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정확히 80년 전인 1935년 9월. 당시 음반업계의 새로운 강자로 급성장하고 있던 오케(Okeh)레코드에서 야심찬 신작을 하나 발표했다. 여덟 달의 공모, 제작 과정을 거쳐 나온 그 노래는 바로 <목포의 눈물>. 당시 열아홉 살이던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이 불렀다.
<목포의 눈물>의 역사는 1935년 1월 오케레코드에서 향토 노래를 현상 모집한 데에서 시작했다. 10대 도시 찬가의 가사를 공모한 결과, 평양과 부산 그리고 목포 노래가 최종 당선되었고, 오케레코드 전속 작곡가들이 거기에 곡을 붙여 8월부터 발매가 시작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8월 <부산 노래>에 이어 발표된 두 번째 곡이었다.
이후 <목포의 눈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두가 잘 아는 바이다. 특정 도시나 지역의 정서를 대변하는 정도를 뛰어넘어 한국 대중음악 100년 역사에서 손꼽히는 고전이 되었고, 영화나 뮤지컬 같은 여타 장르 소재로도 활용이 되었다. 이미 1969년에 대중가요로서는 최초로 노래비가 세워진 것도 <목포의 눈물>의 그런 의미가 인정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목포의 눈물>은 2014년 6월에 열린 '한국 대중가요 고전 33선' 전시에서도 <황성 옛터> <타향살이> 등과 함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 선정된 작품이었는데, 당시 전시를 기획했던 옛 가요 사랑모임 '유정천리'(회장 이동순)에서 이번 <목포의 눈물> 80년 역사를 집대성하는 기념 음반을 제작했다. 지난 4월 이난영 타계 50주년 기념 행사 이후 진행해 온 작업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기념 음반에는 모두 17곡이 수록되어 있다. 1935년 첫 발표 이후 1965년 이난영 타계 전까지의 다양한 <목포의 눈물> 15곡에 이난영 타계 이후에 발표되기는 했지만 남다른 의미가 있는 2곡을 더했다. 이난영이 직접 부른 곡이 여덟, 다른 가수가 부른 곡이 넷, 노래 없는 연주곡이 다섯이다. 1965년 이전 <목포의 눈물>로 확인은 되었으나 음원을 확보하지 못한 곡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노래 한 곡의 역사적 음원을 이 정도로 모아 정리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난영이 직접 부른 8곡 <목포의 눈물> 중에는 1935년 초판은 물론, 일본에서 발표한 1936년 판, 1957년 라디오 실황, 1961년(?) 공연 실황 등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울먹이면서 부른 라디오 실황 녹음은, 곡절 많았던 이난영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절창 중의 절창으로 꼽힌다.
다른 가수가 부른 <목포의 눈물> 중에서는 일본 가수 스가와라 쓰즈코가 1955년에 발표한 일본어 곡, 김시스터즈가 1970년에 녹음한 추모곡이 눈길을 끈다. 이난영의 딸 둘과 조카로 구성된 3인조 그룹 김시스터즈는 명실상부한 한류와 걸그룹의 원조로 꼽히고 있는데, 1970년에 11년 만의 귀국 공연을 하면서 어머니이자 고모인 이난영 추모 음반을 발표했고, 그 머릿곡으로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가사로 식민지 조선의 민족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하면서, 한편으로는 검열 통과를 위해 그 가사를 비틀어 표기했던 노래.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주류 장르인 이른바 '트로트'의 양식 전형을 확립한 노래. 그리고 이제는 근대적 지역 전통의 가능성까지 평가받고 있는 노래. 모두가 <목포의 눈물>이 품고 있는 80년 역사 마디마디에 서린 이야기들이다.
유정천리에서는 당초 회원용으로 소량 제작한 이번 기념 음반을 옛 가요 연구자나 애호가들에게도 일부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내년에 탄생 100주년이 되는 이난영의 전집 음반 제작도 기념 음반의 성과를 검토해 추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