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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언제나 현재를 풍요롭게 한다.

좋았든 그렇지 않았든 과거의 시간들은 눈물겹게 반가울 따름이고, 오늘의 나를 돌아보며 내일을 새롭게 해준다. 잊고 있던 기억들을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만났을 때는 더욱 그렇다.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 사는 이아무개씨는 얼마 전 안경을 맞추러 갔다가 까맣게 잊었던 30년 전 추억을 마주하곤 할 말을 잃었다. 해당 안경원에 처음 방문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20대 초반이었던 시절의 시력이 컴퓨터 기록에 남아있었던 것.

"내가 처음 안경을 맞췄던 곳이라는 기억이 그제야 났어요. 너무 신기해서 그때보다 시력이 얼마나 나빠진 건지 확인하다 보니 세월이 느껴지데요. 스무 살 청년이던 제게 노안이 왔거든요."

이씨는 새삼 오래된 장소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며, '그때 그 간판 그대로'의 주인공으로 3대 안경사의 집 '예산안경원'을 추천했다.

장항선 일대 유일한 안경점

 1960년대 예산안경원 전경. 2대 고 연기영 사장이 앳된 소년의 모습으로 안경원 문 밖을 보고 있다(왼쪽). 중절모를 쓴 어르신이 나무틀로 만들어진 진열장에 전시된 안경테를 보고 있다(위). 1981년 새 건물을 올린 뒤의 모습(아래).
 1960년대 예산안경원 전경. 2대 고 연기영 사장이 앳된 소년의 모습으로 안경원 문 밖을 보고 있다(왼쪽). 중절모를 쓴 어르신이 나무틀로 만들어진 진열장에 전시된 안경테를 보고 있다(위). 1981년 새 건물을 올린 뒤의 모습(아래).
ⓒ 예산안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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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읍사무소 앞 예산안경원. 1993년 보석상을 정리한 뒤, 시대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도입한 프랜차이즈 브랜드 ‘씨채널’이 간판에 함께 쓰이기 시작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산읍사무소 앞 예산안경원. 1993년 보석상을 정리한 뒤, 시대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도입한 프랜차이즈 브랜드 ‘씨채널’이 간판에 함께 쓰이기 시작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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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손님들 많아요. 40년 넘은 단골들도 있는 걸요. 뭘"

조창순(62)씨가 시아버지로부터 남편, 딸로 이어오는 3대 안경사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1대 안경사인 고(故) 연금선 사장은 6·25전쟁 전까지 보부상처럼 전국을 돌며 안경 일을 하다가 서울 을지로에서 보석상 겸 안경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6·25때 피난 내려오시다가 해동안과가 있는 것을 보고 예산에 정착하셨다고 해요. 당시에는 장항선 일대에 안과도 하나, 안경점도 하나였대요. 태안, 서산, 온양 할 거 없이 다들 우리 집에서 안경을 맞췄죠. 두세 시간씩 기다리곤 했대요."

지금처럼 안경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손님이 인산인해였다는 얘기가 아니라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다 보니 오래 걸려서 더 그랬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그때는 안경테 모양대로 종이본을 뜬 뒤, 유리에 대고 커터기로 자르고 나서 갈아내는 작업을 죄다 사람 손으로 했어요. 우리 집 마당에 각종 기계가 있는 공장이 있었죠. 안경에 색깔 입히는 것도 직접 다 했으니까."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일을 보고 자란 2대 안경사 고(故) 연기영 사장이 안경 일을 시작한 것은 예산농고 2학년 때였다고 한다. 부친의 갑작스런 병환 때문에 일찍 가업을 물려받은 그는 1981년 그 자리에 2층짜리 새 건물을 올리고 번성기를 구가했다.

안경원과 겸하던 보석상을 정리한 것은 1993년이다.

"그때는 읍면마다 예식장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제가 예식장들을 상대로 시장조사를 해보니 다들 패물을 도시에서 해오기 시작하더라구요. 장신구도, 시계도 유행이 있기 때문에 회전이 안 되면 재고가 쌓여서 손해가 나거든요. 그래서 제가 남편에게 보석상을 정리하자고 했어요."

