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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이 자전차점 모습(1944년).
아라이 자전차점 모습(1944년). ⓒ 이종남

광복 1년 전(1944) 사진이다. 위치는 군산부 소화통 1정목(군산시 중앙로 2가). 가게 주인은 이규철(1912~1945). 처음 보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소유 상가 모습이다.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은 건물은 아라이(アラヰ) 자전차점. 방화수가 담긴 드럼통, 낯모르는 배우 사진이 들어간 영화 포스터, 일본어 간판 등이 시대를 반영한다. 

고무신과 함께 신문물의 상징이었던 자전거. 1930~1940년대 국내에서 유통되는 자전거는 모두 수입품이었다.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다. 군산의 양조장과 대형 방앗간들도 짐자전거를 대여해서 막걸리와 쌀을 배달했다 한다. 광복 후에도 자전거는 남자들이 꼭 소유하고 싶은 물건 중 하나였다. 따라서 지금의 외제 승용차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규철은 1932년 지금의 군산시 장미동 '정미소 거리'에 '전북자전차점'을 열었다. 그는 착실히 돈을 모아 1944년 소화통 건물로 확장 이전하였다. 그때 상호도 '아라이 자전차점'으로 바꾼다. 상호 변경에서도 식민지 백성의 아픔이 묻어난다. 총독부 명령으로 '전북'을 '아라이'로 바꾼 것. 당시 자전차점은 경찰서가 발행하는 허가증이 있어야 영업할 수 있었다.

일제 탄압은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더욱 강화됐다. 1942년 7월 소화통 2정목에 있던 동부교회 최상섭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군산경찰서로 연행되어 문초를 받았다. 장로들도 잡혀가 고초를 당하였다. 빼앗긴 찬송가도 300여 권에 이른다. 그 후 고등계 형사들 감시 하에 예배를 봐야했고, 일제는 협력하지 않는 목사를 '미국의 앞잡이'라는 죄목으로 강제 사임시켰다.

명치정은 일본인 거리, 소화통은 조선인 거리

 최근 중앙로 2가 모습(구 경찰서 방향이다. 오른쪽 하얀 상가 건물이 아라이 자전차점, 두 번째가 평양관이 있던 건물이다.)
최근 중앙로 2가 모습(구 경찰서 방향이다. 오른쪽 하얀 상가 건물이 아라이 자전차점, 두 번째가 평양관이 있던 건물이다.) ⓒ 조종안

소화통(昭和町)은 군산의 도로 중 가장 늦게 개설됐다. 1924년 시가지 지가(地價) 조사에서 제외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구간은 경찰서 로터리에서 구복동, 대정동(큰샘거리), 장재동 일대를 관통하며 군산역까지 이어진다. 1928년 공사를 시작, 구릉지를 절개하는 등 난공사 끝에 1930년대 초 완공된다. 1935년 7월 포장을 완료, 군산의 중심도로 위상을 갖추게 된다.

명치정, 소화통 모두 일제가 자국 왕의 이름을 붙인 도로명이다. 그중 명치정은 일본인 거리 소화통은 조선인 거리로 불리었다. 명치정에는 부청(시청)을 비롯해 경찰서, 우체국, 공회당 등 공공기관 건물과 일본인 상가가 즐비했다. 소화통에는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단체 사무실과 학교, 상가 등이 많았다. 군산을 무대로 1930년대 식민지 암울한 사회상을 날카롭게 풍자한 소설 <탁류>에서도 느껴진다.

 군산문화원이 세운 ‘큰샘거리’ 표지석
군산문화원이 세운 ‘큰샘거리’ 표지석 ⓒ 조종안

 콩나물 고개와 연결되는 ‘뼈병원 골목’(최근 모습)
콩나물 고개와 연결되는 ‘뼈병원 골목’(최근 모습) ⓒ 조종안

"정주사는 요새 정거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 난 소화통이라는 큰 길을 동쪽으로 한참 내려가다가 바른손 편으로 꺾이어 개복동 복판으로 들어섰다. 예서부터가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 채만식 소설 <탁류> 42쪽에서.

소설에서 '새로 난 큰길'로 묘사되는 소화통은 주인공 초봉이의 출퇴근길이다. 그의 동생 형주의 등굣길이기도 하다. 아라이 자전차점 건너편에서 시작되는 '뼈병원 골목'(임정골 의원 골목)은 '콩나물고개'(아리랑고개)와 곧바로 연결되고, 한참봉 쌀가게는 그 고개 아래에 있었다. 서천에서 가족을 데리고 금강을 건너온 정주사가 처음 집을 마련한 동네도, 초봉이와 고태수가 신혼살림을 차린 동네도 '큰샘거리'이다.

