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리옹역에서 테제베(TGV) 열차를 타고 스위스로 넘어오면서 취리히 말고 또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실스마리아(Sils-Maria).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무대다. 여배우로서 세계 최초로 유럽 3대 영화제와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한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영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마치 '줄리엣 비노쉬'가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를 연기하는 것만 같다는 극찬을 받은 수작이다. 알프스 말로야 계곡을 흡사 살아있는 뱀처럼 휘감으며 꿈틀거리는 신비스러운 구름의 기상학적 자연현상, '말로야 스네이크(Malouja Snake)' 장면도 인상적이다.
체코 프라하의 거리에서, 파리의 퐁네프 다리에서 줄리엣 비노쉬가 저절로 떠올랐듯이 스위스에 오면서 다시 그녀가 저절로 떠올랐다. 더욱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영화를 전주의 한 예술영화관에서 본 게 최근의 일이라 그 잔상은 생시와 같이 생생한 터.
하지만 실스마리아도, 줄리엣 비노쉬와 재회도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몸도 하나고, 스위스에서 허락된 날짜도 하루 밖에 안 남았다는 냉혹한 현실을 아그네스가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의 행선지는 아그네스가 이미 오래 전에 설계, 예약해둔 상태였다.
"여기 스위스 교통패스예요. 하루종일 기차, 산악열차, 유람선, 트램 등 모두 이 패스 하나로 다 이용할 수 있어요. 일찍 예매하면 할인받아 싸게 살 수 있어서 아는 이에게 특별히 부탁해 미리 사 두었죠. 취리히 중앙역(Zurich HB)에서 기차를 타고 아트 골다우(Arth Goldau) 역에서 내리세요. 거기서 바로 알프스 리기 쿨룸(Rigi Klum)으로 오르는 산악열차를 타야 하니까요."패스는 50스위스 프랑(CHF), 우리 돈으로 5만 원 정도다. 아그네스의 철저한 사전 준비와 겨울 알프스에 오른다는 생각에 낯선 겨울 알프스 산행의 불안감은 이내 사라졌다. 아그네스의 길 안내 설명을 듣는 내내 소풍 가는 어린이의 들뜬 기분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겨울 알프스"리기 클룸 정상에서 날이 좋고 시간이 많으면 피츠나우(Viznau) 선착장까지 트레킹하듯 걸어내려오면 참 좋은데, 겨울에는 눈이 많이 쌓여서 아마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까 내린 곳에서 다시 산악열차를 타세요. 빨간 색 열차를 타야 해요. 파란 색은 다시 아트 골다우로 내려오는 방향이니까."아그네스의 얼굴에 먼 길을 홀로 떠나는 어린 아들을 염려하는 표정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피츠나우 선착장에서 루체른 가는 유람선을 타세요. 루체른 호수를 건너 루체른시 선착장에 내리면 돼요. 가는 길에 마땅히 요기를 할 만한 식당이 없을지 모르니 컵라면도 챙겨가시고요. 루체른에 가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다리 카펠교, 빈사의 사자상을 보고 오세요. 루체른에는 한국에서 <꽃보다 할배>를 촬영한 다음부터 한국, 중국 관광객이 부쩍 많아졌어요. 돌아올 때는 루체른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취리히 중앙역에 내리면 되고요. 반호프 거리에서 볼리스호펜 가는 트램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아그네스가 직접 차로 운전해 취리히 중앙역에 내려주었다. 그러자 이제 우리는 취리히에서 철저히 이방인이 되었다. 역 대합실 안내전광판에서 아트 골다우로 가는 열차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살폈으나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 기차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외국어와 외국지명은 잘 독해되지 않았다.
기차에는 최종 종착지만 표시되어서 취리히 주변의 동서남북을 잘 분간할 수 없는 동양의 여행자 처지로서 난감했다. 아그네스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까 하다가 참았다. 불안해 할까봐. 결국 역무원에게 사무적으로 안내를 받고 아트 골다우행 기차에 겨우 올라탈 수 있었다.
아트 골다우역에서 내리자 리기 쿨룸으로 오르는 산악열차가 보였다. 골다우와 알프스 자락은 이미 눈으로 뒤덮였다. 그러니까 톱니 바퀴 산악열차는 설국 열차 모양이 되었다. 해발 1800m의 리기 쿨룸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하얀 색깔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다른 색이 없었다. 알프스의 대자연 속에 파묻힌 것이다.
