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은 무더웠다. 거기에 메르스와 가뭄과 폭염으로 지역경제까지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래도 지역 오일장이라면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고,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나름 부지런히 찾았다.
두어달 동안 괴산오일장, 마석오일장, 횡성오일장, 둔내오일장, 설악오일장, 안성오일장, 모란오일장, 용문오일장, 청평오일장 등을 쏘다녔다. 두 번을 간 곳도 있으니 장돌뱅이는 아니지만 오일장을 제법 많이 들락거렸다.
여러 오일장 쇠락해가지만... 여기는 다르다
그러나 도심과 밀접하거나 교통이 편리하지 않은 경우라면 오일장은 한산했다. 모란오일장은 지하철까지 연결되어 가히 손꼽히는 오일장이다. 하지만, 대체로 몇몇 오일장을 제외하고는 쇠락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단순히 메르스나 가뭄이나 폭염 등의 여파만은 아닌 것 같았다. 오일장에 나오는 물건도 일반 식료품점이나 대형마트에서 사는 물건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서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최근 방문한 곳은 잇달아서 오일장인가 싶을 정도의 폐장 분위기였다. 오일장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명맥만 이어가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쇠락하게 된 것일까? 난전을 펼치고 있는 할머니들도 이젠 순박하지 않은 듯했고, 오일장에 나온 물건이나 시중에서 사는 물건이나 차별성도 없고, 그렇다고 가격이 더 저렴하지도 않고.... 뭐 이런 문제일까?
아무튼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상인들의 흥이 넘실거려야 할 오일장이 깊은 침묵에 가라앉은 듯 생기를 잃어버린 모습을 연달아 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오늘(8월 27일) 방문한 경기도 이천오일장도 그랬더라면, 차후에 오일장을 방문하는 일을 더는 진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천오일장은 초입부터 '오일장이 열렸구나!'하는 느낌이 확 다가올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오일장다운 장을 보겠구나 하는 설렘이었다. 이천오일장은 365일 상설 관고전통시장과 그 주변에서 2, 7일 자가 들어가는 날에 열리는 오일장이다.
시장통에 들어서자 '얼음막걸리와 메밀전'을 파는 곳이 보인다. 얼음막걸리 한 잔에 메밀전 한 장, 3천 원이면 텁텁한 목을 축이고 오일장을 기분좋게 휘휘 돌아볼 수 있다. 오일장은 물건을 사는 재미도 있고,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배를 채우고 군것질거리를 해대며 미주알고주알 처음 만난 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맛도 좋다.
참 이상하다. 오일장에서는 초면임에도 그리 낯설지 않다. 또 공통의 이야깃거리만 있다면 그냥저냥 아는 사람처럼 대화를 이어간다. 그게 오일장의 매력이겠다.
난전을 벌인 할머니들은 분주했다. 쉬지 않고 가져온 채소를 다듬고, 팔고, 함께 난전을 벌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이들이야말로 오일장의 꽃이라고 생각한다.
할머니들이 가져나온 물건들은 다 팔아도 몇만 원 안팍이다. 그 정도 세금과 관련 없이 장사를 한들 이 나라의 경제에 먹구름이 끼거나, 세금을 내고 장사를 하는 분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정도의 미덕은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황금알을 낳는 닭은 없었다
제법 규모가 큰 이들도 있다. 엄청나게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양과 다양한 종류, 저 정도면 시장에서 떼다 파는 것이 아닐까 의심할만도 하겠다. 그러나 사실, 농사를 져봤고, 어머니가 장에 나가 파는 것을 봐온 나로서는 저 정도는 농사짓는 분들에겐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모란시장에 갈 적에 가락시장 앞에서 버스를 타고 간 적이 있다. 한 할머니가 등에 잔뜩 짐을 지고, 채소가 가득 담긴 대형 비닐봉투를 양손에 들고 힘겹게 버스에 싣는다. 고령의 나이에 너무 안 되 보여 버스에 올려주었고, 마침 모란시장에서 내리길래 물건을 내려주었다. 그 이후에 드는 생각. '아 시장 어딘가에 난전을 펼치시겠구나'.
약간의 부정적인 난전에 대한 이미지, 그러나 또한 그런 삶의 치열함 앞에서 나는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애써 농사를 지어 용돈벌이라도 하고자 나온 분들을 의심하고 싶지도 않다.
동행한 아내는 오일장다운 분위기 때문인지 이것저것 살 것이 많다고 한다. 지난 오일장에 갔을 때, 내가 우겨서 올갱이를 샀는데 제법 맛이 있었는지 오늘은 아내가 올갱이를 사잖다.
지혜로운 쇼핑을 하기 위해서 점심을 먹고 오일장을 돌았음에도 올갱이를 위시해서, 아욱, 복숭아, 떡, 사과, 두부, 도라지 등을 샀다. 지역경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겠지?
오일장에 이렇게 사람들이 붐비는 이유는 무엇일까? 집에 돌아와 구글지도를 검색해 보니 관고전통시장(이천오일장) 주변에 대형마트가 없다. 어쩌면 이것이 해답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거의 폐장 분위기를 연출했던 오일장 근처엔 대형마트가 있거나 혹은 H마트가 있었다. 농민이 생산한 제품을 팔아주어 농민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마트가 오히려 지역경제를 죽여버리는 주범이 된 것이다.
오일장에 가지 않아도 지역의 소식을 다 들을 수 있는 시대, 현대식 매장에 가서 물건을 사면 집까지 배달해주는 시대, 혹여 물건에 이상이 있으면 반품도 바로 해주는 시대, 어쩌면 이런 현대적인 시스템이 오일장을 쇠락하게 하는 측면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거기에 오일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 느낌은 아무리 해도 덧붙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 장에서는 신기한 것을 보았다. 바로 '황금알'이다. 둔내오일장에서 '청란'의 존재를 알고 무척이나 신기해 한 적이 있었는데, 이천오일장에서는 황금알이 나를 놀라게 한다. 참숯란(검은색)과 같은 과정으로 만든다고 하는데 참숯란의 효능과 같다고 한다.
"황금알이 있으면 황금알을 낳는 닭도 있는겨?"그럴리가.
왜 장에 나왔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대충 살지 않고 땀흘리며 열심히 살아가는가? 그리고 떼돈을 벌지 못해도, 황금알을 낳는 닭을 가지지 못했어도 왜 끊임없이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면 천박하다고 타박할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솔직하고 소박하게 번 돈은 거룩한 돈이다. 그리고 오일장에서 '콩나물값 얼마를 깎네 어쩌네'하는 말에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런 게 사람 사는 거다. 그냥 뭉텅뭉텅 큰 돈 버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안 깎아도 그만이고 없어도 되는 것을 깎는 것이 밉상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밀당을 즐길 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밉상이다.
이천오일장, 오랜만에 오일장다운 오일장을 만났다. 도심에서도 제법 멀어서 난전을 벌인 이들의 채소도 믿을 만했으며, 그 무엇보다도 시장이 북적여서 편안하게 사진을 담을 수 있어 좋았다.
덧붙이는 글 | 이천오일장이 열리는 관고전통시장은 365일 상설시장이며, 2,7일이 들어가는 날은 이천오일장이 함께 열립니다. 8월 27일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