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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위기를 기회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함께합니다. 그가 품는 희망은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너무나 아파서 가슴이 막막했던 문제들을 해결해 오며, 작기만 했던 가능성은 어느덧 기대 이상으로 실현됐습니다. 그리고 삶의 희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 과정들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중심에는 '사람은 상처 받고 고통만 당하기엔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약 24년(1991~2014년) 동안 조카와 함께 울고, 웃던 나날들의 경험이, 어떻게 풍성한 열매로 자리하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기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기자 말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해 불평할 이유가 있더라도 계속 서로 참고 서로 기꺼이 용서하십시오." - 골로새서 3:13

점점 덕이는 나를 향한 불편한 마음을 지닌듯 했다. "무엇을 하자"고 권하면 무조건 '노'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예상했던 것 보다 고집이 셌다. 그도 그럴 것이 태권도 두 사범 중 한 사범은 대놓고 덕이를 못마땅하다는 말과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관장님께 말씀드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덕이는 그 상황이 얼마나 불편하고 또한 불안했을까 싶다.

그런 불편한 마음은 유일하게 나에게 나타내고 있었다.

고모 : "덕아, 아침 먹자."
덕 : "안 먹어."
고모 : "덕아, 양치하고 씻고 자야지."
덕 : "싫어."
고모 : "밤 11시면 불 끄고 자자."

밤새 불 켜놓고 자는 둥 마는 둥 하기를 여러 날이었다. 이해가 간다. 하물며 나 또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덕이인들 왜 고민스럽고 괴롭지 않겠는가.

고모 : "덕아, 잘 잤니?"
덕 : (반응이 없고 나와 눈을 마주하지 않는다)
고모 : "덕아 너가 나와 눈을 마주보지 않고 지낸지 약 6개월이 됐는데 이제는 고모가 힘들다. 마음도 아프고 사실 몸도 아프고..."
덕 : (나를 한번 본다)

고모 : "고모가 이런 말 하면 덕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언제나 덕이 네 생각 뿐이란다. 어떻게 하면 너가 건강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네가 행복하게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네가 좋아하는 것이 재능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등 너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한단다. 그런데 요즘 너가 나와 눈을 마주하지 않고, 물어보는 말에 반응도 없고 그래서 고모도 힘들어."
덕 : "..."

덕아, 무엇이 문제니?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지만 덕이의 눈빛과 태도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말하길 잘 한 것 같았다.

덕이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해마다 양력 1월 24일(덕이가 태어난 날)에는 덕이 아빠의 유골이 머문 인천 월미도를 다녀오곤 했다. 늘 덕이의 겨울 방학 중이라서 다행이었다.

고모 : "덕아, 이번 1월 24일에 무엇을 준비해서 월미도를 갈까?"
덕 : "안 가."
고모 : "지금 뭐라고 했니?"
덕 : (나를 빤히 보고만 있다)

"지금 안간다고 했니"라고 반문하면서 나도 모르게 덕이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다. "뭐라고? 안간다고? 너 그게 무슨 소리니?"라며 그동안 내 안에 쌓였던 불편함이 쏟아져 나왔다. 이틀 전 대화로 어느 정도 풀린 줄 알았으며, 해마다 월미도 가는 것을 누구보다도 덕이가 제일 좋아하고 달력에 직접 빨간 표시도 해놓았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내가 화를 내니 가만히 듣고 있던 덕이가 턱을 중심으로 머리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빠르게 흔들면서 삐죽이며 하는 말.

덕 : "고모도 대화 방법을 배워!"

순간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대화 방법(NVC-비폭력대화)을 몇 년동안 강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마워해야할지. "너는 그런 것을 아는 녀석이 월미도 안 간다는 거야"라고 나무라야 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나는 근래 덕이가 '왜 하기싫고', '가기 싫은 지'에 대해 말해달라고 해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만있어 보자 덕이가 왜 안간다는 건가.'

고모 : "덕아~  알겠어, 네 말이 맞아. 내가 대화 방법을 조금 더 연구해서 평화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할게. 화 내서 미안해, 그런데 덕아 왜 월미도 안간다는 거니?"

덕 : (고개를 떨군다)

나 또한 덕이가 건강해지고 2년마다 IQ검사를 할 때마다 오르고 자존감 수치도 많이 올랐을 때는 돌아가신 오빠에게 자신이 있었지만, 이때는 덕이의 진로에 대해 자신이 없다보니 오빠에게 할 말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나 또한 월미도 가는 발길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고모 : "혹시, 덕아 그동안은 아빠께 아들로서 아빠가 좋아할 만한 자랑스런 아들이라고 여겼지만 요즘은 그 점에 대해 조금 자신이 없어서 월미도 가기가 좋지만은 않다는 거니?"

덕 : (굵은 눈물이 뚜~욱 떨어진다)

'그랬구나, 그래서였어. 그럼 그렇지. 너가 월미도를 안 간다고 할 리가 없지.'

우리 셋(할머니, 덕, 나)은 월미도를 갔다. 겨울 바닷바람이 싸늘한 유람선을 타고 한 바퀴 돌았다. 유람선 위에서 덕이 할머니는 준비해 간 정종을 바닷물에 천천히 흘려보내셨고...  우리 셋은 아무 말 없이 준비했던 일을 마쳤다. 덕이 할머니께서 덕이와 유람선 안으로 내려가셨다. 나는 내려가지 않고 그 위에 머물고 싶었다. 위암 수술을 해서 그랬을까, 말도 못할 정도로 추웠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있고 싶었다.  

순간 애끊던 심정들이 솟구치더니 펑펑 울기 시작했다. 지금 이러면 안 되는데, 더 힘을 내야 하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지면서 걱정만 빙산처럼 밀려왔다.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기에 더욱 겁이 나고 두려웠다. 그 순간 "오빠~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돼?"라며 엉엉 울었다. 덕이가 언제 다시 올라왔는지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람선 안에서는 러시아인들의 쇼가 진행되고 있었다.


#오빠생각#할머니#덕#이해#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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