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취임 157일 만에 사퇴했다. 그는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한 '죄'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배신의 정치"라는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들었다. 박 대통령의 시선에서는 유 원내대표의 행보가 '배신'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정치권 안에서 '파격' 그리고 '혁신'으로 읽혔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자신이 보수 안에서 박근혜 정권과 대척점에 있음을 증명했다. 자신을 박 대통령을 비롯한 과거 보수 세력과 차별화된 '신보수'의 상징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신보수 증명한 유승민의 '언어'그 모든 것은 그의 '언어'에서 출발했다. 그 시발점은 지난 2011년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 경선이다. 그는 "부자들은 돈이 많아 주체를 못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이 과연 보수입니까?", "재벌 대기업은 수십조 원 이익을 보는데,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이 과연 보수입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정한 시장 경제', '감세 중단', '복지 확대'. 그가 말한 언어는 그때부터 과거 보수와 차별되기 시작했다(관련기사 :
'박근혜 구애' 홍준표, 유시민이 칭찬한 유승민).
지난 1월 원내 대표 경선에 출마했을 때도 그랬다. 그는 "확실한 변화로 총선 승리를 약속합니다"라며 "4년 전 전당 대회에서 저는 고통 받는 국민들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제가 외쳤던 용감한 개혁은 바로 지금 우리 당에 절실히 필요한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4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자신의 개혁 의지에 변함이 없을 것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그는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이 '밀어 주는' 이주영 의원을 여유 있게 따돌리고 원내대표 자리에 올랐다(관련기사 :
유승민 "박근혜 지지율 추락...내년 총선 어렵다").
그의 '언어'가 가장 큰 울림을 준 것은, 지난 4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이었다. 그는 "새누리당은 보수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한다"라며 "새누리당은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 받는 서민·중산층의 편에 서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134조5000억 원의 공약 가계부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점을 반성한다"며 "증세 없는 복지는 실패"라고 못 박았다. 여당 원내 대표가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 사실상 파기 됐음을 선언한 것이다(관련기사 :
'야당의 언어'로 연설한 유승민).
유 원내대표는 또 "녹색 성장, 4대강 사업, 창조경제를 성장의 해법이라고 자부할 수 없다"며 "임기가 3년 가까이 남은 박근혜 정부가 근본적인 개혁의 길로 나아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벌 대기업은 정부의 특혜와 국민의 희생으로 성장을 이뤘다"면서 "재벌도 개혁에 동참해야 하며 천민자본주의 단계를 벗어나 비정규직, 청년실업 등을 해결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야당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증세 문제를 공론화 하고, 보수당의 금기 같았던 재벌 대기업 비판에 나선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연설에 야당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우리나라의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 명연설이었다"라고 평가했고, 정의당에서도 "연설에 찬사를 보낸다"고 극찬했다. 반대로 여당에서는 유 원내대표를 지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의 행보를 '좌클릭'이라고 칭하면서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또 청와대 역시 "유 원내대표 개인의 소신"이라며 깎아내렸다. 지금의 상황과 연결해보면 그의 연설에 박 대통령이 어떤 반응이었을지 쉽게 상상된다.
그의 마지막 말도 적잖은 파장을 주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8일 사퇴하면서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라고 말했다. 자신의 사퇴를 종용한 박 대통령과 친박 의원들을 우회적으로 겨냥한 말이다. 이어 그들이 훼손시킨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라는 걸 명확히 했다(관련기사 :
'배신의 정치'를 '헌법 1조 1항'으로 돌려주다).
유 대표는 끝으로 "지난 4월 국회 연설에서 '고통 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겠다, 제가 꿈꾸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하겠다'고 했던 약속도 아직 지키지 못했다"며 "그러나 더 이상 원내대표가 아니어도 더 절실한 마음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다"고 말했다.
비록 물러나지만 지난 4년 동안 그가 주장해 온 것들이 계속 유효할 것임을 확인하는 말이다. 그의 '언어'가 어떤 현실을 만들어 낼지 지켜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