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0일, 언론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메르스' 확진 환자가 발생했다는 속보를 낸다. 농작물 재배 관련으로 바레인을 방문한 68세 남성이 '중동 호흡기 증후군'인 메르스에 감염되었다는 보도였다. 당시 국민들은 '메르스'가 뭐냐며 어리둥절해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2012년부터 지난 3년간 354명의 메르스 사망자를 낸 사우디아라비아조차 이 병의 정확한 감염 경로를 밝히지 못했다. 그래서 치료 백신 역시 개발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다만 지금까지 보고된 바에 따르면, '단봉낙타'와의 접촉을 통해 감염된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보건당국의 안이한 메르스 대처가 비극 불렀다그래서 처음 우리 정부가 밝힌 '메르스 감염 유의사항'에 많은 이들은 생소해했다. '낙타와 접촉하지 말고, 덜 익은 낙타 고기나 낙타 젖을 먹지 말라는' 안내는 많은 국민을 의아스럽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낙타를 접촉할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다 보니 이러한 정부 안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무성했다. "거리에 낙타도 없는데 왜 사람들이 메르스에 감염되냐"는 식의 풍자가 널리 퍼지며 정부 대처를 비판하는 목소리였다.
안이한 정부 대처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메르스 관련 정보를 국민에게 비밀로 해 메르스 감염을 더 확산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도 정부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긴급 기자회견 전까지 메르스를 두고 '단순 감기 수준'이니 '손만 잘 씻으면 감염되지 않는다'는 식의 한가한 대책만 내놓았다. 결국 이런 잘못된 대처는 이후 더 큰 비극을 불러오는 도화선이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메르스에 감염된 사람을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부르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숫자로 부르는 곳은 딱 한 군데 밖에 없다. 바로 교도소다. '수형 번호'(약칭 수번)라 하여 재소자들은 각자의 가슴에 명찰을 부착하는데, 이번에 메르스에 감염된 환자들도 이름 대신 '몇 번' 환자라는 호칭으로 지칭했다.
다행히 지난 7월 28일, 황교안 국무총리는 그동안 우리나라에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준 메르스 사태가 '사실상' 끝났음을 밝혔다. 5월 20일 첫 메르스 확진 환자 발병 후 69일 만의 일이었다. 물론 국제 기준으로 보면 메르스 종결 선언이 이르다는 비판도 있지만 지금까지 추가 발병 보고가 없어 국민들은 이 같은 메르스 종결 선언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정부는 "메르스 사태로 인한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문화와 여가, 그리고 경제 생활 등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국민에게 주문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오는 8월 14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침체된 내수 진작과 메르스 사태 기간 동안 큰 피해를 입은 여행 산업의 활성화에 힘을 보태려는 의도다.
하지만 정부의 메르스 종결 선언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메르스 사태 과정에서 양성판정을 받고 사망한 피해자 36명과 그들의 가족이다.
메르스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사연
5월 20일 메르스 확진 환자 발생 후 종결 선언까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메르스 확진 환자는 모두 186명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피해자는 모두 36명. 이들은 이름 대신 "몇 번 환자가 오늘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보도로 자신의 부고를 알렸다. 어느 재난 영화에서나 보았던 비극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한 비극은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상이 나면 최소한 3일장을 치른다. 더러는 5일장을 하기도 하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7일장이나 10일장도 한다. 하지만 메르스로 인한 감염 사망자는 이처럼 당연한 작은 예우조차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사망한 36명의 메르스 피해자들은 보건당국의 지침에 따라 사망 후 24시간 이내에 화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장례의 일반적 문화인 '염'조차 하지 못했다. 보건 당국은 감염을 우려하여 사망 즉시 사망자를 비닐로 감싼 후 이중으로 된 메르스 바이러스 누출 방지용 시체 백에 담아 곧바로 화장터로 보냈다. 누가 당하든 끔찍한 '인생의 마지막 길'이었다.
이러한 메르스 사망자의 참담한 사연은 언론을 통해 계속 이어졌다. 특히 대전에서 노부부가 보름 간격으로 사망한 사건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른바 '36번' 환자로 알려진 82세의 남편이 메르스로 사망하고 그 보름 후에 그의 81세였던 아내가 사망한 것이다. 언론은 그 아내를 '82번' 환자라고 불렀다.
더구나 3남 1녀의 자녀들은 마지막 순간, 이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감염을 우려한 보건당국의 제지 때문이었다. 비극이었다. 이처럼 메르스는 살아남은 유족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장례에도 동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택 격리'되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또 있었다.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사망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메르스 공포로 인해 (메르스 감염으로 죽은) 사망자의 장례를 맡아줄 업체가 없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언론 보도를 접하며 기자 역시 '그렇다면 누가 이 장례를 치렀나' 궁금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 곳을 알게 됐다. 바로 한국노년복지연합(약칭 한노연)였다.
