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이었다. 주말에 장성호 호반길을 함께 걸을 사람을 찾는 글을 봤다. 평소 알고 지내던 공원석 장성군청 산림편백과장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린 글이었다. 거리 8㎞, 소요시간 2시간 30분이라는 친절한 안내도 덧붙였다. 참가 댓글 몇 개가 달려 있었다. 참여하고 싶었다.
넉넉한 풍경 마주하고 걷는 아름다운 호반길주말 그 시간에 맞춰 장성호 관리사무소로 나갔다. 장성군청 산림편백과 직원들을 포함해 1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약속하지 않고 나갔는데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세 사람을 빼고는 모두 처음 대하는 얼굴이었다. 그들과 함께 장성호 호반길 걷기에 나섰다.
장성호 호반길은 '영산강유역 농업개발 기념탑'이 우뚝 서 있는 장성호 관리사무소에서부터 시작됐다. 제방에서 내려다보는 장성읍내와 들녘 풍경이 넉넉하다. 그 가운데로 순천-대전 간 호남고속국도가 뻗어있다.
호반길을 제공해 주는 장성호는 농업용 댐이다. 1976년 영산강 유역의 홍수 피해를 막고 농업용수를 원활하게 공급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백암산과 입암산의 깊은 계곡을 따라 흘러온 물을 담고 있다.
취수탑 옆으로 난 호반의 임도를 따라가며 오른편에는 장성호를 끼고 걷는다. 왼편은 감투봉이 보듬고 있는 잡목 우거진 숲이다. 길은 자동차가 지나다닐 만큼 넓다. 차량통행은 통제돼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숲길이 고즈넉하다. 온전히 우리만의 길이다. 호반의 낭만이 절로 묻어난다.
"내 님은 누구일까어디 계실까무엇을 하는 님일까만나보고 싶네…."오래된 노래 '호반의 벤치'가 입안에서 맴돈다. 동행한 이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까. 그들의 발걸음도 가벼워 보인다.
1㎞쯤 걸었을까. 임도에서 팔각정자를 만난다. 멋들어진 정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반갑다. 여기서부터 임도를 벗어나 숲길로 접어든다. 호숫가를 따라가는 오붓한 숲길이다. 길은 한 줄로 줄지어서 걸어야 할 만큼 다소곳하다. 오르막도 다소 있지만 비교적 평탄하다.
숲길 군데군데에 쉼터도 만들어져 있다. 모두 호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힘든 길은 아니지만, 잠깐잠깐 멈춰서 풍광을 내려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정적을 깨며 호수를 가르는 보트의 자태도 멋스럽다. 임도로 올라가서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연결돼 있다. 저마다의 형편에 따라 코스를 조절할 수도 있다.
길은 호숫가를 따라 계속 이어진다. 댐이 만들어지기 전에 마을주민들이 오갔던 길을 장성군이 단장했다. 길이 끊긴 곳은 나무 데크로 이었다. 경사가 급한 곳에는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공원석 과장은 함께 걸으면서도 길을 어떻게 다듬을 것인지, 안내판을 어디에 어떻게 세울 것인지 생각했다.
댐 때문에 고향 잃은 사람들, 지금은 어디에 사나
숲길에서 만나는 흑염소 목장이 정겹다. 목장을 돌보는 허름한 집도 보인다. 순간, 주마등처럼 스치는 게 있었다. 댐을 만드는 과정에서 터전을 잃은 실향민들이었다. 고향을 잃은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장성댐에는 율행마을, 임실마을, 용암마을, 도곡마을, 장평마을이 잠겼다. 지금은 지도에서도 사라진 전라남도 장성군 북상면의 마을들이다. 문순태의 소설 <징소리>가 생각난 것도 그때였다. 소설의 배경이 여기였다. 장성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나온 실향민의 아픔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칠복이가 고향을 떠난 지 삼 년 만에 미쳐서 돌아와 징을 두들기며, 댐을 막은 뒤부터 밀려드는 낚시꾼들을 쫓아댔다. (중략) 뒷동산 각시바위에 댕돌같이 앉아서는 목이 터져라고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대는가 하면, 느닷없이 징을 두들기며 겅중겅중 도깨비춤을 추었다."갈 곳은 물론 삶의 희망까지 잃어버린 실향민의 아픔이었다. 호숫가 언저리를 따라 난 길을 걸으면서 소설 속 주인공이 떠올랐다. 도시를 떠돌다가 돌아와 물에 잠긴 고향을 떠올리면서 옛 친구들을 찾던 그였다. 내 마음 한 켠도 아려온다. 허칠복의 정신이 온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발걸음이 한참 동안 무거웠다.
호반길은 수성마을로 이어진다. 마을 뒤편 성미산(388m)에 봉화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방장산에서 받은 횃불이나 연기를 입암산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봉화대를 둘러싼 망점산성(望岾山城)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망점산성은 성미산의 3개 봉우리를 연결하는 길이 780m, 폭 5m의 산성이었다. 꽤 규모가 큰 건물과 연못의 흔적이 발견됐다. 비상시엔 인근 지역 주민들의 피난처로 활용됐다. 여기서 수습된 토기와 자기 조각으로 백제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성마을에서 길은 장성호 조정경기장 쪽으로 간다. 숲길과 임도를 따라가는 길은 여전히 한산하다. 큰 부담 갖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호반길은 조정경기장에서 끝난다. 쉬엄쉬엄 걸어서 3시간가량 걸렸다.
더 걷고 싶으면 아스팔트 도로의 인도를 따라가면 된다. 햇볕 쨍쨍한 날 걷기엔 조금 부담스러운 길이다. 그러나 부담을 감수하면 호반 도로 끝자락에서 장성호 관광지와 만난다. 수상스키가 호수를 시원하게 가르고 있다.
장성호 수몰문화관도 있다. 대를 이어 살아온 고향을 등져야 했던 수몰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시와 글, 그림과 어록을 주제로 갖가지 조각작품이 세워진 조각공원도 있다. 이순신과 안중근, 김구에서부터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여기서 만난다. 조각공원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장성호 풍광도 시원하다.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도 금세 식혀준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도 여러 군데다. 내장산국립공원의 남창계곡과 입암산성의 풍광이 빼어나다. 한여름 더위를 피하기에 제격이다. 계곡도 여러 갈래로 길다.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고불총림 백양사도 고즈넉하다. 주인 없이 무인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신촌마을의 '양심가게'도 가깝다.
신촌마을에서 한재골 방면, 월성 저수지 앞에 홍길동 우드랜드도 있다. 하늘로 쭉쭉 뻗은 편백이 숲을 이루고 있다. 호남 유일의 사액서원인 필암서원과 홍길동테마파크는 황룡면에 있다.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아곡 박수량 선생의 백비(白碑)는 홍길동 테마파크에서 가까운 황룡면 금호리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국도 장성 나들목에서 1번 국도를 타고 고창 방면 야은교차로로 나간다. 여기서 석정온천 방면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장성댐 수변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