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한테 '잘못했어' 하고 말하기아이한테 "어머니가 잘못했어"나 "아버지가 잘못했어" 하고 말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사람이 살며 '잘'과 '잘못'은 따로 없지만, 아이더러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어른이 했다면, 아이가 한 말을 어른이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아서 말썽이 생겼다면, 이때에 어른은 서슴없이 스스럼없이 틀림없이 "잘못했어"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시골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을 도시로 마실을 가면 느닷없이 겪곤 한다. 이레쯤 앞서 도시에서 지하철을 타며 자동계단에 오르던 때였다. 여덟 살 큰아이는 자동계단이 제법 익숙하기도 하고 힘살도 많이 붙었으니 척척 올라탄다. 다섯 살 작은아이는 자동계단이 아직 익숙하지 않고 힘살도 적게 붙어서 아슬아슬하면서도 느리다.
작은아이가 겨우 자동계단에 올라타서 제자리를 잡고 서려 할 무렵 뒤에서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아이를 확 밀치고 바쁜 걸음을 놀리려 한다. 작은아이는 휘청거리며 넘어지려 했고, 나는 작은아이가 자동계단 벽에 부딪히지 않게 얼른 붙잡았다. 이러면서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다. "아저씨! 아이를 밀치고 지나가면 어떡해요!" "아니, 내가 언제 아이를 밀쳤어?" "코앞에서 아이를 밀치셨잖아요." "밀치지 않고 그냥 지나갔어." "어른한테는 밀치지 않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작은아이는 어른이 가볍게 치기만 해도 넘어져요. 이런 데서 밀쳐서 넘어지면 얼마나 크게 다치는지 모르세요?" "난 안 밀쳤다니까?"
늙수그레한 아저씨는 아이한테도 아이 어버이한테도 '잘못했다'라는 말을 끝까지 안 하고, 나를 밀고 바삐 위로 올라간다. '남을 밀고 앞질러 가기'가 온몸에 버릇으로 붙은 듯하다. 이런 사람한테는 아이도 다른 사람도 안 보이기 마련이다. 어쩌면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일는지 모르지.
아이한테 '잘못했어'나 '미안해' 하고 말할 줄 모르는 어른은, 어른 스스로 제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나는 선풍기를 쐬지 않는다여름마다 선풍기도 없이 보냈다. 땀이 흐를 만큼 더우면 찬물로 씻은 뒤 부채질을 했다. 올여름은 지난해 여름하고 대면 어느 만큼 더울까? 지난해가 더 더운지 올해가 더 더운지는 모른다. 다만, 우리 집 마당에서 나무가 해마다 더 키를 높이니, 지난해보다 올해가 한결 시원하다고 느낀다. 아무튼, 더운 날은 그야말로 더운 날이니, 그동안 안 쓰던 선풍기를 꺼내어 마루에 놓는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싶다. 씻는방 욕조에 찬물을 가득 받아 놓고 아이들더러 물놀이를 하라 하고는, 물놀이를 끝내고 마루나 방에서 놀 적에는 선풍기 바람을 쐬도록 한다.
작은아이는 선풍기를 '슈풍키'라고 말하면서 "내가 슈풍키 켤래."나 "내가 슈풍키 끌래." 하고 말한다. 그래, 네가 하렴. 네 놀이로 삼으렴. 이 선풍기 바람은 오로지 너희 것이란다. 그리고, 마당을 거쳐서 싱그러운 나무바람이 스며들어서 너희가 흘리는 땀을 씻기라고 노래를 부르렴.
키 많이 자랐네작은아이는 이제 까치발을 하지 않고도, 또 아버지나 누나더러 안아서 올려 달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우체국에 소포를 부치러 오면 작은아이는 건너편이 안 보인다면서 으앙거리거나 안아 달라고 했으나, 이제 작은아이는 살몃살몃 건너편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있으면 안쪽을 얼마든지 들여다볼 수 있겠지. 통장정리를 할 적에도 작은아이가 손을 뻗어서 잡아당길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을 보면서 야무지고 씩씩한 마음이 된다.
