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네 학교에서는 심폐소생술 시간에 선생님이 한 여학생에게 '홍콩 보내줄까'라고 물었대요. '홍콩 보내줄까'라는 말이 뭔지 우리도 다 알아요.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그 선생님이 아직도 학교에 계신다는 거예요."여고생 A(18)양이 아랫입술을 삐죽이며 토로했다. 황당함과 실망감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바로 앞 450여 객석도 야유 소리와 함께 술렁였다. 황당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A양은 이어 본인의 학교에서 벌어진 일도 털어놨다.
"후배네 반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40대 중후분의 남자선생님이 수업 중에 정말로 뜬금없이 '너희만한 아이와 사귀어 본 적이 있다, 서로 사랑해서 교제했는데 학생 부모님이 반대해 헤어졌다'라고 말했대요. 정말로 뜬금없이, 앞의 앉은 여학생들을 쓱 훑어본 뒤에요."경악하는 사회자와 달리 A양과 곁에 앉은 학생들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한 명씩 마이크를 건네받을 때마다 학교에서 겪은 불쾌한 일들을 망설임 없이 쏟아냈다. 치마를 입은 채 '엎드려뻗쳐'를 했다가 속옷을 내보인 기억, 단체 카톡방에서 같은 반 친구가 보란 듯이 야한 사진과 메시지를 올려 수치심을 받았던 일 등이었다.
수업시간·카톡방... 성폭력 늘어나는데 성교육은 '퇴보' 25일 오후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주관으로 열린 '대한민국 청소년 성교육 정책 바로세우기 대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한 고교생 5명은 위와 같은 학내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선 실용적이고 내실 있는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전국에서 온 학생들은 이날 열린 '십대들의 토크콘서트- 학교 내 성폭력과 성교육을 말하다'를 직접 기획하기도 했다.
먼저 B(18)양은 성폭력을 당해도 되돌아오는 '시선'이 두려워 대부분 함구하고 만다고 설명했다. B양은 "서대문 공립 고등학교 성폭력 사건에서도 일부 학생들이 오히려 가해 선생님의 편을 들면서 피해 학생들에게 또다시 피해를 줬다고 한다"면서 "이처럼 친구들 사이에 소문이 돌까 봐 어디에도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B양은 "제대로 된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학교 안에 '성 고충 상담실'만 만들어 두고 방치하는 게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교육과 함께 실제로 상담을 요청할 수 있는 공간 마련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는 "'성 고충'이라는 부정적 이름도 퀘스천(Question·질문)의 'Q'자를 따와 '큐센터'로 바꾸고, 전문 성 상담 선생님이 늘 계셨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학생들의 바람과 달리 올해 3월 교육부가 내놓은 '학교 성교육 표준안'은 기존보다 오히려 더 퇴보적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야동', '자위' 등 학생들이 주로 쓰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 청소년 성문화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데다 성행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비현실적으로 금욕을 강조해 성을 터부시하는 낡은 인식을 공고히 할 우려가 컸다.
뿐만 아니라 성차별적 인식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겨 논란이 됐다. 남성의 성적 욕망을 정당화하고, 이에 대한 여성의 적절한 대처가 중요하다고 반복적으로 서술해 마치 성폭력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한부모·동거·입양·비혼·성소수자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배제했다.
C(18)군은 먼저 "현실과 동떨어진 데다 오히려 학교가 성평등이 아닌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 같다"면서 "우리는 성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데 지금보다 더 보수적인 교육을 한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효과를 기대하고 그런 걸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평가했다.
D(18)양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D양은 "매년 비슷한 내용을 주입식으로 전달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고민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만약 연애가 주제라면 우리는 연애를 왜 하는지, 데이트 비용은 왜 꼭 남자가 내야 하는지 등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고민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일부 보수 학부모들 소란... "성문란" 호통한편 이날 토론회에는 일부 '불청객'이 등장해 소란을 피워 여러 차례 행사가 중단됐다.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에 반대하는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와 이견을 가진 학부모들이었다.
이들은 학생들의 발언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학생들은 성적 주체가 아니다", "성문화가 아니라 성문란이다" 등 고성을 질렀다. 급기야 "동성애는 죄악이다", "청소년을 이용하지 말라"며 울먹이는 중년여성도 있었다. 자리를 벗어나 학생들이 있는 연단으로 향하는 등 곳곳에서 소란을 멈추지 않자 결국엔 국회 경호원이 현장에 배치되기도 했다.
이들의 고성으로 여러 차례 행사가 중단되자 무대에 있던 학생들은 잠시 위축된 표정을 보였다. 방청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100여 명의 청소년들도 당황한 얼굴로 장내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분위기는 이내 반전됐다. 무대에서 한 학생이 "청소년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행사인데, 저희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소란을 피우는 분들이 계셔서 화가 난다"고 되받아치면서 부터다. 무대 아래 학생들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고성을 잠재웠다.
실제 현장에서 성교육을 담당하는 보건교사들도 이번 교육부 표준안에는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등 10개 단체로 구성된 '2015년 교육부 국가 수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 철회를 위한 연대회의'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국의 초·중·고 보건교사 207명 중 71%가 이번 표준안을 '학생들의 발달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내용' 혹은 '비현실적인 내용'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