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병원에 다닐 일이 있었다. 중년 남성인 의사는 대뜸 반말로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어느 날은 진찰실로 들어서며 꾸벅 인사를 하니 "어, 왔어?"라고 답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면, 그 의사는 똑같이 행동했을까. 유독 혼자 있을 때 이런 일을 겪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20대의 '어린 여성'인 내게 이런 경험은 흔했다. 장소와 상황만 다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페이스북에서 '그래, 나는 어린년이다'(약칭 '나다') 페이지를 마주했을 때 '이거다!' 싶었다. 페이지 이름만으로도 '사이다'를 마신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개그맨 장동민의 여성 혐오 발언 논란,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 사태, 유명 논객의 데이트 폭력 문제 등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가 어떠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답답한 사건들을 접한 후여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나다'는 어린 여성이 경험하는 다양한 사회적 차별과 억압을 드러낸다. 숏 컷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거나 흡연을 하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카드뉴스로 지적하거나, 각종 매체를 통해 그려지는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에 의문을 표하는 식이다. 청소년과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런 '나다'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1875명이나 된다. 올해 4월에 만든 페이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숫자다. 지난 7월 10일, 이메일을 통해 '나다' 페이지를 관리하고 있는 이강아름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페이지를 만든 사람조차 뜨거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 잘하고 있나 고민도 많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페이지 좋아요를 100개만 받아도 많이 받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그 정도 숫자의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목표였어요. 애초에 가벼운 마음으로, 취미로 하려고 시작한 페이지였습니다. 그렇다고 당황스럽지는 않고 굉장히 기뻐요. 관심종자라서.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아름씨가 '나다' 페이지를 만들게 된 계기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냥 너무 화나는 일"들이 많았다. 누군가의 행동이나 말, 미디어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럴 때마다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반응이 좋았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차별적인 페이지는 아주 많은데, 성 평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페이지도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해볼까. 페이지 이름은 뭐로 하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나는 어린 페미니스트다. 나는 어린년이다. 오 이거 좋네 콜.' 대충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아름씨는 화나는 일, 그중에서도 어린 여성의 경험을 말하고 싶었다. '나이주의 사회'에서 어린 여성은 여성 중에서도 '더 약자'일 때가 많았다. 아름씨 스스로도 어린 여성으로서 겪은 불편한 경험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예요. 겉보기에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적지 않은 이들이 그에게 손쉽게 반말을 합니다. 처음 만난 사이일지라도, 누군지도 모르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말이에요. 얼마 전 도서관에 갔는데 책을 대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그곳의 사서는 웃으며 말했어요. "처음 와 보니? 몇 살이야, 미성년자지?" 저는 그런 게 '친근한'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무례한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그렇지만 '나다' 페이지에서 다루는 내용이 '어린 여성'으로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씨에게 '어린 여성'이라는 한 가지 정체성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합헌으로 결정했을 때는 '나다' 페이지 프로필 사진을 무지개색으로 바꿨다.
"제 정체성 중에는 '여성'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나다'는 제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이에요. 또한 '나다' 페이지 활동은 순전히 저의 욕구, 저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렇기에 제가 말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직·간접적으로 겪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공감할 수 없어요. 공감이라는 말 자체에 회의적입니다.저는 제가 서 있는 위치에서 보이는 것들만 이야기합니다. 나는 여성이고, 어리고, 고졸이고, 성소수자이고, 아르바이트 노동자이고… 등등. 그 위치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 페이지를 만든 건 여성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였다기보다, 사실은 그냥 '내가 겪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여성 문제를 다루지도 않을 것이며(그럴 수도 없으며) 여성 문제'만' 다룰 생각도 없습니다."워낙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아름씨는 페이지 운영이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렇지만 페미니스트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과 오해에 맞서며 페미니즘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어려웠어요.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없었다면 여전히 어려워하고 있었을 것이고, '나다' 페이지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페미니스트로 '찍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많아요. 저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다행스럽게도 아직 '나다' 페이지에 대한 공격이나 악성 댓글은 없다. 가끔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싶기도 하다. 여성 혐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메갈리아' 페이지의 경우, 페이스북 측이 3번이나 이용제재를 가했다. 누군가 페이스북 페이지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먼지차별'이라고 생각해요. 차별이 주변에 널려 있는 먼지처럼 너무 흔해서, 웬만해서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거예요. 본인이 숨 쉴 때마다 그 먼지를 들이마시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그래 나는 어린년이다!"
'나다' 페이지에 공유되는 다양한 기사나 카드뉴스가 먼지처럼 일상적인 차별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면, 차별을 없애는 것은 행동이다. 아름씨는 지난 6월 28일, 여성의 자녀 양육을 당연시 여기는 '홀어미'의 단어 뜻에 대해 국립국어원에 문제제기했다. 국립국어원으로부터 뜻풀이를 수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일단 페이지에서는 우선적으로 나이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몇 차례 하고 싶어요. 페이지 이름이 '그래, 나는 어린년이다'니까. '어리다'는 포지션과 '년'이라는 포지션에 대해 골고루 다뤄 놓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지금은 너무 '년'이라는 부분에 치우쳐 있어요. '어린'과 '년'의 비율이 서로 어느 정도 맞춰졌다고 여겨지면 그때부터는 이것저것 다룰 생각입니다. 성소수자 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 얘기도 하고. 어린년의 입장에서 말이에요.사실 성소수자 얘기는 '당신의 주위사람'이라고 따로 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할 계획이었는데, 아직 고민 중이에요. 그 외에 '자나 깨나 말조심'이라고 트위터의 탈곡기처럼 일상 속 문제적 발언들을 지적하는 프로젝트를 해볼까 하고 있는데 이건 아직 구상만 있어요. 페이지 외적으로는 소설을 써보려고 하고 있습니다.'청춘'이 아닌 '청소년'이 등장하는 청소년 문학, 데이트폭력·아내폭력을 다룬 문학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에요. 우선은 이런저런 공모전에 찔러보고 안 되더라도 PDF 파일로 공개할 생각입니다. 개인적인 에세이를 담은 독립잡지를 내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아름씨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다' 페이지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아주 간단했다.
"페이지를 통해 전달하고픈 메시지는 페이지의 제목이 말하고 있어요. '그래, 나는 어린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