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고향, '아시시(Assisi)'로 향하는 기차. '레지오날레'로 불리는 완행 열차는 나타나는 모든 역에 정차하며 느릿느릿 토스카나의 평원을 지나 움브리아 지방으로 향합니다. 비가 내리려는 듯 잔뜩 찌푸린 날씨. 나는 정경화가 연주하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을 들으며 초겨울의 이탈리아를 느끼고 있습니다.
미술 기행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이탈리아에 온 지 이제 열흘째. 아직 남은 날이 더 많지만, 나는 시간의 흐름을 느낍니다. 1분 1초가 내 몸을 휘감고 지날 때마다 붙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과 '왜 이제야 왔을까'하는 후회도 밀려옵니다. 하루 하루 아니 매 시간마다 쉴 사이 없이 느꼈던 전율의 순간들. 마치 신병이라도 앓은 듯 주체할 수없이 쏟아졌던 감동의 눈물들. 이 모든 것이 내 삶에서 마지막이 아니길 기도해 봅니다.
피렌체에서 아시시까지는 2시간 30분. 차창 밖으로는 흐린 날씨가 오히려 움브리아 지방의 평원을 신비롭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나는 텅 빈 객차 안에서 맞은편 좌석으로 다리도 뻗고,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으로 아이패드로 글도 쓰고,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도 넘겨보며 기차 여행을 즐깁니다. 그러다 문득,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거대한 '트라시메노 호수'가 물안개를 피워내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 아시시그리고 얼마 후, 페루자라는 대도시를 지나 세 번째 역이 바로 아시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아시시는 역에서 10분 정도 더 버스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눈앞에 성벽과 함께 '페트로 성문'이 나타납니다. 아담한 성문을 지나 왼쪽 오르막길로 오르니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성곽도시 아시시의 예쁜 길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나타나는 '산 프란치스코 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이름 그대로 성 프란치스코를 기리며 그의 유해와 유품을 안치한 곳입니다.
세계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 사상 처음으로 교황의 호칭을 '프란치스코'로 칭하면서 더 조명을 받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 나는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윌리엄 수사를 통해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처음 접했고 이후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공부하면서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피렌체 외곽의 일정 중에서 놓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 아시시였습니다.
성당 입구에선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이 모여서 무언가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성당에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경건한 마음으로 성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탈리아에서 와서 수많은 미술 작품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던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중학교 시절 읽었던 토마스 불빈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흑백 사진으로 접했던 '아폴론과 다프네'의 조각상을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보았을 때, 의외의 장소에서 브뤼헬의 그림들을 만났을 때, 오르비에토에서 루카 시뇨렐리의 <최후의 심판>을 보았을 때, 그리고 숨쉬기도 힘들었던, '우피치 미술관'에서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다빈치, 라파엘로를 보았을 때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의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나는 다른 어떤 예술 작품보다 더한 감동을 이곳 '산 프란치스코 성당'의 지하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때문입니다.
전에도 몇 번 말했듯이 나는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기도 하지만, 종교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계획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장식도 없이 소박한 벽돌 벽으로 꾸며진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 그 스스로 누구보다도 청빈한 삶을 살았으며 또 어떤 권력자 앞에서도, 심지어 교황 앞에서도 당당했던 성 프란치스코. 여성을 위한 최초의 수도회와 속세인들을 위한 수도회도 만들었던 성 프란치스코. 늘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했던 성 프란치스코. 생전, 예수의 환생이라고 일컬어졌던 그,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 눈물은 그런 백과사전적 지식에서 연유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마치 가톨릭 신자가 된 것처럼 무릎을 꿇고 그의 기도문을 계속해서 읊었습니다.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게 하소서. 위로를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나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위한 기도' |
이 기도문은 원래 20세기 초 프랑스 한 지방의 가톨릭 잡지에 실렸던 것입니다. 이후 바티칸에서 이 기도문을 성 프란치스코의 이미지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죠. 원작자가 누구이든, 사랑과 평화를 염원했던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또한 누구에게나 울림을 주는 보편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쉬운 문장으로 사회와 역사, 일상의 현실에서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지침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종교를 뛰어넘는 명문(名文)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은 하염 없이 흐르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짐을 느낍니다. 며칠 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처럼 다시 고은 시인이 시 <눈길>을 떠올립니다. '설레는 평화'! 낯선 이 땅,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나는 마치 '내 마음 속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을 본 것 같은 평화를 얻었습니다. 이것으로 아시시로의 여행은 모든 것이 완성된 셈입니다. 이후 여정은 그 '설레는 평화'를 지속해가는 덤일 뿐입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본당이기도 한 '산 프란치스코 성당'은 크게 두 층으로 이뤄져 있는데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이 있는 하층 성당 위에 본 성당이 있습니다. 본 성당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을 그린 지오토의 프레스코 연작이 있습니다.