일제가 계획한 도시 군산은 새로운 도로를 낼 때마다 정감어린 전래 지명이 하나씩 기억에서 잊혀갔다. 소화통 개통과 함께 사라진 '큰샘거리'와 '구복동' 그리고 명산동 일대 중정리, 월명산 아래 상정리(윗시암), 영화동 부근 구영리, 월명공원 아래 내영리, 중앙로 1가 강변리, 신창동 부근 거석리, 서낭당 고개(형무소 고개) 등이 대표적이다. 군산의 도로와 동명에서 정(町·마찌)은 일본식, 동(洞)은 우리의 전통 지명인 리(里)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3·1독립운동에 참여한 군산공립보통학교 

  군산공립보통학교 조회광경(1920년대)
군산공립보통학교 조회광경(1920년대) ⓒ 군산시

소화통에는 동일은행 군산지점,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 군산세무서, 수리조합 군산출장소, 충남정미소 매가리 판매소, 세창의원, 군산 농구구락부, 군산 중앙소비조합, 오리엔탈 기악상점, 평양관(한식당), 군산식당 등이 있었다. 주민과 중앙지 기자들이 1932년에 창간한 격월간지 <군산춘추> 사무실과 '조선인 음식점조합 회관'도 있었다. 음식점조합 조합장은 냉면으로 유명한 '강경옥' 주인이었다.

군산 공립보통학교는 1907년 개교한 조선인 학교였다. 1909년 남녀공학이 되고, 3·1독립 만세운동 때는 건물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는다. 학생들이 일본인 교장의 압력과 회유에 넘어가자 독립에 저해되는 친일학교를 불태워 버리기로 한 학부모들이 행동으로 보여준 것. 재학생 70여 명은 연서로 자퇴서를 제출하며 항거하였다. 이 사건은 1919년 설애장터 만세운동(3·5 만세운동)과 더불어 군산 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으로 기록된다.

'어제는 영정(송방거리)에 카페가 늘었고, 오늘은 소화통에 음식점이 생겼다.'

1935년 당시 군산에 떠돌던 탄식조 유행어다. 초등학교 입학조차 어려운 조선 청소년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방황하고, 유흥문화에 쉽게 감염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개탄하는 다른 표현이었다. 당시 군산 인구는 약 4만(조선인 3만, 일본인 1만)으로 일본인 학교는 공립중학교, 고등여학교, 상업보습학교, 가정여학교, 청년 훈련소, 심상고등소학교 등이 있었다. 반면 조선인 학교는 공립보통학교 하나 밖에 없었다.

군산 최초 한정식당 평양관

  평양관 주인 이근삼 가족사진(1930년대)
평양관 주인 이근삼 가족사진(1930년대) ⓒ 이 용

평양관(平壤館)은 군산 최초 한정식 전문식당으로 알려진다. 이근삼(1889~1948)은 평양이 고향으로 1920년대 초 군산부 구복동(아라이 자전차점 옆 2층 건물)에 평양관을 개업하였다. 그는 조선인 상점 주인들로 구성된 '군산상업친목회' 회장을 지냈다. 일본인 미곡 중개업자들의 횡포로 억울하게 피해 보는 조선의 소작농과 소상인들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다.

1920년대 군산은 일본인 악질 농장주들을 옹호하는 소작조합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횡포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쟁의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옥구농민항일항쟁'이다. 이근삼은 1929년 10월 뜻을 같이하는 10여 명과 간담회를 열고 군산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는 연미중개점(延米仲介店) 철폐운동을 벌이는 등 일제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근삼은 조선 청년 노동자들과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 9월부터 노동야학과 소년단체 후원 사업을 펼치는 군산 노동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냈고, 1926년 3월 시내 학원(광동학원, 한송학당, 영신여학원 등)과 노동청년회 보조금 모금 운동에도 앞장섰다. 1931년에는 경영난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군산 중앙유치원 정리위원을 역임하였다.