눈과 구름으로 사방이 하얀 커텐이 내려진듯 조망시계는 제로에 가까웠다. 하늘과 땅의 경계는 구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리기 클룸을 홍보하는 관광지 홍보물을 보니 봄과 여름에는 온갖 꽃과 풀이 산록을 뒤덮고 있던데. 아쉬었다. 하지만 알프스는 눈에 덮여있을 때 가장 알프스 다울 것이다. 눈에 덮힌 알프스라야 비로소 알프스일 것이다.
리기 쿨룸은 '산들의 여왕'이라 불린다. 1871년 유럽 최초로 산악철도가 운행된 곳이다. 바로 그 기차를 타고 오른 것이다. 알프스 산맥에서 그리 높은 곳은 아니지만 티틀리스, 필라투스 등 알프스의 봉우리들은 물론 멀리 취리히까지 조망할 수 있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알프스의 명소로 꼽히고 있다.
리기 쿨룸 정상 역시 온통 눈밭이었다. 사방에 보이는 건 눈, 침엽수, 인적 없는 산장 몇 채말고 없었다. 보이는 그대로 사진을 찍으니 그 자체로 크리스마스 카드가 되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한치 앞으로 발을 내딛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컵라면을 먹거나 한가롭게 걸어내려올 엄두는 전혀 낼 수 없었다.
피츠나우 쪽에서 올라온 듯한 스위스 청소년들은 단체로 잔뜩 몰려와 산악열차 대신 썰매를 타고 경사진 비탈을 따라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눈썰매도 없고 담력도 없는 우리는 아그네스가 주의를 준대로 빨간 색 산악열차에 안전하게 올라타고 피츠나우로 하산했다.
루체른 호숫가의 아름답고 조용한 휴양촌 피츠나우(Viznau). 거리는 인적이 드물어 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기다리는 동안 리기 클룸 설산을 하염없이 올려다 봤다. 다시 올 기약을 할 수 없는 미련과 아쉬움을 가득 담아. 눈발은 그치지 않았고 구름은 더 짙게 깔렸다.
'스위스 속의 아름답고 작은 스위스', 루체른아그네스가 챙겨준 컵라면은 결국 루체른행 유람선에 올라타고서야 꺼내 먹을 수 있었다. 평소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민주시민으로서 공공장소라 눈치가 보였지만 일단 배가 고팠다. 마침 객실 안에는 우리 말고 다른 관광객들이 보이지 않아서 객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조심스레, 그리고 허겁지겁 컵라면을 해치웠다.
수억 년 전 빙하가 만든 시리고 맑은 루체른 호수를 가로지르는 유람선 안에서 먹는 라면 맛이 나쁠 리가 없다. 그리고 보니 비록 인스턴트 음식이기는 하지만 한국을 떠난 지 거의 보름만에 일종의 한국음식을 먹은 셈이 되었다. 루체른 호수의 다른 이름은 피어발트슈테터(Vierwaldsttteress)다. '4개 숲속 나라의 호수'라는 뜻이다. 그만큼 많은 도시와 마을들의 역사와 생활이 루체른 호수로 인해 서로 엮이고 이어진다.
유람선에서 쳐다보니 말로 듣던대로 루체른시는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담했다. 스위스 국토 중앙에 자리잡아 '스위스 속의 작은 스위스'라 불린다. 자연이 아름다운 스위스에서도 특히 자연이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빙하호수, 박물관과 미술관, 중세의 고건축 등 알프스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잡은 주요한 관광명소다.
루체른시 선착장에 내리니 발길은 루체른의 상징처럼 알려진 카펠교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루체른 선착장에 내리면 바로 루체른 역이 있고 역에서 카펠교는 그리 멀지 않다. 카펠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만든 다리다. 1333년에 만들었다고 하니 700살이 다 돼 간다. 다리가 놓인 로이스강에는 백조를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물새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인간이 새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습이다.
길이 200m에 달하는 카펠교는 온통 지붕으로 덮여 있다. 지붕 안쪽에는 17세기에 그린 110장의 판화를 감상할 수 있다. 20여 년 전 화재로 다리의 상당 부분이 불에 탔으나 완벽히 복원했다. 다리보다 더 오래된 팔각형의 석조 저수탑(Wasserturm) 때문에 풍광이 더 볼 만하다. 파수대와 보물금고 등으로 쓰였다고 한다.
