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 "참여정부에서도 그런 도청이 없다고 지난 5일 날 문재인 수석께서 발표하셨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 어떻게 아느냐."
노무현 대통령 :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참여정부 들어서는 도청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까요?"
- 2005년 8월 8일, 안기부 불법 도청 관련 노무현 대통령 기자간담회 질의응답 중
권력기관의 역사는 늘 반복됐다. '국가정보원'이 대표적 사례다. 10년 전으로 가보면 곤혹스러운 표정의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 자리에 나섰다. 회견장에 서기 전, 노 대통령은 일주일 동안 하계휴가를 다녀왔다. 그리고 그는 업무복귀 첫날부터 기자들의 거센 공격에 직면했다.
2005년 7월 MBC 이상호 기자가 '안기부 X파일' 테이프를 입수해 공개했다. 테이프 속 내용은 정-관-재계의 은밀한 커넥션을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등장인물은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었다. 그들은 1997년 대선 '정치권 동향 및 대권 후보들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테이프 속 내용은 자극적인 것들이었다.
누가 녹음했을까? 1997년 YS정부의 안기부 도청팀(미림팀)에서 한 작업이었다. 이것이 8년이 지난 2005년 참여정부 3년 차에 폭로됐다. 노 대통령은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했다. 말 그대로였다. 문제는 DJ정부 때에도 안기부 도청팀이 운영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 사실도 공개했다.
YS-DJ로 이어지는 민주화 정부에서도 안기부에 의한 공작이 자행됐다니, <조선일보>는 20일가량 이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올렸다. "안기부 불법도청 파문", "일파만파 '도청 스캔들'", "누군가 당신을 엿듣고 있다... 도감청 공포", "도청파문" 등 당시 <조선>은 총력을 기울여서 특집기사를 양산했다. 10년 후인 2015년 7월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의혹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언론으로 해석될 정도다.
'DJ정부에서도 도청했다'는 국정원 자체 조사결과 발표가 있은 직후, DJ측은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시 최경환 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은 최근 심기가 아주 좋지 않다"고 밝힐 정도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터져 나온 진실을 덮을 수 없었다"고 말한 이틀 후, DJ는 갑작스레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다. 시작은 YS정부의 도청이었는데, 진행과정에서 전 정권과 현 정권의 대립구도가 조성된 것이다.
다시 2005년 8월 8일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기자회견장. 이날 노 대통령이 하고 싶었던 말과 기자들이 듣고 싶었던 말은 동일했다.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YS정부에 이어) DJ정부에서도 국정원이 도청한 사실이 있다고 한 공개의 정치적 배경 여부'였고, 다른 하나는 '참여정부에서는 없었나'였다. 노 대통령은 'DJ를 끌어들인 정치적 배경'에 대해 참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노 대통령은 "이 사건은 그냥 터져 나온 사건이지, 우리 정부가 파헤친 사건이 아닙니다, 특히 대통령이 파헤친 사건은 더더욱 아닙니다, 터져 나온 진실에 직면했을 뿐입니다"라며 거듭해서 정치적 의도가 없음을 강조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제기된 의혹을 대하는 두 가지 원칙을 밝혔다. 그는 "진실에 맞게 정면으로 상황을 돌파해 가는 것, 그 다음에 내 자신을 버리는 것" 이렇게 두 가지를 언급하며 "나는 그 두 개 이상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고 또 써본 일도 없습니다"고 주장했다. 진실대로 하는 것, 그리고 그 외에는 자신을 던지는 것. 두 가지 원칙을 언급한 노 대통령은 기자들을 향해 "그 외 내가 썼던 다른 술수가 있으면 여러분 얘기해 보십시오"라고 물었다.
안기부 X파일이 터지자 노 대통령은 수석 비서관회의 등을 통해서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를 사실대로 철저히 규명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혔다. 이후 앞서 본 기자회견 등을 통해서 국민과 소통했다. 진상규명을 지시했고, 국정원장이 직접 나서서 조사결과를 공개한 뒤 국민에게 사과하게 했다.
이듬해인 2006년 3월 23일 노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를 했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국정원 도청 사건을 의식한 듯 "정부나 권력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지위는 많이 향상된 건 사실 아닙니까"라며 "어떻습니까, 국정원 이제 겁 안 나지요?"라고 물었다. 이어서 "국정원은 대통령이 민주적이면 민주적인 기관이 되고, 그 전까지는 못 그랬습니다만, 지금 와 있는 수준은 대통령이 나쁜 일 시키지 않으면 혼자서 나쁜 일 하지 않을 수준까지는 와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2005년 <조선> vs. 2015년 <조선>의 이상한 보도
통제받지 않는 권력기관의 일탈은 늘 있어왔다. 앞서 보았듯이 '미림팀'이란 이름으로 YS때도 국정원 도청이 있었고 DJ 때에도 지속됐다. 노 대통령 때에는 밝혀진 내용이 없다. MB 때에는 총리실 산하기관에서 민간인 사찰이 확인돼 담당자들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뿐 아니라 이 당시 국정원에서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해킹 프로그램'을 도입, 운영한 의혹이 존재한다. 박근혜 정부 역시 '해킹 프로그램' 운영 의혹을 야당으로부터 제기받고 있다.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과 2015년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의혹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권력기관의 일탈행위인 것이다. 그 진행과정도 현재까지는 유사하다. 2005년 당시에도 의혹의 중심에 있던 '미림팀장' 공씨가 진술서를 작성한 직후 자신의 집에서 자해(自害)해 긴급히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2015년 유서를 작성하고 자살한 국정원 임아무개 과장의 전개과정과 유사한 흐름이다.
