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공무원들이 장관을 어떻게 뺑뺑이 돌리는지 아세요? 장관이 가서 기분 좋을 만한 행사장에 계속 보내요. 그럼 집무실에 있긴커녕 결재시간도 짧아지니, 공무원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서류를 작성해서 결재를 받는다고요. (…) 요즘 언론에서 뺑뺑이 도는 장관이 누군지 잘 보세요. 심지어는 대통령도 돌립니다. 안 그럴 것 같아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57)의 거침 없는 말에 청중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장관 재임 시절 체력관리 방법을 묻는 말에 그는 "꼭 필요하지 않은 일정은 줄였다, 특히 제가 욕을 먹으면서 했던 일이 의사·약사 등 관련 협회 정기총회에 불참했던 것"이라며 "장관이 행사 다니기 시작하면 그 부처는 망하는 거다"라고 강조했다.
정계 은퇴 후 전업 작가로 변신한 유 전 장관은 1일 오랜만에 서울 여의도 국회를 찾았다. 청년 50여 명을 상대로 <장관과 대통령, 내각의 소통과 결정 방식>이란 제목의 특강을 위해서다. "전 장관으로서 오라는 요청은 다 거절한다"는 그가 이날 예외적으로 강연에 나선 것은 "재임 중 알게 된 정보를 공적으로 활용하는 자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매니페스토 청년 협동조합(장경태 대표)' 주최로 1시간 반가량 진행된 강연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소탈한 옷차림의 유 전 장관은 장관 재임 시절 자신의 경험과 '장관 매뉴얼'을 중심으로 ▲장관의 위상과 역할 ▲업무 수행에 필수적인 소통과 의사결정 ▲퇴임 후 활동 등을 설명했다.
유 전 장관이 '대외주의'이자 '장관 매뉴얼'이라며 요약해 소개한 문건은 <민간인 출신 고위 공직자의 성공적 공직 적응을 위한 가이드>(중앙인사위, 2004)다. 역대 장관 인터뷰를 근거로 성공·실패 사례 등과 장관이 해야 할 일이 담겨있다. 그는 "일전에 총리로 지명된 한 언론인은 출근 때마다 기자들을 만났는데 그건 여기 절대 하지 말라고 나와 있다"며 "박근혜 정부가 향후 내정자들에게 이걸 꼭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승민, '청와대 얼라'는 청와대 무시 발언"
유 전 장관은 특히 장관 업무 중 "청와대와 대통령, 참모들과 어떻게 소통하느냐가 성공적 정무수행의 5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이 모든 일을 보고받지는 못하는 만큼, 주요 정보를 요약·전달하는 비서진에 대한 존중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패한 소통 사례로는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꼽혔다. 그는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박 대통령 참모를 '청와대 얼라들(어린이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로 지칭해 논란을 빚었다.
"'장관이 대통령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최근 박 대통령이 '개인행보하지 마라'는 게 그런 얘기예요. 밀려난 여당 원내대표는 '청와대 얼라'를 통해 청와대를 굉장히 무시하고 자극했습니다, 일반 국회의원은 '청와대 얼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장관은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됩니다. 아무래도 유승민 의원은 이번 정부에서 장관 하긴 어렵지 않을까…(웃음)."그는 성공하는 장관의 조건으로 '갈등조정능력'과 '조직 장악력'을 우선시했다. 매우 중요한 법안이라도, 관련 이익단체의 반발이나 유관 부처와의 갈등, 또는 국회의 비협조로 성사되지 않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설명이 따라왔다.
"장관은 이해관계가 있는 부처들의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매뉴얼에도 장관 역할 중 가장 첫 번째로 '갈등조정'이 나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걸 잘 못 하면 조직 장악력이 떨어져 존중받기 어렵죠. 그러기 위해선 인사를 공정하게 하고, 사익보다 공익을 중시, 또 원칙과 합의사항을 그대로 지키는 게 필요합니다."이어진 질의·응답시간, 유 전 장관은 최근 메르스 사태와 관련 "평택성모병원을 바로 폐쇄했어야 한다"며 정부 대처에 아쉬움을 표했다. 질문자의 질문은 '이번에 박원순 시장이 능동적으로 대처한 것 같다, 장관은 지방정부와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하나'였다. 박 시장은 메르스 첫 확진판정 후 2주째인 6월 4일 긴급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그건 상황의 위험성을 어떻게 인지했느냐의 차이죠. (…) 이번에 평택성모병원은 (확진 환자 발생 후) 바로 격리하고, 병원을 폐쇄했어야 해요. 삼성서울병원 응급실도 바로 폐쇄했어야 하는데, 그럼 망하거나 적어도 손실이 엄청났겠죠. 그래도 상황이 심각할 땐 복지부 장관이 '책임진다'고 하고 밀어붙이면 되는 거예요. 장관이 바로 결정하기 어려우면, 대통령이 긴급명령이라도 하든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작년 5~6월 매출자료 있잖아요. 그에 맞춰 손해액 주기로 했으면 아마 몇백억 원에서 끝났을 거예요. 근데 그걸 안 했기 때문에 2/4분기 소비가 급감해서 민간기업과 가계에 어마어마한 사회적 손실이 있었죠. 정부는 부처 장부가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민간에서 더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으면 그걸 해야죠.(…) 이번 메르스 사태는 실무진들보다는 리더들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유 전 장관은 현 정부의 위기 커뮤니케이션 대응력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보건복지부에, 복지부는 질병관리본부에 책임을 맡기고, 자체 통제가 안 되다 보니 관련 학회장이 나와 브리핑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설명이다. 그는 강연을 마치면서, "정부가 이번 일을 계기로, 메르스 사태뿐 아니라 정부의 위기 대응 방법을 평가하고 고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