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를 만나러 가는 길. 그런데 뜻밖에 아기 천사가 나타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짧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류트를 연주하다가 힘들었는지 잠시 졸고 있는 귀여운 아기 천사. 로소 피오렌티노의 <음악의 천사>입니다.
이탈리아 매너리즘을 주도했던 화가 중 한 명인 로소 피오렌티노. 극심한 대인 기피증에, 밤마다 시체를 파헤치고 다닌다는 이상한 소문까지 돌았던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 인물입니다. 그래서인지 바로 옆에 있는 <이드로의 딸들을 구출하는 모세>를 비롯한 그의 다른 대표작들은 매너리즘 특유의 왜곡된 인체에 우울과 음울한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 <음악의 천사>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손을 뻗어 부드러운 곱슬머리를 쓰다듬고 싶을 정도죠. 달리 생각해 보면 섬세하고 나약했던 로소의 영혼. 이 사랑스러운 천사는 외로웠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작은 선물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자신을 위로해 달라는 로소의 귀여운 응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소의 작품들에 이어 또다시 매너리즘 대가들의 작품이 눈에 들어옵니다. 원래 알고 있던 전시 순서와 달라서 혼란스러운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 작가를 놓칠 수는 없겠지요. 매너리즘 초상화의 대표 화가, 아뇰로 브론치노입니다.
눈부신 초상화 속에 숨어 있는 음울한 이야기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초상화. 브론치노란 이름은 생소해도 이 그림,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와 그녀의 아들 조반니의 초상>은 어느 정도 낯익은 그림일 것입니다. 매너리즘 회화의 스승인 폰토로모의 영향을 받은 브론치노는 코시모 1세(국부인 코시모 데 메디치가 아니라 로렌초 메디치의 증손녀의 아들로 메디치가 독재 체제를 구축한 지도자)의 궁정 화가로 많은 경력을 쌓았습니다. 이 그림 <엘레오노라와 아들의 초상>도 코시모 1세의 부인이었던 엘레오노라와 아들인 조반니의 초상입니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는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견고하고 얼음 같은 자태.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한 옷차림과 장신구에 고상하고 우아한 품위까지. 바로 곁에 있는 코시모 1세의 딸, <비아 데 메디치의 초상>과 함께 매너리즘 초상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토록 섬세하고 깔끔한 초상화이건만 왠지 모를 우울함, 차가움이 배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전성기 르네상스를 막 지난 16세기 중엽의 피렌체의 주인은 여전히 메디치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대한 부와 나름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스페인 왕가와 정략 결혼에 성공하고 피렌체의 권력을 거머쥔 코시모 1세는 이전의 메디치가 지도자들과 달리 스스로를 황제처럼 생각했지요.
앞서 밝혔듯이 '베키오 궁전'을 사유화하고 행정 건물인 '우피치'를 만든 것도 코시모 1세였습니다. 그런 코시모 1세가 브론치노에게 메디치 가문의 초상화를 그릴 것을 명령합니다. 결국 브론치노의 그림은 피렌체 시민들을 억압하고 독재적 지배 체제를 구축한 메디치 가문에 대한 신격화 작업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니 이토록 섬세하고 아름답지만, 이토록 냉정하고 우울한 인물상이 그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코시모 1세에게도 아픔이 있었으니 바로 그림의 주인공 조반니가 19세의 어린 나이에 병사하고 아내인 엘레오노라도 한 달 후 역시 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아들과 아내의 연이은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코시모 1세는 아들에게 대공의 자리를 물려주고 두문불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나는 아름답지만 우울한 <엘레오노라와 아들의 초상>보다 오히려 브론치노 자신이 아꼈던 난쟁이 모르간테의 실물 크기의 초상에 더 눈길이 갑니다. 왜냐하면 <난쟁이 모르간테의 초상>은 인체를 왜곡하는 매너리즘의 방식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궁정화가로서 이상화되고 신격화된 권력자들의 초상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브론치노. 역설적이게도 그는 가장 매너리즘적인(왜곡된) 신체를 가진 난쟁이를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권력과 권력에 기생할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에 대해 야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뜻하지 않게 브론치노의 명작들을 만나다보니 또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하지만 이제 서두르지 않습니다. 눈앞에 드디어 그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라파엘로! 그리고 <방울새의 성모>!
꿈속에서나 그리워 한 작품
나는 다른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꿈 속에서나 그리워했던 작품. 눈물이 한 줄 흐릅니다. 아직 다른 관람객이 오지 않은 텅 빈 전시실. <방울새의 성모> 바로 맞은편, 라파엘로의 <자화상>만이 내 눈물을 보아주고 있습니다.
