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있어서 시끌시끌합니다. 큰아이와 작은아이 둘이 있는 보금자리는 두 아이가 내는 노래가 가득 흐르면서 북적입니다. 아이들은 얌전하게 놀지 않습니다. 아니, 아이들은 조용히 놀지 않습니다. 언제나 마루를 쿵쿵 울리면서 뛰고 마음껏 소리를 지르면서 놉니다. 마당에서도 마루에서도 고샅에서도 그야말로 온몸으로 외치고 노래하면서 놀아요.
그러고 보면, 마을마다 아이들이 넘치던 지난날에는 아이들이 노는 소리로도 언제나 시끌시끌했습니다. 도시도 시골도 똑같아요. 아이들은 도시에서도 골목을 가득 메우면서 놀고, 시골에서도 들이나 숲이나 냇가나 고샅을 가득 메우면서 놉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골목이나 마당에서 일합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어른들은 흥얼흥얼 일노래를 부르면서 빙그레 웃음을 지어요.
'예전에는 긴타로밖에 없어서 조용했는데! 지금은 하루도 있고, 많이 시끌벅적해졌지. 긴타로는 조용한 게 좋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 전보다 덜 쓸쓸해 보이는 것 같아. 훨씬 더 전에는 어땠을까?' (본문 22쪽 중)"나는 깨달았어. '본산은 모두의 것이지 내 신사가 아니다. 그리고 산의 바깥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지금의 인간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 이대로 산과 하나가 되어 버려도 괜찮은 걸까' 하고 말이야. 나는 본산을 떠나 내 신사를 찾으면서, 세상을 두루두루 돌아보기로 했어." (본문 28쪽 중)
오치아이 사요리님이 빚은 만화책 <은여우> 아홉째 권을 읽으며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조용한 삶 터는 조용한 대로 아름답습니다. 시끌벅적한 삶 터는 시끌벅적한 대로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뛰노는 모습이 성가시거나 싫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른이 된 사람'은 누구나 아기 적이나 아이 적에 신나게 뒹굴거나 뛰놀았기 마련입니다.
무서운 어버이가 매섭게 다그친 탓에 제대로 뛰놀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텐데, 어버이가 따스하고 보드랍게 어루만지면서 돌보면 어떤 아이라도 신나게 뒹굴거나 뛰놀아요. 아이는 모름지기 실컷 뛰고 달리고 뒹굴고 날면서 온몸이 튼튼하게 자라니까요.
그러고 보면, 시골은 아이들이 없어서 조용합니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없으니 시골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도 사람 목소리로 와글거리지 않기 일쑤예요.
도시 아이들은 뛰놀 빈터가 없거나 학원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는 아이들이 많아도 빈터마다 자동차가 차지합니다. 자동차가 빈터에 서지 않더라도 찻길을 싱싱 달리는 자동차가 워낙 많아서 아슬아슬합니다. 연을 날릴 만한 빈터는커녕, 딱지를 치거나 팽이를 돌릴 만한 빈터조차 찾기 어려워요.
일본 신사를 물려받은 아이들, <은여우>
'조용한 신사도, 즐거운 신사도, 나는 좋아. 정말로, 신의 사자가 보여서 행복해.' (본문 38∼39쪽 중)"우리 가게를 이어가는 게 꿈이니까, 일부러 멀리 돌아갈 필요 없잖아." (본문 69쪽 중)만화책 <은여우>는 '일본 신사'를 물려받은 두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끕니다. '일본 신사'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시달린 '신사 참배'가 떠오릅니다. 제국주의 권력은 이웃 나라를 총칼로 쳐들어가면서 '일본 문화와 역사와 사회와 종교'를 억지로 심으려고 했습니다. 한국 곳곳에 일본 신사가 섰고, 퍽 오랫동안 한국 어린이와 어른은 신사에 가서 억지로 절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제국주의 권력은 일본에서도 모든 일본사람이 신사에 가서 절을 하게 시켰을 테지요. 일본에서도 '신사 참배'를 안 하다가 따돌림받거나 시달린 사람이 꽤 많겠지요.