이 나무, 집에 가져가서 심을래네 식구가 해거름에 사뿐사뿐 마을길을 걷는다. 이때에 사름벼리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본다. 아마 오늘 누군가 부러뜨린 나뭇가지로구나 싶다. 거칠게 부러진, 아니 거칠게 찢어진 자국이 났다. "아버지, 이 나무는 뭐야?" "향나무야." "항나무?" "향나무." "향나무?" "응. 그런데 네가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어도 돼." "나, 이 나무 집에 가져가서 심을래."
아이들하고 마실을 다니다가 '길가로 많이 뻗어서 곧 잘릴 만하다 싶은' 탱자나무 가지를 내가 먼저 잘라서 뒤꼍에 심어 보기도 했고, 허리가 잘린 대나무를 주워서 심어 보기도 했으며, 이래저래 버려지거나 잘린 나무를 틈틈이 날라서 심곤 한다. 이 가운데 씩씩하게 살아나는 나무가 있고, 그만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
사름벼리가 알아채서 살뜰히 주워서 집으로 가져가서 심을 이 나무는 어떻게 될까? 볕이 골고루 잘 드는 자리를 골라서 심는다. 작은아이가 꽃삽으로 땅을 쪼다가 꽃삽을 아버지한테 넘긴다. 꽃삽으로 땅을 팔 수 있겠느냐만, 뭐 작은아이가 쓰던 꽃삽으로 깊이 파고 흙을 모아서 덮어 준다.
너 자라고 부르는 노래야큰아이가 여덟 돌을 꽉 채운 요즈막 잠자리에서 가만히 생각해 본다. 두 아이를 재우려고 자장노래를 한참 부르면서 생각하고, 자장노래를 그친 뒤 내 일을 하려고 옆방으로 조용히 빠져나오면서 생각한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좀처럼 잠을 자려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두 아이 사이에 누워서 노래를 부르면 그야말로 요새는 잠을 안 자려 한다. 아아, 이 아이들아, 아버지는 너희가 새근새근 고운 꿈을 가슴으로 품으면서 온몸으로 파란 거미줄을 그려서 아침에 새로운 숨결로 깨어나라고 북돋우려는 마음으로 자장노래를 부르는걸. 노래가 듣고 싶으면 아침이나 낮에 불러 달라고 해야지.
언젠가 큰아이가 아버지 노래를 들으려고 두 시간이나 잠자리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서 안 잔 적이 있다. 큰아이는 그날 키득 하고 웃었지만, 나는 참 힘들었다. 아이가 잠자리에서 뒤척이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때 노래를 그치고 고요히 있으니 큰아이는 바로 잠들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버지 노래를 듣겠다면서 안 자려고 한대서 노래를 안 부를 수 없다. 다만, 나는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잘 부르는' 사람조차 아니다. 아이들한테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서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 깜냥껏 갈고닦아서 들려준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들려준 노래 가운데 하나는 몇 만 번쯤 부른 노래이다. 한 해가 삼백예순닷새이고, 하루에 열 차례를 불렀으면 참말 여덟 해 동안 몇 만 번을 불렀다고 할 만하다.
오늘 밤에는 '시인과촌장' 노래 가운데 <숲>을 노랫말을 거의 다 바꾸어서 아이들한테 들려주었다. 우리 아이들이 이 시골마을에서 늘 누리는 숲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도록 이끌려는 생각을 새로운 노랫말로 담아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노래를 들려주면, 이 노래를 부르는 나 스스로 내 목소리에 온마음을 기울인다.
문득문득 깨닫는다. 노랫결이란 무엇인가 하고 깨닫는다. 내가 사랑을 실어서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저희 놀이를 멈춘다. 이때에는 내 몸이 찌르르 하고 떨리면서 아주 달콤하다. '달콤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곁님을 만나서 아이를 낳고 자장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 요즈막에 자주 느낀다. 하기는, 똥오줌기저귀를 날마다 마흔 장 남짓 빨래할 적에도 늘 느끼기는 했는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