시민단체가 메르스 사망자 장례에 관여한 계기
한노연이 처음 메르스 사망자의 장례 봉사를 하게 된 사연은 특이했다. 시작은 '진짜' 메르스 사망자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6월 10일 삼성 서울병원에서 암 투병을 하던 송아무개씨(55)가 사망했다. 암으로 사망했으니 송씨는 메르스 확진 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송씨가 입원한 병원이 메르스 격리병동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어느 장례식장에서도 사망한 송씨에게 빈소를 내주지 않았다.
송씨의 남편 서아무개씨는 이미 숨진 아내를 운구차에 실은 채 경기도내 장례식장 여기 저기를 떠돌아 다녀야 했다.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닌데 이럴 수 있냐"며 장례식장 관계자와 싸우고 항의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빈소는 구할 수 없었다.
그때 희망을 준 곳이 있었다. 바로 시민단체인 한노연이었다. 남편 서씨는 답답한 마음에 이리저리 방법을 찾던 중 인터넷에서 우연히 한노연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전화해 현재의 사정을 설명하자 한노연 상장례분과 관계자들이 한 장례식장을 알선해 줬다. 그렇게 해서 송씨가 사망하고 7시간 만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노연은 메르스 사망자의 장례 봉사에 적극 개입하게 된다. 메르스 관련 사망자도 아닌 송씨가 이런지경인데 진짜 메르스 사망자는 누가 돕겠냐며 결의한 것이다. 메르스 사망자 36명 중 한노연 상장례분과 측에서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른 이들은 송씨 포함 모두 9명(메르스 사망자는 8명)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슴 아픈 일화도 많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을 묻자, 한노연 노정호(51) 사무총장은 한 사망자의 딸이 울며 가져온 '수의'를 떠올렸다.
시민단체 한노연 관계자가 전하는 메르스 뒷이야기사연은 이랬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메르스 양성 판정을 받은 사망자는 입고 있던 환자복을 그대로 입은 채 비닐에 싸여 24시간 이내 화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날도 한노연 상장례분과 봉사자들은 또 한 명의 메르스 사망자를 화장하기 위해 분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한 젊은 여자가 한노연 관계자를 찾아왔다. 사망자의 딸이었다. 그녀가 울며 들고 온 것은 아버지 생전, 딸이 정성껏 준비했던 수의였다. 딸은 "아버지에게 제발 이 수의를 입혀달라"며 간절히 부탁했다.
하지만 메르스 감염을 우려한 보건당국은 사망자의 옷을 벗기거나 염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딸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딸은 "그럼 아버지의 관 위에 이 수의라도 놔달라"고 재차 청했고 결국 한노연 봉사자들은 그 눈물의 수의를 관 위에 놓았다.
화장이 모두 끝난 후 한노연 봉사자들은 딸에게 "원하는 대로 아버지 관 위에 수의를 놔드렸다"며 전했다. 그러자 딸은 이내 펑펑 울며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이런 아픈 사연이 9번에 걸친 장례 봉사 과정에서 반복되었다고 한노연 노정호 사무총장은 말했다.
반면 서운한 기억도 있었다. 그 중 한 화장장에서 겪은 일이었다. 이날도 메르스 사망자가 발생해 모 화장장에 낮 1시경 도착했는데, 일반 사망자의 유족도 10팀 정도 있었다고 한다. 대략 시신 1구당 유족이 30~40명이니 총 300여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한노연 측이 메르스 사망자의 화장을 위해 왔다는 것을 안 다른 유족들이 봉사자들에게 심한 욕설과 함께 거친 항의를 쏟아냈다. 이들과 다툴 수도 없었던 한노연 봉사자들은 조용히 메르스 사망자의 시신을 운구해 다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망자의 유가족들이 떠나간 이후 오후 5시가 돼서 화장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난 7월 28일, 황교안 국무총리가 메르스 사태의 '사실상' 종결을 발표한 날, 한노연 노정호 사무총장을 비롯한 상장례분과 봉사자들의 감회는 또 남달랐다고 한다. 그동안 이름이 아닌 번호로, 임종은커녕 장례 예식조차 생략된 채 마지막 길을 떠나야 했던 피해자들을 또 만나지 않게 돼 그 누구보다 기뻤다는 것이다.
사실상 메르스 사태는 끝났다. 다시는 또 없어야 할 비극이다. 하지만 메르스가 남긴 뒷이야기는 한편으로 가슴 아프고 또 한편으로 희망이다. 우리는 몰랐으나 아무도 모르게 헌신한 이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메르스 사태 종결을 위해 애쓴 대한민국의 모든 의료진과 관계 공무원, 그리고 뒤에서 수고한 한노연과 같은 또 다른 '숨겨진 영웅들' 덕분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