정부도 이에 동의해줬다.
한국 정부는 "일본이 강제징용을 인정했다"며 자화자찬하는 모양새지만, 일본이 곧바로 "강제징용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발표하면서 "일본의 법적 책임과 배상 문제는 안중에 두지 않다가 외교적 굴욕을 당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의 자화자찬, 일본의 발뺌
한국 정부는 "1940년대 몇몇 시설에서 많은 한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끌려와 가혹한 환경에서 일하기를 강요받았다(forced to work)"라는 일본 대표단의 발언록 내용을 '등재 결정문에 주석으로 반영하는 것'에 합의해, 등재 결정에 동의했다. 등재 결정문에는 각주로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의 발표를 주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를 두고 한국 정부와 언론은 일제히 "일본이 조선인 강제징용을 인정했다"고 발표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등재 직후 외교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는 과거 1940년대에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로 노역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인포메이션 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의 정당한 우려가 충실히 반영되는 형태로 (등재가) 결정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최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과 관련된 긍정적 움직임에 더하여 이번 문제가 대화를 통해 원만히 해결된 것을 계기로, 한일 양국이 선순환적 관계 발전을 도모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등재 직후 도쿄에서 기자들과 만나 "(각주에 담긴 발언록이) 강제징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앞서 영문 발언록의 "일하기를 강요받았다(forced to work)"는 문구를 일본어로 "일하게 됐다(働かされた)"라고 번역하며 강제성을 흐린 것이다.
"아베의 역사 세탁 시나리오 완성"
곧장 야권과 시민단체는 일본의 꼼수를 향한 지적과 함께, 윤 장관의 '자화자찬'을 향한 비판을 쏟아냈다.
시민모임은 6일 성명을 통해 "이 같은 결과는 협상 초기부터 예상된 것이었다"며 "이는 일제의 한반도 불법 강점과 그에 따른 법적 책임 및 배상문제를 안중에 두지 않은 역사인식의 빈곤과 부재에서 비롯된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 정부는) 쇼카손주쿠 문제는 애초 거론조차 해 볼 생각이 없었고, 일제 강제동원 문제 역시 사죄와 법적 배상 문제는 처음부터 배제한 채, 지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협상을 진행했다"며 "그 결과 우리 정부는 강제징용이란 문구 하나를 얻는 대신, 결과적으로 아베 일본 총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추진해 온 일련의 역사 세탁 시나리오를 완성시켜주는 주역이 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쇼카손주쿠는 정한론의 이론적 배경이 된 요시다 쇼인의 사설 학당으로 이번에 세계유산에 등재된 23곳 중 한 곳이다. 요시다 쇼인은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기도 하다.
또 시민모임은 "일제 강제징용 시설이 세계적 관광지로 부상할 수 있도록 그 시설물들의 부가가치만 높여주는 꼴을 자처하고 말았다"며 "이번 등재 결과는 한 마디로 역사 인식 빈곤이 부른 박근혜 정권의 외교적 야합이자 굴욕이다"고 강조했다.
김영록 새정치민주연합 수석대변인은 이날 현안 브리핑을 통해 "이번 등재를 두고 '전방위적 외교 노력이 이뤄낸 값진 성과'라는 윤 장관의 자평은 한 나라의 외교부 장관이 가진 상황인식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안일하고 단순하다"며 "한국 정부는 강제징용 문구 하나 얻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외교적 성과로 자화자찬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의 끝나지 않은 고통 해결에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정은 정의당 대변인도 이날 국회에서 "근대 산업시설들의 세계유산 등재는 일본이 동북아시아 발전을 가져왔다는 선전 도구로 활용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