제국주의 권력이 총칼을 앞세울 적에는 언제나 제 나라부터 윽박질러서 길들입니다. 이윽고 이웃 나라로 총부리를 돌리면서 '거짓 충성'에 사람들이 휩쓸리도록 내몹니다. '일본 신사'는 바로 사람들이 '거짓 충성'에 휩쓸리도록 북돋운 구실을 톡톡히 맡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일본 신사를 물려받는 아이들이 나오는 만화책이 한국말로 나옵니다. 한국하고 일본 사이에 앙금이 모두 풀렸기 때문이라기보다, 권력에 빌붙는 이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이 권력에 빌붙고, 수수하게 삶을 짓는 이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수수하게 삶을 지어요.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먼 옛날부터 제 고장(고향 마을)에서 조용하게 삶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일군 어버이'를 사랑합니다. 종교나 강요로 말하는 '일본 신사'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과 같은 숨결을 헤아리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괜찮여, 괜찮여, 둘 다 잘못 없당께!", "그려, 그려, 모처럼 만났는디.", "착하구먼. 둘 다 참말로 착혀.", "오늘은 좋은 날이여. 이렇게 좋은 아이를 둘이나 만났응께.", "참말로 좋은 날이여." (본문 161쪽 중)"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까요? 어째서 궁사님은 신이나 신의 사자가 보이지 않는데도 믿으실 수 있죠?", "글쎄요,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과 없는 건 다르니까요." (본문 173쪽 중)
한국에도 있었을 마을 지킴이
곰곰이 돌아보면, 한국에서는 서낭당이 거의 모두 무너졌습니다. 예부터 한국에서도 마을마다 '마을 지킴이'가 있고, 집마다 '집 지킴이'가 있어요. 그런데, 이 모든 지킴이는 깡그리 무너지거나 내쫓기거나 사라져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모질게 짓밟히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한국전쟁을 거치고 새마을운동 바람이 휩쓸면서 그야말로 몽땅 무너졌다고 할 만합니다.
만화책 <은여우>에서 '수백 해에 걸쳐서 작은 절집(신사)을 지켜 주는 은여우'가 나온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크고 작은 고장에 마을마다 두고두고 우리 고장이랑 마을을 돌보던 지킴이가 있고 도깨비가 있을 테지요.
우리는 어떤 지킴이를 섬기면서 이웃을 어떤 마음으로 아꼈을까요?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마음속으로 품으면서 이웃을 어떤 사랑으로 보살폈을까요?
"그건 그것대로 그때마다 배워 나가면 되는겨. 남은 인생도 아직 길잖여. 우리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 편잉께." (177쪽)아침부터 저녁까지 시끌시끌하게 노는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어버이는 이 아이들한테 따사로운 지킴이 구실을 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를 마음으로 따르고, 어버이는 아이들을 마음으로 아낍니다.
우리가 사는 조촐한 시골집에는 수많은 풀벌레가 하루 내내 노래하고, 온갖 멧새가 꾸준히 찾아듭니다. 철 따라 드나들던 많은 새는 이제 찬바람이 썰렁하니까 자취를 감춥니다. 나락이 천천히 익고, 들바람 결이 바뀝니다.
우리 마을 지킴이는 어디에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집을 지키고 곳간을 지키며 뒷간을 지키고 문간을 지키며 부엌이랑 밭 자락을 지키던 넋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서낭당은 사라져야 했어도, 우리 마을을 지키는 숨결은 사라지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깊은 밤에도 밝은 낮에도, 우리가 이곳에서 즐겁고 씩씩하게 살림을 가꿀 수 있도록 지켜보면서 흐뭇하게 웃으리라 느낍니다.
늦여름에 그야말로 느지막하게 깨어난 나비들이 우리 집 호박꽃이며 고들빼기꽃이며 모시 꽃이며 부추꽃이며 쇠무릎꽃이며 바삐 드나듭니다. 나비 한 마디도 따사로운 지킴이일 테지요? 나도 이 작은 나비를 따사로이 바라보는 지킴이로 이곳에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은여우 9>(오치아이 사요리 글·그림/ 강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 2015.7.31.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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