고딕 양식의 끝자락에서 르네상스 미술의 시원을 개척한 지오토. 그의 손에 의해 그려진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하나씩 짚어보니 또다시 전율이 일어납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던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의 '환시(幻視)' 체험을 통해 '회심(回心)'해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모든 재산과 특권을 포기한 그는 낡고 해진 옷에 지팡이도 없이 맨발로 돌아다니며 복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 회개하라고 사람들에게 설교했으며 구걸로 연명하죠.
사제 서품을 받지 않았던 그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신과 함께 하는 이들과 '작은 형제회'라는 공동체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11명의 수도자와 함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찾아가 수도회의 승인을 신청하는데, 교황은 처음엔 회칙과 생활 방식이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엄격해서 인준을 유보합니다.
그런데 교황은 쓰러져가는 교회를 가난한 수도자가 짊어지고 있는 꿈을 꾼 후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죠. 이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이어 여성을 위한 수도회와 세속인들을 위한 수도회를 만든 성 프란치스코는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며 여러 곳에서 고행과 설교의 삶을 살다가 1226년 죽음을 맞이했고 그로부터 2년 후 '시성(諡聖)'됩니다.
가톨릭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성인그로부터 8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2013년, 소박하고 평범한 생활과 정의로운 행동으로 존경받던 아르헨티나의 추기경,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그때 나에게 '가난한 사람'이란 말이 참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떠올렸죠. 나에게 있어 그는 가난과 평화,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대변인이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교황의 호칭을 '프란치스코'로 정하게 됩니다. 가톨릭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성인,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교황이 탄생한 것이지요.
스승인 치마부에의 손에 이끌려 성당 벽화 작업에 참여하게 된 지오토의 프레스코 연작은 이런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제 인물과 건물들, 그 시대의 옷차림과 풍습까지. 지오토의 작업은 중세 이후 당대인들의 모습을 재현한 거의 최초의 그림입니다. 물론 리얼리즘이 워낙 익숙한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그다지 훌륭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비잔틴과 고딕이라는 엄숙한 중세 양식에 익숙해 있던 당대 사람들의 눈에는 혁명적일 만큼 사실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지오토는 이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 작업 이후 이탈리아 전체에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그리고 시대나 양식으로 분류되던 미술사가 지오토 이후로는 화가와 작품을 중심으로 서술되게 되죠. 서양 회화사의 기준이 지오토가 되는 순간이 바로 이 <성 프란치스코의 일생> 프레스코 연작인 셈입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꿈을 꾼 후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승인하는 장면과 함께 성 프란치스코가 새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원래도 유명하지만 나에게도 깊은 감명을 줍니다. 몇몇 수사와 함께 길을 걷던 성 프란치스코는 우연히 도로 양 옆에 있는 나무 위에 수많은 새가 가득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동료 수사들에게 "제가 저의 자매들인 새들에게 설교하러 가는 동안 잠시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새들에게 가서 설교를 했죠. 그러자 새들이 성 프란치스코 주위로 날아와서는 설교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마리도 날아가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성 프란치스코의 사랑과 평화의 정신이 가난한 이들과 인류를 넘어서 다른 자연 대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화이지요. 그래서, 1979년 20세기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프란치스코를 생태계와 자연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던 프란치스코는 동식물과 자연, 심지어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 등 모든 자연물의 명예를 드높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신을 찬양하도록 하였다. 아시시의 빈자(貧者)는 우리가 신과의 평화 속에 머무르면, 다른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과도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혁명적인 가르침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1990년 세계 평화의 날을 축원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메시지 중)떨리는 가슴으로 지오토의 프레스코 연작을 몇 번이나 돌아보고는 '산 프란치스코 성당'을 나옵니다. 그랬더니 넓은 연무에 뒤덮인 움브리아 평원을 바라보고 있는 한 수녀님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더 할 수 없는 마음의 평온을 얻은 나는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아시시 이곳저곳을 천천히 걷습니다.
아시시의 중심인 '코무네 광장(Piazza del Comune)'과 '미네르바 신전(Tempio di Minerva)'을 지나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로서 여성을 위한 '클라라 수도회'를 설립한 성녀 키아라(혹은 산 클라라)를 기리는 '산타 키아라 성당(Basilica di Santa Chiara)', 아시시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산 루피노 성당(Cathedral of San Rufino)'을 지나 아시시의 가장 높은 곳, '로카 마조레(Rocca Maggiore)'로 향합니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요새, '로카 마조레'에 오르니 정결한 아시시 시내와 그 아래 펼쳐져 있는 넓디넓은 움브리아 평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흐린 날씨 때문에 옅은 구름이 평원을 뒤덮고 있습니다. '설레는 평화' 그것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이 풍경과 내 마음을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11편, 사탑의 도시 피사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