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1한 남자아이가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분향소에 있는 영정사진을 가리키며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이의 손을 잡은 할머니는 "배에서 죽은 애들"이라고 답했다. 단 한 마디로 304명의 죽음이 설명됐다. 둘은 분향소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장면 2 분향소 앞을 한참 서성이던 중학생 두 명도 있었다. 먼저 국화꽃을 건네자 분향소에 들어온 그 둘은 영정사진 앞에서 다시 머뭇거렸다. 추모 절차를 간단하게 설명하자 "향을 피우는 방법을 모른다"고 했다. 추모 절차조차도 몰랐지만, 그들은 한동안 조용히 언니·오빠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관심과 무관심, 외면과 애도가 뒤엉키는 곳, 서울 광화문에 차려진 세월호 농성장 분향소다. 지난 28일, 기자는 '국민상주단'이 되어 광화문 분향소를 지켰다. 국민상주단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시간대별로 분향소에 상주하며 시민들의 추모 절차를 돕고 있다. 국민상주단이 하는 일은 간단하다. 국화꽃을 건네며 향을 피우는 방법을 설명하고, 분향소 방문객들이 묵념할 때 같이 고개를 숙인다. 고요히 분향소를 지키는 역할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국민상주단으로 분향소에 머물렀다. 이후, 약 세 시간 동안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하루 동안 농성장을 '찾는 사람들'과,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을 만났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이 죽었는데,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요?"
오전 10시, 첫 헌화와 분향은 내가 했다. 분향소에서는 꽂아 놓은 향초가 다 탈 때마다 새로운 향초를 꽂아야 한다. 분향소를 방문하는 사람이 없어 혼자 향초를 꽂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섰지만, 기우였다. 분향소를 열고 20분 가량 지난 뒤, 중년 여성 두 명이 조용히 분향하고 갔다.
분향소에는 외국인들도 많이 방문했다. 관광하러 광화문에 왔다가 분향소에서 발걸음을 멈춘 것이다. 한 외국인 부부는 무엇을 위해 분향소가 세워졌는지 물었다. 세월호 참사를 간단히 설명하니, "작년 일이 아니냐"며 되물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는 것은 알지만, 여전히 세월호 참사가 해결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유학하다 잠시 한국에 귀국했다는 남향조(28)씨도 분향소를 찾았다. 남씨는 "외국인 유학생들도 세월호 참사를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세월호 참사가 해결되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외국 가서 한국 국민이 다쳤으면, 그것도 국가가 책임지잖아요. 대한민국 국민이니까요. 하물며 대한민국에서 국민이 죽었는데,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요?"방학을 맞아 분향소를 찾은 학생들도 많았다. 세월호 사건 희생자인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비슷한 또래도 있었다. 허혜림(18)씨는 친구들과 동아리 활동을 하러 광화문을 들렀다가 분향소를 방문했다. 한씨는 세월호 1주기에도 농성장을 방문했다고 했다.
허씨는 "아직도 많은 학생이 세월호 참사에 관해 이야기한다"며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허씨와 친구들은 분향소에 걸린 영정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분향소를 떠났다.
분향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조용히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짧은 묵념의 시간 동안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자녀의 이름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의 이름과 똑같아 놀라는 이도 있었다. 방문객들은 모두 쉽게 분향소에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분향소를 지키는 세 시간 동안, 약 20개의 향초가 새로 꽂혔다. 평일 오전이라 분향소에 많은 사람이 오가지 않았지만, 향초가 꺼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키는 사람들 "아들 보내고, 뜨개질을 배웠습니다"
자원봉사자 최창덕(52)씨는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다. 서명 부스를 준비하고, 분향소에 들러 비뚤게 걸려있는 영정 사진을 하나하나 매만졌다. 그는 지난해부터 농성장에서 지냈다. 영석 아빠(단원고 2학년 7반) 오병환(44)씨와 같은 반 민우 아빠 이종철(48)씨와 이곳에서 겨울을 났다. 그는 "부모이기 때문에 농성장에 오게 됐다"며, 농성장을 '집'이라고 표현했다.
"원래 집에는 몇 달에 한 번 들어갈까 말까 해요. 그럼 딸들이, 자기들은 딸 아니냐고 그렇게 말하죠. 그럼 그렇게 답해요. '너희는 지금 살아있지 않느냐'고. 자주는 못 보지만 아빠도 볼 수 있고, 친구들도 볼 수 있고…."안산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목요기도회를 하다가 실종자 가족과 연이 닿았다는 신학대생 전이루(27)씨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농성장에서 피켓을 들고 있었다. 더운 날씨 탓에 피켓 시위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흘렀다. 이날 서울의 최고 기온은 31도였다.
"덥지만 힘들지 않다"고 말하던 전씨는 "미수습자 가족분들의 목소리가 많이 소외됐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이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와 친구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는 "올해 안에 인양하라", "세월호에 아직 가족이 있습니다"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한 달 전부터는 농성장에 상주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단원고 2학년 2반 다윤 아빠 허흥환(52)씨다. 허씨는 오전에 청와대 분수 광장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점심 먹은 뒤 농성장에 온다고 했다. 허씨가 농성장으로 가면, 다윤 엄마 박은미(45)씨는 홍대로 이동해 피켓시위를 이어간다.
"힘들죠. 더우면 더워서 힘들고, 추우면 추워서 힘들고. 그런데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허씨가 농성장에서 피켓을 들고 있으면, "돈을 얼마 받고 피켓을 드는 거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아직 다윤이를 포함한 실종자 9명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다. 허씨는 그들에게 세월호 참사에 대해 설명한다. 설명해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수긍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알리기 위해 이곳에 있는 거죠." 농성장 가운데, 야외 테이블에는 영석 아빠 오병환씨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 노란 실 뭉치와 함께다. 그는 "뜨개질을 연습하는 중이다, 스웨터를 만들 생각"이라고 했다.
"뜨개질 같은 걸 여기서 다 배웠어요. 여기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잡생각이 들어요. 이런 거에 집중하고 있으면 잡생각을 덜 하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 뭐. 아들도 보고 싶고... 혼자 방에 들어가서 울기도 하고."손에 차고 있던 세월호 문양의 실 팔찌도 직접 만든 것이라고 했다.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화가 난다고 했다. 지난 1년간 농성장을 지켜온 오씨는 앞으로의 일을 쉽게 낙관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들어갈 시간이, 이제껏 흘러온 시간만큼 길 것 같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의 천막은 지난해 7월 14일 세워졌다. 올해는 농성장 1주년을 맞아 비닐 천막을 걷어내고, 합판으로 벽을 만들었다. 더 튼튼해진 농성장에서 긴 세월을 버텨내기 위함이다.
덧붙이는 글 | 김예지 기자는 오마이뉴스 22기 대학생 인턴기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