마실 와있던 이웃주민 정영자씨가 옆에서 거든다.

"여기 금은방 정리할 때 세일했잖어. 그때는 텅스텐줄 시계가 굉장히 비쌌는데 내가 맘먹고 샀지. 그 시계 아직도 잘 가."

가업 잇는 자부심 커

 1대 고 연금선 사장의 사진과 당시 제작한 돌로 만든 안경, 우각(소뿔)안경테, 맥아더 장군이 써서 유명해진 일명 라이방 선글라스, 보석상을 운영하며 사용했던 옛날 저울 등이 3대 안경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1대 고 연금선 사장의 사진과 당시 제작한 돌로 만든 안경, 우각(소뿔)안경테, 맥아더 장군이 써서 유명해진 일명 라이방 선글라스, 보석상을 운영하며 사용했던 옛날 저울 등이 3대 안경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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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대 고 연기영 사장의 생전 모습(왼쪽). 3대 연분홍 사장이 손님에게 안경을 씌워주고 있다(오른쪽).
 2대 고 연기영 사장의 생전 모습(왼쪽). 3대 연분홍 사장이 손님에게 안경을 씌워주고 있다(오른쪽).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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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안경사는 이름도 어여쁜 연분홍(34)씨다.

"처음부터 가업을 잇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구요, 부모님이 권하셔서 대학에서 전공을 택했어요. 제가 이 일을 시작한 지 12년이 됐는데요, 일을 오래 하다보니 그리고, 아빠 돌아가시고 나니 책임감이 커졌습니다."

고 연기영 사장이 딸과 함께 안경원을 운영하는 걸 얼마나 기다리고 좋아했는지, 2003년 분홍씨가 안경사 자격증을 따자마자 매장 인테리어를 새로 하고, 대대적인 기념 이벤트를 열었다. '국가공인안경사 3대 탄생기념 안경사 합격 기쁨 감사 세일'이라는 제목 아래 '안경사 연기영, 연분홍' 부녀 이름을 나란히 내건 당시 홍보 전단지는 안경원 역사 자료로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다.

분홍씨는 학교를 졸업한 뒤 2년 동안 서울에 있는 안경원에 취직해 경험을 쌓고, 고객 응대 훈련과 시장의 흐름을 파악한 뒤 예산으로 돌아왔다.

'예산안경원'이 60년 넘는 세월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대를 이어오며 무조건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시류에 뒤처지지 않고, 변화를 수용하려는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4·5대로 이어졌으면

출산을 하면서 8개월여 안경원을 떠났던 분홍씨는 가업을 위해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다. 분홍씨는 천안으로 통근을 하고 있는 남편이 고맙기만 하다.

"학교에서는 이론 교육을, 실무 일은 아빠가 가장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아빠가 가장 강조하신 것 중에 하나가 '연세 드신 분들은 도수를 높게 해드리면 안 된다. 정석대로 교정 시력을 맞추면 어지러우시니 낮춰서 안정적으로 해드려야 한다'는 거예요. 어르신들이 많은 농촌에서 실무를 많이 하신 분만이 알 수 있는 노하우 같은 거죠."

10년 동안 아버지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며 부녀이자, 선후배였던 딸은 지난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 이야기에 자꾸 눈시울을 붉힌다.

얼마 전 제대를 한 분홍씨의 동생 형모(24)씨도 안경광학을 전공하고 있다.

"지금은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꼬박 12시간 동안 저 혼자 하고 있지만 동생이 합류하면 힘도 덜 들 테고, 또 더 젊은 감각으로 운영하면 좋지 않겠어요?"

분홍씨는 아버지와 함께 하던 일을 동생과 함께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바람도 덧붙인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동생이 같은 일을 하는 아내를 만나고, 4대 5대까지 계속 '예산안경원'이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늘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의 과거를 현재로 이어주고, 미래를 기약해주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예산안경원#3대 안경사#가업#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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