경술국치(1910) 이후 왕으로 강등된 순종황제가 망국의 한을 달래다 1926년 4월 25일 비운의 생을 마감하자 조선 팔도는 슬픔에 잠겼다. 장례 과정에서 대·소여를 인도할 봉도단(奉悼團)이 학교, 단체, 지방별로 조직되었다. 6·10만세운동으로 이어졌던 장례식. 군산에서도 상민(商民) 봉도단 열 명이 정해졌는데, 이근삼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양관은 광복 후 군산에서 으뜸 한정식 전문식당으로 손꼽히던 청춘옥(靑春屋) 전신이기도 하다. 이근삼 아들(이보국)이 1930년대 후반 개복동 군산극장 앞에 개업해서 가업을 이은 것. 청춘옥은 1960~1970년대 총각 봉급쟁이들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식당, 결혼식 피로연을 열고 싶은 식당으로 꼽을 정도로 유명했다. 청춘옥은 1990년대 중반 문을 내린다.

권번 기생들도 설립에 동참했던 '영신여학원'

 영신유치원 제12회 졸업식(1943년)
영신유치원 제12회 졸업식(1943년) ⓒ 동국사

아라이 자전차점 오른쪽 길은 조선인 상점이 많았던 영정(榮町·송방골목)으로 통하는 골목길이다. 골목에는 1944년 4월 서울 이남에 최초로 지금의 군산시 구암동에 들어선 대형 제지공장(북선제지·페이퍼코리아 전신) 일본인 직원 사택(長屋) 7, 8채가 있었다. 1944년 당시 자전차점 부근에는 영신유치원, 영취루(중화요릿집), 희소관(구 남도극장) 등이 있었다.

영신유치원은 본래 군산 개복기독교청년회와 뜻있는 조선인들이 후원회를 조직, 1920년대 초에 설립한 미션스쿨(영신여학원)이었다. 초기에는 6년제였으나 운영비 관계로 4년제로 단축하여 운영되었다. 교사(校舍) 건축을 앞두고는 군산 상우회, 형평사, 군산 노동회, 철도 노동조합, 양화 직공조합 등 사회단체와 개인, 권번(군산권번, 보성권번)의 기생들까지 나서 후원금을 맡겼다.

1923년 8월 5일 하와이교포 학생야구팀 일행(합창단 포함 23명)이 군산역에 도착한다. 광장에서 기다리던 환영객 600여 명은 미선조합 양악대(고적대)를 선두로 거리 퍼레이드를 벌였다. 경기장으로 이동하기 전 영신여학원에서 열린 환영식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군산 유학생 학우회, 군산 신탄조합(땔감 조합), 군산 경신구락부 청년회, 남녀 구암기독교 청년회, 영신여학원 등 개인과 단체에서 많은 성금이 답지했다. 

당시 군산은 일제의 곡식 수탈 전진기지로 번창 일로에 있었다. 대규모 상가와 금융기관이 잇따라 들어섰다. '기생을 취하려면 평양 부윤, 권세를 누리려면 한성 부윤, 돈방석에 앉으려면 군산 부윤'이란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인들이 부를 쌓을수록 조선인의 삶은 더욱 고달프고 궁핍해져 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와이 교포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영신여학원은 1925년 '희소관'에서 음악가극회를 열고, 1928년엔 군산좌(군산극장)에서 동정(同情:이웃돕기) 음악회를 개최한다. 각종 토론회와 매년 하기 아동성경학교를 여는 등 다양한 행사로 반향을 일으키자 일제는 1931년 3월 재정 부족을 구실로 폐교 조치를 내린다. 그리고 그해 여름 뜻있는 주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영신유치원으로 다시 태어난다. 

소화통은 명치정과 함께 군산의 동맥이었다. 우리나라 최초 신작로인 전군도로(1908년 개통)와 곧바로 연결되어 광복 이후 전주-군산 자동차전용도로가 개통되는 1990년대 초까지 군산의 현관 역할을 하였다. 이는 군산의 도시 발전이 그만큼 늦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이규철은 광복(1945)이 되자 상호를 '조화(朝和) 자전차점'으로 다시 바꾼다. '朝和'는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사는 세상이 됐다'는 의미였다. '朝'는 조선, '和'는 일본을 상징한단다. 민간 의용소방대원이었던 그는 그해 11월 일제가 묻어놓은 포탄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군산경마장 화재사건 때 인명을 구조하다 순직한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셋. 군산 월명공원에는 그를 포함한 희생대원 9명 이름이 새겨진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군산소방서는 매년 11월 30일 추모제를 지낸다.

참고서적: <군산의 지명 유래>(이복웅)/ <군산야구 100년사>(조종안)/ 1920~1930년대 <동아일보> 기사/ 군산부 지도(1934)/ 이종남(81), 이용(73)씨 구술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군산시#소화통#중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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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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