중세에 루체른을 온통 둘러싸고 있었다는 무제크 성벽의 잔해, 바그너박물관, 피카소미술관도 가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리고 겨울의 알프스 자락의 도시는 이방인이 거리를 무작정 해매기에 다소 추웠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구하러 로이스 강변을 헤맸으나 휴일이라 문을 연 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유일하게 문을 연 다국적자본 카페 스타벅스에 들어가 잠시 몸을 녹였다. 한국에서는 결코 가지 않던 곳인데.
몸이 좀 녹자 입력한 프로그램에 맞춰 발길을 재촉했다. 이름부터 의미심장하고 처절한 '반사의 사자상(Löwendenkmal)'부터 찾아나섰다. 앞으로. 루체른에 오면 누구나 한번은 가봐야 한다는 루체른의 랜드마크. 그곳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방위만 정하고 어림 짐작으로 중국인 단체관광객 무리를 따라가니 그곳에 절벽에 빈사 상태로 갇힌, 또는 매달려 있는 사자상이 나타났다.
한국에도 '빈사의 사자'가 많았는데, 대체 이 나라가? 빈사의 사자상, 또는 라이언 기념비.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표정의 사자의 등에는 창이 꽂혀 있다. 1792년 8월 프랑스 루이 16세 왕과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가 몸을 숨긴 튈르리 궁전을 사수하다 전멸한 스위스 용병인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 장병들을 추모하려는 목적이다. 사자상 아래에는 786명 용병 이름 모두 새겨져 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슬프고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인 스위스는 당시 유럽 최빈국 중 하나였다. 무역도, 산업도 발달하지 않아 나라 안에서 먹고 살 방법이 막막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투쟁에서 단련된 용맹스런 청년들은 용병으로 해외에 나가 돈을 벌어 가족들의 생계를 해결했다. 스위스의 국가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산업의 자산과 경쟁력은 용병들의 신의, 용맹, 충성심이었다.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프랑스의 루이 16세를 용병으로 지키고 있었다. 왕의 근위대를 비롯해 다른 나라 출신 용병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스위스의 786명의 용병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몰살 당한 것이다. 유일한 생계수단인 용병 일자리를 자식 세대에 물려주려니 죽어도 도망갈 수 없었다는 게 이유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이 사자상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했다. 이후 스위스 용병들의 의리와 충성심은 전 세계의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 지금도 교황청을 지키고 있는 근위병은 모두 스위스 용병(Reisläufer)들이다. 라이슬로이퍼는 '전쟁에 나서는 자'라는 뜻이다.
이런 안타깝고 참혹한 선조들의 역사를 후세에 기리기 위해 1820년에 '반사의 사자상'을 바위 절벽에 새겨넣었다. 이 사자상의 사연을 아는 스위스의 후손 세대들은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도저히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다른 나라와 민족의 용병 말고는 먹고 살 길이 없던 나라에서 태어난 선조들의 슬프고 아픈 역사로 치면 한국도 스위스 못지 않다. 굳이 멀리 갈 거도 없이 가까운 현대사만 보더라도 베트남 파병,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 건설노동자 인력 송출 등에 이르기까지 무수하다.
찢어지게 가난한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태어난 우리 부모세대들은 자식세대에게 가난과 생활고를 물려주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스위스 용병처럼 죽음도 불사할 각오로 무식하고 무모할 정도로 '빈사의 사자'처럼 일하고 또 일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정도로 국가의 경제는, 외형은 성장했다. 최소한 절대 빈곤 상태, 변방의 후진국 처지에서는 벗어났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행복하지 않은 국민들이 너무 많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걸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약자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앵벌이처럼 알바를 전전하고 노인들은 매일 폐지를 주으러 길거리에 나서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이웃이 굶어죽어도 챙겨줄 여유도 없는 노예같은 삶이 일상이다. 국가와 정부가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의 생활과 미래를 위협하고 마침내 극한의 민생고와 우울증으로 내몰기도 한다.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지난날 '빈사의 사자'보다 더 용감하고 책임감 있던 선조들이, 부모들이, 선배들이 피땀으로 일군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성공 신화는 본디 사실이 아니었는가. 모두 허구이고 허상이었는가. 무능하고 불순한 정부의 새빨간 거짓말이었는가.
그게 아니라면 그 많은 성장과 성공의 과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한국의 '빈사의 사자'들이, 스위스 용병, 라이슬로이퍼처럼 남을 위해, 후손을 위해 '전쟁에 나서는 자'들이 많았는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그들의 헌신과 죽음으로 지켜낸 대한민국 국가공동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평하고 사이좋게 공유해야 할 그 많은 과실은 대체 누가 혼자 다 먹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