대단히 유사한 사건이지만 2005년 경우와 2015년이 다른 부분도 존재한다. 대통령의 대응이 다르다. 노 대통령의 경우는 앞서 자세히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는 설명할 내용이 딱히 없다.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관련해 국민에게 전달된 말과 행동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거 이상의 시급한 국정 현안이 딱히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침묵은 이해하기 어렵다.
또 다른 사항으로는 언론의 태도, 더 정확히 말하면 <조선일보>의 보도태도가 확연히 다르다. 2005년에는 지면할애나 보도태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7월 21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이래 8월 10일까지 3주 연속 1면 머리기사로 '안기부 도청' 사건을 보도했다.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라도 되는 것처럼 정부를 몰아세웠다. <대통령 빼놓고 다 한' 盜聽(도청)을 누가 파헤칠 것인가>, <국정원은 정직하고 검찰은 毅然(의연)해야> 등 거의 매일 사설을 통해서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이제 10년 후 또 다른 의혹사건을 대하는 이 신문을 들여다보자. 지난 14일 국정원장이 '해킹 프로그램' 관련해 국회 정보위에 출석했다. <조선>은 15일자 6면 기사로 보도했다. 17일에 드디어 1면 머리기사로 해당 뉴스를 보도했다. 제목은 "국정원 해킹대상 18명, 모두 해외 從北(종북)인사 與(여) 핵심관계자 밝혀"였다. 18일에는 8면 기사로 여야 쟁점 중심의 보도를 했다. 20일에는 '해킹'이 아닌 '국정원 임모 과장 자살'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22일부터는 논조가 완전히 달라진다. 북한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22일 1면 머리가사 제목이 "北(북), '伊(이탈리아) 해킹팀' 기술로 사이버 공격 : 지난 10일 탈북자 모임 등 국내 北(북) 관련 사이트 5곳 해킹"이었다. 24일에도 1면 머리기사로 "한국 겨눈 해킹공격 하루 100만건 : 국정원 해킹攻防(공방) 속... 세계는 지금도 사이버 전쟁 중"을 보도했다. 25일에는 5면 기사를 통해 "'사이버戰(전) 전사' 천재 해커들, 국정원 가기 꺼려"를 보도했다.
용기인가, 만용인가. 지금 이 시국에 '천재 해커들, 국정원 가기 꺼려'를 여봐란듯이 보도하는 이 신문의 보도태도는 놀라울 정도다. 10년 전, 비슷한 유형의 사건인 '안기부 X파일' 보도 당시의 입에 거품을 물었던 보도태도와 비교하면 언론분야 연구논문 소재로도 충분해 보인다. 박 대통령이 침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신문의 외면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대통령 박근혜 혹은 정치인 박근혜 "정부나 국정원이 무슨 말을 한들 국민이 믿겠느냐. 도청이 없어졌다고 주장하려면 국민이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국정원이)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 2005년 8월 8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야당 대표일 때와 대통령은 다르다. 발언에 대한 책임감도 그렇고, 정치적 무게도 다르다. 그러나 비슷한 사안에 대해 10년 전에는 '스스로 증명하라'고 입증책임을 요구한 현재 대통령이 된 그 정치인이 자신의 정부에서 일고 있는 의혹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도대체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한국일보>는 25일자 사설 "대통령 지시해야 국정원 의혹 규명 가능할 것"을 통해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안기부 불법도청 사건의 철저한 수사 및 국정원 협조를 지시함으로써 실체를 규명했던 전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박 대통령이 침묵이 아닌 적극적 대응으로 오해와 억측을 해소할 것을 요구했다.
<리얼미터> 24일 여론조사 방식 |
전국 19세 이상 성인 900명 대상. 휴대전화(50%)와 유선전화(50%) 임의전화걸기(RDD) 자동응답 방식으로 진행. 행정자치부 주민등록 인구통계 기준 성, 연령, 권역별 인구비례에 따른 가중치 부여를 통해 통계 보정. 응답률은 5.0%,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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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의혹 해소에 나설 것으로 예측되지는 않는다. <리얼미터>가 24일 '국정원 해킹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 사찰'을 했다는 야당의 주장과 국가안보를 내세우며 국정원을 옹호하는 새누리당 주장에 대한 여론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조사결과 '여당 주장 공감(38%)'와 '야당 주장 공감(38.7%)'로 팽팽히 맞섰다. 새누리당 지지층에서는 80.9%가 새누리당 주장에 공감한다고 응답했다.
새누리당 지지층이 '국가안보'가 더욱 중요하다고 응답한 상황에서 박 대통령의 입장선회는 요원해 보인다. 2005년 야당 대표 박근혜가 주장한 "국민이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국정원이)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주장은 박근혜의 신념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자신의 지지층이 지지한 내용이었다. 10년 후 내용은 같지만 다른 태도를 보이는 까닭은 자신의 지지층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면 이해가 쉽다.
그러나 대통령이 '역사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임을 고려할 때, 아래 노 대통령의 신념이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의혹'을 대하는 박 대통령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불법한 일은 반드시 터져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갖고 있는 신념입니다. 제 신앙은 불법은 묻어 놓으면 묻힌 깊이만큼 폭발력이 더 크게 터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 2005년 8월 노 대통령 기자회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