인자한 성모와 아기 예수와 요한의 모습. 그리고 아직도 섬세하게 살아있는 라파엘로의 터치. 이 그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짧게 다녔던 시골 교회의 소책자를 통해서였습니다. 낡은 사진 속의 성모와 아기 예수와 요한. 나는 무엇보다 아기 예수의 천진난만한 미소와 방울새를 건네주고 떠나는 아기 요한의 (요즘 말로) 시크한 표정에 완전히 빠졌습니다. 그러면서 아기 예수와 아기 요한이 나누는 대화를 상상하곤 했지요.
"야, 가지 말고 같이 놀자.""아냐. 난 가야 돼. 대신 방울새를 선물로 줄게.""정말? 고마워. 다음에 꼭 같이 놀자."신성이라고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아기들의 순수. 그리고 그 순수를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미소. 그 시절의 나에게 이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이후 그림의 작가인 라파엘로를 알게 되었고 이어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르네상스와 이탈리아를 알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이탈리아를 향한 내 그리움의 근원은 바로 이 그림, <방울새의 성모>였던 것입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그림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라파엘로의 이 그림, <방울새의 성모>였습니다.
<방울새의 성모>는 라파엘로가 선배인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익히기 위해 피렌체에 머물던 20대 초반, 친하게 지냈던 로렌초 나지의 결혼 선물로 그려준 작품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지진이 나서 그림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지요.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번의 복원을 거쳤지만 오히려 원래의 모습에서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1998년부터 10년간의 정밀 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이 거의 원본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온화한 색조의 배경에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그려진 성모의 옷자락, 아기 예수와 요한의 뽀얀 살결과 앙증맞은 골격. 르네상스 미술의 다양한 성과들을 완벽하게 조화한 라파엘로의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라파엘로는 이 그림과 함께 여러 편의 성 모자 상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성모상을 그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림 속 중요한 소재인 방울새는 생각보다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시나무 수풀에 산다는 방울새는 십자가를 진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 오를 때 예수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부리로 빼내었다고 합니다. 이후 방울새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새가 되었지요. 귀여운 모습이지만 방울새는 고통의 삶을 살게 될 예수에 대한 아기 요한의 예언이었던 셈입니다.
이제 등을 돌려 맞은편에 있는 자신의 작품들을, 혹은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는 미청년을 바라봅니다. 라파엘로의 <자화상>입니다.
라파엘로의 독특한 천재성
이른바 르네상스의 3대 천재 중 막내라 할 수 있는 라파엘로. 우리가 라파엘로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의 천재로 신비로움에 싸여 있는 다빈치나, 범접할 수 없는 예술 정신으로 고독한 격정의 소유자였던 미켈란젤로에 비해 한없이 착하고 예의 바를 것 같은 미청년의 이미지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라파엘로는 (조르조 바사리의 평가에 따르면) '우아, 근면, 아름다움, 겸손을 그리고 모든 부도덕과 결점을 상쇄할 만한 착한 성품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괴상한 성품의 천재들과는 거리가 먼 천재였던 셈이지요.
그런데 라파엘로의 천재성은 작품에 있어서도 다른 천재들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예컨대 특유의 구도와 스푸마토로 대표되는 명암법을 제시한 다빈치나 해부학적 완벽함에 치열한 인간 정신을 담아낸 미켈란젤로, 빛과 색채로 새로운 회화 기법을 완성한 티치아노와 같이 천재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혁신적 기법을 라파엘로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그림은 그 모든 것들의 종합입니다. 그것도 정말 아름다운 종합 말입니다. 라파엘로는 모나리자를 보고 다빈치를 연구했고, 이내 자신의 데생력이 부족하단 것을 깨닫고 미켈란젤로를 익혔으며, 베네치아 화파의 화려한 색채와 균형미를 배웠지요. 그리고 자신의 성품과도 같은 따스함과 평화로움까지 담아냅니다.
그 결과 라파엘로의 그림은 조화롭고 균형 잡혔으며, 우아하며 부드럽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적인 애정으로 가득하지요. 우리가 라파엘로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비교적 젊은, 39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움은 그를 더욱 그리워하는 이유가 되었지요. 나 역시 아름답고 선한 그의 자화상 앞에 서니, 어쩔 수 없이 로마 '판테온'에서 만났던 그의 무덤이 떠오릅니다.
다음으로 만날 수 있는, 통치자 초상화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과 당시 최고의 권력자이자 사촌 형제간의 가족 초상화인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와 루이지 데 로시>도 놓칠 수 없는 라파엘로의 명작들입니다. 특히 예술 후원자로서 교황의 모습을 부각하는 가족 초상화는 교황의 지적인 모습을 상징하기 위해 돋보기를 그리고 있는데 이는 후대 화가들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물들마다 각기 다른 격조의 붉은색 옷을 입혔는데, 이것 역시 고전주의 묘사력의 절정을 보여주죠. 이후, 이어지는 여러 편의 초상화들은 라파엘로의 천재성을 마음껏 느끼게 해주는 선물들입니다. 이렇게 한 자리에서 수많은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황홀할 따름입니다.
덧붙이는 글 | (8-6, 우피치미술관 6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