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앞에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메모하고 있는데 또다시 전깃불이 나갔다. 배터리 충전이 되질 않는 구형 노트북이 '픽'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북인도 코사니는 하루에도 수차례, 툭하면 전기가 들어왔다가 나갔다 반복한다. 이제 잦은 정전에 익숙해져 있다.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요란하게 들이닥쳤던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도 그쳤다. 별빛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뿐이라는 절대고독이 엄습해 온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전깃불이 들어온다. 그리고 30분도 채 안 돼 다시 정전이다. 자정을 넘어서고 있지만 여전히 잠이 오질 않는다.
불면증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인도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하고부터였다. 이혼을 요구하고 있는 아내에 대한 갈등 때문이었다. 땀 뻘뻘 흘려가며 생판 낯선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몸 하나 챙기기 버거웠기에 그녀를 어느 정도 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일이 있었다. 자급자족을 위해 천 평이 넘는 농사를 지었고 틈틈이 글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갱년기 증세가 심해지면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화를 냈다.
집을 나서기 전까지 그녀는 '성격이 맞지 않아 못 살겠다'며 1년 내내 화를 냈다.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의 불을 지피곤 했다. 그 분노의 불꽃은 나를 태워버릴 듯이 달려들었다. 그녀를 향한 분노의 불꽃은 결국 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었다.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나는 거기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인도에 와서 또다시 그 분노의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나를 삼켜 버릴 듯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드는 분노와 함께 찾아온 불면증이 벌써 일주일을 넘어서고 있었다. 내내 불면증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붙이고 다시 눈을 뜬다.
이른 새벽이다. 침낭에서 빠져나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산책길을 나선다. 어젯밤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린 덕분에 오늘도 산 아랫마을은 온통 안개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내가 머물렀던 4월 초순~5월 초순의 북인도 코사니에서는 일주일에 두세 차례 느닷없이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저 멀리 히말라야 설산 난다데비에는 눈이 내려 좀 더 맑은 설산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고 코사니 산 아랫마을은 온통 안개구름에 뒤덮이곤 했다.
눈앞으로 삼삼하게 펼쳐진 산책길을 걷다 보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구름 위를 산책하고 있다는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으로 생각 없이 걷다 보면 그녀에 대한 지난밤의 악몽들은 어느 순간 뇌리에서 사라져 버린다.
언덕 위에 자리한 집 난간에서 어린아이가 바지를 까 내리고 오줌을 누고 있다. 그 아래로 안개구름이 자욱하게 깔렸다. 녀석이 사진기를 들이대고 있는 나를 보더니 계면쩍게 웃는다. 내가 손을 흔들어 주자 앙증맞게 몸을 비틀더니 집안으로 사라진다.
길을 벗어나 안개구름 아래로 내려선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안개구름은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안개구름에 갇혀 있는 나는 어리석게도 주변에 깔린 안개구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구름 속 대자연의 풍경
안개구름 속에 가만히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속으로 저만치 히말라야 설산과 운해에 뒤덮인 산들이 부드럽거나 장엄한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처럼 다가온다.
저 대자연 침묵의 연주 소리를 들어가며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나 자신과 마주 본다. 밤만 되면 그녀에 대한 분노에 얽매여 몸과 마음을 옴짝달싹 못하는 나를 바로 본다.
저 대자연이 장엄한 오케스트라라면 자연의 일부인 인간인 나는 하나의 악기다. 그 악기를 가장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데도 나는 평화로운 연주는 고사하고 악기의 줄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늘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그 불협화음에 악기의 줄을 끊어 버리려 화를 내고 있었다.
성인들은 인간이라는 악기를 가장 아름답게 연주하는 지휘자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아내와 더불어 그 지휘자의 몸짓에 따라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성인들의 지휘, 성인들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버거워 했다.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성인들의 말씀들을 내 자신에 맞는 상을 만들어 놓고 그녀에게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물질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내세워 스스로 진보주의자라 자처해가며 그녀를 사람보다는 물질에 의존하는 보수주의자로 몰아붙였는지도 모른다.
자비심을 품은 부처의 마음이라 단정하는 순간, 그것은 부처의 마음이 아닌 나의 주관적인 마음자리가 되고 만다. 내가 만들어낸 부처의 상에 의존하게 된다. 그 상을 깨뜨리지 못하면 부처의 마음자리에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듯이 진보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만들어 놓은 진보라는 상을 만들어 그 틀에 갇혀 있었다.
그런 어리석은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만다. 그녀는 어리석음을 반성해가며 무릎 꿇었던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혼을 내세워 가며 모든 것을 파국으로 몰아갔다. 나는 그런 그녀에 대해 분노했다. 나를 고통 속에 빠뜨린 그녀를 용서했다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었지만 나 또한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중품이 들어있는 전대를 놓고 오다니...
올드 코사니 깊숙이 걸어 들어 갈수록 꿈에서조차 느낄 수 없는 황홀한 운해가 전신을 흔들댄다. 그 황홀감은 뼛속 깊숙이까지 파고들어 온다. 저 운해 속에 몸을 던져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다. 사진기로 내 모습을 찍다가 불현듯이 '하룻밤 사이에 지옥과 천당의 세계를 오가는 내가 정상인가?' 라는 물음 앞에서 키득키득 웃음마저 흘러나온다.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요동치는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히말라야 설산 아래 무릉도원으로 펼쳐진 풍경 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무릉도원처럼 펼쳐져 있는 안개구름 속에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을이 있듯이 나의 내면에는 음습한 고통의 늪이 있었다. 그 음습한 늪에는 똬리를 튼 불면증이라는 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세상의 불빛이 다 꺼지고 어둠 속에서 나 홀로 남게 되면 그 불면증이라는 잔혹한 뱀들이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숙소 침낭 밑에 여권이며 돈이며 카드며 모든 귀중품이 다 들어 있는 전대를 놓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대를 놓고 다니는 것은 도난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낸 것이 아니라 현실감각을 망각하여 정신 줄을 놓고 다니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전대를 도난당하기라도 하면 당장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눈 앞에 펼쳐진 길에 익숙해지면서 내면의 길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 히말라야 설산 아래 안개구름으로 펼쳐져 있는 무릉도원은 그런 나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