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 갑작스러운 갑상샘암 선고와 투병 생활로 망가진 몸. 그로 인해 바뀌어 버린 삶의 가치와 행복의 조건. "갑상샘암은 암도 아니잖아"라며, 가족조차도 공감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죽음의 문턱에서 깨달았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란 것을. 꿈이 있다면 당장 시작하라! '내일'이면 늦을지도 모른다. - 기자 말
갑상샘암 치료를 위해 직장에 병가를 제출하고 3개월 남짓한 시간을 쉬었다. 쉬는 동안 틈틈이 내가 좋아하는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나의 투병일기로 필요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블로그'도 시작했다. 그 블로그를 통해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의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또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멀리하고 지내던 '책'을 다시 손에 잡으면서 우물 밖의 세상은 드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파본 사람이면 누구나 비슷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자고. 나 역시 아파보고 나서야 그 말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건강'이 최고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건강을 제일 등한시 하고 살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도 아파보지 않았을 때는 건강이 계속 내 곁에 있을 거라는 착각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시간이 한없이 있을 줄로만 알았다.
아파지고 나서 돌아보니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게 10년이 훨씬 넘었고 언제나 내 곁에 있어 항상 '나중에' 라고 이야기하던 어머니의 머리에는 새하얗게 눈이 내려 있었다. 어린 시절 '끼'도 많고 활발하던 내 성격은 15년의 직장생활에 익숙해져 수동적인 인간이 되어 버렸다. 사람 사귀는 것이 좋아 특정 부류를 가리지 않고 사귀었던 내 친구들은 내가 '일'에 목숨 거는 시간 동안 어디론가 떠나가 버린 후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다니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착각'했던 내 삶은 아주 외롭고 불행한 모습이었다. 진정으로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결국 나의 조건과 상황을 넘어서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바로 내 가족들인데 내 상황이 바뀌면 결국 떠나갈 사람들에게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으며 살았다. 이 모든 걸 깨달은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행복을 찾기로 결심했다.
복직 1년 만에 퇴사...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나의 깨달음은 직장에 복귀한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업무가 끝나도 눈치 보느라 퇴근 못 하고 앉아 있던 내가 눈치 보지 않고 업무가 끝나면 곧장 퇴근하게 되었다. 어쩌다 가끔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동료들과 술판 벌이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동료보다 내 가족을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료들에게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업무를 일찍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있는 삶'을 즐겼다. 어머니와 한집에 살아도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나 들어오는 탓에 온종일 대화 한마디 없던 삶에서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삶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은 새로운 나의 삶에 투자했다. 책을 읽고 하고 싶었던 공부를 했다. 그렇게 조금씩 홀로서기를 준비해 나갔다.
2014년 설날 연휴가 지나서 회사에 복직했다. 그리고 변화된 직장생활을 한 지 1년이 지난 2015년 봄,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직장을 그만뒀다. 새로운 생활을 한 지난 1년간 변화된 나의 모습에 멀어진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진정한 '내 사람'을 찾게 된 거다. 나에게는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나의 결정을 묵묵히 응원하는 '내 사람들', 행복하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은 날로부터 그만두는 마지막 날까지 약 2달간의 시간 동안 많은 혼란이 있었다. 결국은 매달 통장에 꽂히는 '월급'의 달콤함 때문이었다. 당장 회사를 나가면 월급 없이 다른 무언가로 먹고살아야 하는데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부족했던 거다. 하지만 이내 고민에 고민을 반복한 결론은 '간절함'이었다. 월급이 없어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더 간절해질 거라는 결론이다. 그 결론을 내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올해 내 나이는 서른넷이다. 일찍 결혼한 친구들은 벌써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닌다. 장가가서 애 낳고 돈 벌어서 집사고 해야 할 텐데 나는 덜컥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언제 다시 내 월급만큼의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평생 그만큼의 돈을 벌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런 나의 결심에도 묵묵히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 열심히 발로 뛰어야 한다.
제대로 '돈 되는' 일은 아직 찾지 못했다. 지금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일의 수입은 좋아져 봐야 기존 내 월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내 방안 책상 앞에 붙어 있는 화이트보드 일정표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날들이 많아질수록 불안하고 초조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나는 '하고 싶은'일이 너무 많고 그 일을 어떻게 구체화 해 나갈지 상상하는 일이 너무 즐겁다.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은 갑상샘암을 겪으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즐겁기도 두렵기도 한 나의 두번째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