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달리기를 하다가 중간에 멈춰 섰다. 길가에 거뭇거뭇한 해초들이 죽 늘어서 있어서였다. 사실 며칠 전부터 나는 이게 뭔지 궁금했었다. 주위에 누구라도 있으면 좀 물어볼 텐데 해초 주위엔 매번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둬도 누가 훔쳐가거나 그러진 않는가 보다.
달리기를 마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일을 하던 스태프에게 그 해초가 뭔지 물었다. 뭐라고 물어야 할지 갑자기 생각이 안나 더듬더듬 거리다 이렇게 무식하게 묻고 말았다.
"그, 길가에 머리채 같은건 뭔가요? 엄청 있던데.""아, 흐흐. 그건 우뭇가사리에요.""우뭇가사리?""네."우뭇가사리가 이렇게 생겼구나. 예전에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엄청 먹어댔던 한천이 생각났다. 한천의 원료가 우뭇가사리라고 했는데, 이제야 우뭇가사리의 본 외모(?)를 우연히 보게 된 셈이었다. 우뭇가사리를 생각하고 있으니 한천을 숭숭 썰어 넣은 냉국을 한 숟가락 푹 떠먹고 싶어졌다. 갑자기 엄마 밥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하는 토스트와 수프, 커피로 배를 두둑이 채워놔야 한다. 오늘은 우도로 가기로 했다. 양과 함께.
우도에 가면 스피드보트를 타라고 했는데...어젯밤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생긴 일정이었다. 룸메이트 중 한 명이 전날 밤을 우도 게스트하우스에서 보내고 왔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밤새 떠들썩하게 바비큐 파티를 했는데 이곳은 너무 조용해 어리둥절하다고 말하던 그녀는 내게 꼭 우도를 가보라고 말했다. 다른 그 무엇 때문도 아닌 스피드보트 때문이란다.
소가 돌아 누운 모습과 비슷해 우도라 불리게 된 이 섬에는 8개의 명승이 있다. 이를 우도 팔경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우도팔경을 다 보려면 스피드보트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광경이 있기 때문이란다. 나중에 찾아보니 우도 팔경중 제 1경인 주간명월(晝間明月)을 말한 것 같았다. 암벽 주위의 해식동굴로 들어가면 한낮의 태양이 수면에 반사되 달처럼 보인다고 한다.
우도 스피드보트 경험이 있던 주위의 스태프들도 모두 엄지를 치켜세우며 '만원값어치'를 충분히 하는 그 보트는 '무조건' 타야 한다고 말했다.
"안 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인데요?""정말 후회 안 할 거예요."양은 이미 마음을 먹은 뒤였다. 그녀는 우도에 가면 짜장면과 땅콩아이스크림을 꼭 먹을 거라고 말했다. 마라도도 아닌 우도에서 웬 짜장면? 중국에선 우도에 가면 다 짜장면을 먹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고 양은 말했다. 실제로 양이 가지고 있던 얇은 관광책자에는 우도 짜장면 이미지가 커다랗게 콱 박혀 있었다.
나도 마음을 정했다. 양과 함께 우도로 가기로. 그곳에서 우리가 할 건 딱 세가지다. 스피드보트 타기, 짜장면 먹기, 땅콩 아이스크림 먹기.
밥을 먹고 버스를 타러 가는데 하늘을 보니 곧 비가 올 것 같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 오후부터 비가 올 확률은 70%란다. 오후라면 몇 시를 말하는 걸까. 비가 온다면 최대한 늦은 오후에 오길 바라며 우리는 성산포 여객터미널로 향했다. 여객터미널에 도착하자 비는 이미 내리고 있었다.
"보, 어쩌지?""양, 우도에 도착하면 스피드보트를 먼저 타자. 어제 그 분이 검멀레 해수욕장으로 가라고 했으니까 우선 그리로 가는 거야. 그러고 나서 짜장면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으면 될 것 같아.""응, 그래."우도로 가는 여객선을 타고 가는 동안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졌다. 우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우도 투어버스를 탔다. 우도 투어버스의 두번째 정류장이 검멀레 해수욕장이었다. 우리는 첫 번째 도착지인 우도봉은 지나가고 바로 두 번째 도착지로 향했다. 내리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스피드보트 선착장을 찾았다. 뛰었다. 마침 비도 많이 오지 않는다. 우리와 같이 뛰던 두 명의 여자가 먼저 선착장에 대고 묻는다. "오늘 하나요?" "오늘 안 합니다." "왜요?" "비 오잖아요."
