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긴 하겠지만, 이곳 서울은 가뭄이 심했다. 한강에 녹조가 창궐하니 이제나 저제나 장맛비가 한차례 힘차게 내려줄 것을 고대했건만, 장맛비가 가랑비만 못하게 찔끔거리며 내린다.
그래도 비가 내린다고 옥상 텃밭에 올라가 보니 채소들이 싱싱하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수돗물을 주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그들에겐 보약인가 보다. 토란잎에 맺힌 하늘에서 내린 비로 만들어진 비이슬, 수돗물을 줄 때 만들어진 것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
비가 제법 세차게 내렸으면 이렇게 맺히지 못했을 것이다. 도둑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내리는 비가 야속하긴 하지만, 그래도 습기를 머금고 있는 공기만으로도 고맙다.
이렇게 비를 애타게 기다리다가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언제 그치나?'하는 게 사람이지만, 가물어도 너무 가물어서 비만 내려준다면 그런 투정은 사치인듯 할 것 같다.
초록의 빛만 보면 미칠 것 같이 좋았는데, 최근 한강의 녹조 현상을 목도하면서는 섬뜩하기도 하다. 같은 초록 생명이건만, 하나는 마치 인간을 위협하는 적처럼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옥상 화분에 준 물을 재활용하기 위해 바쳐둔 바가지에도 녹조가 끼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썩기 전의 단계가 녹조 현상이다.
한강의 녹조가 이번 장마로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서울 시민의 식수원으로서 한강의 기능은 마비될지도 모를 일이다. 식수 대란이 일어난다면, 또 없는 사람들만 고생을 할 것이다.
불공평한 거래, 농부의 심정을 헤아리다
점심에 먹을 풋고추를 땄다. 점심은 그야말로 '마음에 점 하나 찍는 정도'의 행위면 족하겠지만, 이렇게 싱싱한 풋고추와 막된장과 시원한 얼음물이 있다면 점을 몇 개라도 찍어야 할 것 같다.
아침엔 오이, 가지, 고추, 상추로 찬을 삼았다. 이럴땐 쌈장보다 막된장이 제격이고, 아내가 보글보글 끓인 강된장도 제격이다. 삼시세끼 먹는 것이 별것인가 싶다. 이런 식탁을 대하다 보면 적게 먹고, 검소하게 먹어도 예전 보릿고개에 비하면 진수성찬인데 얼마나 잘 먹자고 아둥바둥 살아가는 것인지 묻게 된다.
지인에게 얻은 토종 오이 씨앗, 올해는 조금 늦게 심어서 오이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막상 꽃이 피고나니 오이를 기대하게 된다. 올해는 별로 작황이 시원치 않다. 죄다 수꽃만 피고 길죽한 오이가 달린 암꽃은 적다.
그제만 해도 성냥개비만 하던 것이 어제는 나무 젓가락만 하게 자랐다. 오늘 아침엔 저거 며칠 지나면 노각이 되겠는데 싶다. 신비스럽다.
올해 옥상텃밭에서 가장 잘 된 작물은 가지다. 매일 5~10개 정도를 수확하고, 아침에 물을 줄 때마다 하나씩 따서 공복에 먹는다. 지난 밤의 기운과 새벽의 기운이 촉촉하게 들어있는 가지, 이슬이 내린 날 아침에 따먹는 가지의 맛은 더 촉촉한 것이 맛나다.
가지만 보면 나는 어릴 적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여름날 가지를 따는 일을 돕다가 너무 더워서 엄마에게 '쭈쭈바'가 먹고 싶다고 했다. '쭈쭈바'가 100원 하던 시절이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가게에서는 돈 대신 농작물로 물물교환을 하기도 했다. 낑낑거리며 가지 한 접을 매고 갔는데 쭈쭈바를 하나밖에 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이 허탈했다.
그 이후 한 동안 쭈쭈바를 먹지 않았다. 가지 100개의 가치가 겨우 쭈쭈바 하나라니 그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냥 밭을 갈아엎는 농부의 심정을 너무 어릴 적에 이해를 했다.
절로 나온 호박의 싹, 애호박이길 기대했는데 기대에는 못 미쳤다. 그래도 늙은 호박으로 호박범벅을 해먹거나 그냥 쪄서 먹으면 제법 맛이 좋다. 지난 가을이거나 겨울 즈음에 호박죽을 해 먹고, 속에 든 씨앗을 옥상 화분에 버렸더니 기어이 겨울을 나고 싹을 냈으니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며 애지중지 키울 수밖에 없다.
호박은 제법 많이 거뒀고, 제법 많이 달려있다. 애호박이 아닌 것이 아쉽긴 하지만, 이 호박도 작을 때 따서 먹어보니 식감이 더 단단한 것이 그런대로 먹을만 하다. 그러면 된 일이고, 감사한 일이 아닌가?
지난 해에는 어성초액을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다. 머리숱이 적어 고민하는 아내가 어성초액을 정성껏 바르더니만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오일장에 나갔다 만난 어성초 모종을 사다 심었다. 잘 퍼지고, 쑥쑥 퍼진 새싹이 올라오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냄새만 좋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어성초는 이름 그대로 물고기 비린내 혹은 썩는 냄새가 난다. 그래도 건들지 않는 바에는 역겨운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비가 금방이라도 내릴듯이 하늘은 찌푸둥한데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한차례 퍼부어 가물도 해결되고, 한강의 녹조도 해결되고, 무더위도 한풀 꺾였으면 좋겠는데 일기예보대로 오늘 밤부터는 비가 좀 내리길 기대해 본다.
옥상텃밭, 어머님이 가꾸실 때와 비교하면 밭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우리 식구가 다 먹지 못해 나눌 만큼은 거두고 있으니 이 정도면 제대로 농사짓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