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태랑>이 천만 관객을 목전에 두고 있다. 영화는 호쾌한 길거리 액션과 떠들썩한 슬랩스틱으로 장르적 쾌감을 방출한다. 뿐만 아니라, 재벌 2세의 파렴치한 행각을 고발함으로써 사회비판의 역할을 수행한다.
<베테랑>이 보여주는 재벌의 실상
영화는 재벌 2세 조태오를 중심으로 재벌이 어떤 조직인지 보여준다. 첫째, 재벌은 회장의 검찰 조사가 보여주듯이 불법이 만성화된 조직이며, 검찰간부 출신의 법률고문단과 법무팀을 통해 온갖 불법을 합법으로 위장한다. 둘째, 가족이 소유권을 나눠 먹는 족벌체제와 혈연적 위계질서로 권력이 재편되어 있다. 셋째, 조태오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일반직원들의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하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임원들이 기저귀를 차고 들어갈 정도로 권위적인 조직문화가 팽배하다. 넷째, 회장은 집무실에서 임원에게 골프채로 '빳따'를 치고, 조태오는 걸핏하면 집기를 때려 부수는 등 폭력이 만연하다.
영화는 조태오가 본사 앞에서 하청업체로부터 떼인 임금 420만 원을 지불하라며 1인 시위를 벌이던 배기사를 자기 사무실로 끌고 가 어떤 모욕을 퍼부으며 돈의 힘을 과시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직접적으로 어떤 사건을 지시한다. 2010년 7월 SK그룹 창업주의 조카 최철원은 인수합병 과정에서 화물연대 소속이란 이유로 계약해지 당한 탱크로리 노동자 유홍준씨가 SK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자, 자기 집무실로 불러 주먹과 야구방망이로 구타하고 2000만 원을 집어주었다. 이른바 '맷값 폭행'사건으로, 당시 보도는 최철원이 평소에도 자기 직원들에게 삽자루와 골프채로 폭행하고, 사냥개로 여직원을 위협했다고 전했다.
영화는 다시 항의하러 간 배기사를 조태오가 직접 폭행해 사고가 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설마 재벌 2세가 직접 노동자를 폭행했을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2007년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을 환기시킨다. 한화의 김승연 회장은 아들이 유흥업소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상처를 입은 데 격분해, 자신이 직접 경호원과 조폭을 데리고 가 술집 종업원들을 산으로 끌고 다니며 폭행했다. 당시 김승연 회장은 권투 펀치를 흉내 내가며 폭행을 재연해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실제 사건들은 재벌의 조직문화가 조직폭력배의 문화와 별 차이가 없음을 알려준다. 영화는 이러한 사건들을 버무려, 패륜적인 폭력을 가하는 재벌들의 비틀린 행태를 고발한다.
영화는 조태오가 직원들을 돈으로 입막음하고, 인맥을 동원해 경찰·검찰에 외압을 행사하고, 광고로 언론을 통제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맥과 돈과 자리로 얽혀 있는 세계에서 재벌은 사회를 손에 넣고 주무르며, 자신들의 경호 인력을 통해 공권력의 행사를 막는다. 영화 속 경찰을 막아서는 경호 인력들의 모습은 흡사 사극에 등장하는 사병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영화는 완전히 묻힐 뻔한 진실이 서도철의 끈질긴 탐문과 조태오의 무리수로 인해 마침내 세상에 낱낱이 까발려지는 모습을 통쾌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현실영화는 조태오가 기소되는 것에서 끝나지만, 현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철원은 2010년 10월에 구속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지만, 2011년 4월 항소심 첫 공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피해자와 합의했고 사회적 지탄을 받은 점 등을 고려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에 앞서 2011년 3월 검찰은 피해자인 유씨가 SK본사 앞에 화물차를 주차하고 1인 시위를 한 것이 업무방해 및 일반교통방해에 해당한다며 기소했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박철 부장검사는 9월에 검찰을 나와, 4달 후 SK건설의 전무급인 '윤리경영총괄' 자리에 임용된다. 피해자 유씨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뒷이야기는 영화가 미처 전달하지 못한 현실의 잔혹함에 주목하게 한다. 영화가 아무리 막장이어도 현실은 더 막장이고, 영화가 보여주는 사필귀정의 쾌감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동안 수많은 TV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재벌이 재현되어 왔다. <하녀>, <돈의 맛>, <추적자>, <황금의 제국>, <시크릿 가든>, <풍문으로 들었소>, <가면>, <상류사회> 등등. 자신을 대통령도 만들 수 있는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회장님부터, 고상한 귀족 코스프레에 빠진 허당 사모님, 거만하지만 달달한 로맨티스트 왕자님까지. 관객들은 이들을 보면서 때로는 위압감을 느끼며 환호하고, 때로는 선망하거나 냉소하고, 또 때로는 사랑에 빠진다. <베테랑>은 여기에 실제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파락호 약쟁이'를 추가하여 즉각적인 공분과 카타르시스를 끌어낸다. <베테랑>은 대한민국의 재벌은 많은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 같은 최소한의 체면이나 위선도 갖추지 못한 천박한 존재들임을 적절하게 폭로한다. 그러나 그들이 천박한지 우아한지는 재벌의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가령 재벌 2세가 조태오 같은 파락호인 것은 문제이고,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 같은 왕자님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
재벌의 캐릭터보다 더 중요한 것
재벌의 캐릭터가 선한지 악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롯데그룹 경영권 승계 다툼을 예로 들자면, 신동빈이냐 신동주냐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연 100조의 매출을 올리는 롯데그룹의 지배구조를 따져보면 최상위에 롯데홀딩스라는 일본 투자회사가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그 회사의 상당지분을 광윤사라는 일본의 인쇄기업이 가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이처럼 불가사의한 지배구조를 통해 신씨(혹은 시게마스) 일가는 불과 몇 퍼센트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며, 한일 양국에서 외국 기업으로 특혜를 받아가며 족벌로 경영해 왔다.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 약 35만 명이 롯데그룹에 고용되어 있다. 그러나 괴상한 순환출자방식에 의해 그룹의 소유와 경영은 온전히 신씨 일가의 것 인양 사유화되어 있다. 언론은 롯데그룹 후계 다툼을 '왕자의 난'이란 제목을 붙여 막장드라마처럼 중계한다. 시청자들은 TV에 비친 신씨 일가의 어눌한 한국말을 조롱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겉모습이나 한국어 능력이 아니다. 왜 35만 명이나 고용한 대기업이 한 가족의 소유인양 인식되고, 그들의 상속권 다툼을 '왕자의 난'으로 부르며 그들의 소유권을 당연시하는 지를 물어야 한다.
국내 재계 서열 5위인 대기업이 어떠한 사회적인 통제도 받지 않은 채, 그들만의 순환지배구조를 통해 신씨 일가의 사적 소유로 인정받고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본래 주식회사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있으며, 창업주라 할지라도 소유한 주식을 통해 의결권을 행사할 뿐이다. 그러나 한국의 재벌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지 않으며, 기형적인 순환출자 방식을 통해 기업을 일가가 소유하고, 족벌경영을 당연시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재벌은 개인의 인격으로 이미지화된다. 왕이거나 왕자님이거나, 폭군이거나 로맨티스트이거나. 다시 묻는다. <베테랑>의 조태오면 문제고,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이면 괜찮은가. 한국말을 못하는 신동빈은 문제이고, 한국말을 잘하는 이재용은 괜찮은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황진미 님은 문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월간 <참여사회>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