스피드보트 타기 실패? 나는 양에게 상황 설명을 한 뒤 두 여자는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녀들은 급히 또 어딘가로 가는 게 아닌가.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들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중 한 명이 스피드보트 타는 데가 여기말고 또 한 곳이 있다고 대답했다. "어딘데요?" "천진항이요." 천진항? 천진항이라면 우리가 도착한 우도 선착장 아닌가? 나는 또 양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어떻게 할까. 천진항으로 다시 갈까, 아니면 말까. 양은 나더러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선택했다. 오늘은 스피드보트 타기 실패.
우도에서 빗속을 걷다
"양, 비도 오는 데 우리 그냥 걷자."이 때부터 우리는 그냥 계속 걸었다. 양도 걷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꼭 어디를 가보고 싶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는 여행 스타일이 잘 맞았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투둑툭툭. 우산을 쥔 손에 힘을 꽉 쥐며 바다를 옆에 둔 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신경쓰지 않고 걸었다. 우리 옆으로는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고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이왕 비를 맞을 거라면 저렇게 시원하게 맞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비가 오는 데도 우도엔 사람이 많았다. 아무래도 아까 우리 옆을 쌩하고 지나간 자전거와 스쿠터 때문인 것 같았다. 다 큰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린 아이처럼 신이 나 있었다. 야호!라고 소리라도 지를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어른이 된 후 언제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빗속을 달려봤겠는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언제 그렇게 신나게 놀아봤겠는가. 비가 오면 비를 피해야 하고,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한다는, 이 마땅한 해결책을 따라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재미없게 살아왔겠는가.
나와 양은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걸으며 기분 좋게 그들을 구경했다. 우비도, 자전거도 없는 우리는 그들처럼 모든 걸 훌훌 벗어 던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덩달아 마음은 가벼워졌다. 스피드보트를 못 탄 것도 섭섭하지 않았다. 대신, 이 좋은 표정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으니까.
친구따라 하는 여행 걷다 보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 됐다. 우리는 양이 먹고 싶다던 짜장면을 먹으러 근처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특이하게 뿔소라 짜장면이었다. 소라는 내가 해산물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거지 않나! 그런데 이런 횡재가! 양은 해산물을 못 먹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라를 다 내게 넘겨줬다.후후. 기분 좋게 짜장면을 말끔히 해치웠다.
밥을 먹고 근처 땅콩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으로 갔다. 땅콩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은 여러 군데였는데, 그 중 한 곳에서 우리를 집중적으로 호객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네가 원조란다. 이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냥 거기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투명 컵에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담고 그 위에 땅콩 부스러기를 잔뜩 뿌리니 그 유명한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이 탄생했다. 비싼 가격 때문에 손을 부르르 떨며 한 입 떠먹으니 '오천원값어치'를 충분히 하지는 못하는 맛이었다. 그래도 뭐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다고 하니 그걸로 됐다.
나와는 달리 양은 땅콩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우도에 온 것을 다른 방식으로 한 번 더 기념하고 싶은 듯 내게 물었다.
"오늘 밤에 또 막걸리 마실거야?""응? 양은 오늘 게스트하우스 옮긴다며?""비도 오고 해서 안 옮기려고.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에게 물어본 뒤 자리가 있다고 하면 그냥 하룻밤 더 묵을 거야." "그럼, 마셔야지."내 대답을 들은 양은 씩 웃더니 아까 잠시 들렀던 근처 가게로 들어간다. 그러더니 우도 땅콩막걸리 하나를 손에 들고 나온다. 어제 마신 막걸리 맛이 꽤 괜찮았나 보다. 오늘 밤도 막걸리다!
양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우도에 오지 않았을 것 같다. 옆에서 아무리 부추겼대도 말이다. 그런데 그냥 밝은 성격의 양과 함께 여행을 하면 좋을 것 같아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였다. 양이 아니었다면 우도에 왔더라도 난 분명 짜장면도 땅콩 아이스크림도 먹지 않았을 것이다. 난 원래 무조건 짬뽕이다. 아이스크림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따라, 다른 사람의 기호에 따라 여행하는 기분도 괜찮았다. 내가 같이 가주니 상대방도 즐겁고, 나 역시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경험을 하니 즐겁지 않은가.
오후에 시작된다던 비는 오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늦은 오후가 되어도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빗속을 허우적대며 몇 시간을 걸으니 슬슬 기운이 빠졌다. 우리는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생각해 보니 우도에 대한 기억은 비랑 양밖에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 개인블로그에도 중복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