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 우리 현대사는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을 일구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학살, 내란, 부정선거, 고문과 각종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와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준비위'는 뒤틀린 우리 역사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고, 역사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운동을 촉구하는 기획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
과거 남편이 '파리의 택시 운전사'였건만, 홍세화 장발장은행 은행장의 아내는 서울에서 택시 타기를 꺼린다고 했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인 택시기사들이 빼놓지 않고 말을 걸어오고, 곤란한 정치 얘기를 꺼내는 통에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제 돈 내고 타는 대중교통인데도 손님이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을 두고 홍세화 대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설득이란 게 어려운 겁니다. 택시 기사분들, 대부분 한 달에 150만~200만 원 벌면서 주말에 쉬면서 종편 보고 여당을 지지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택시 기사 한 명을 설득하고 이해시킨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그런 기본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반헌법 열전의 편찬도 그런 출발의 일환이라고 했다. 노동당 대표까지 지낸 지식인이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으로 활약하는 것도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였다. '장발장은행'은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 노역 신세를 져야 하는 이들에게 무담보·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기구다. 벼랑 끝에 몰린 이들에게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 주기.
바닥을 경험하고 있는 듯한 이 사회를 재건해야 하는 당위와도 어쩌면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 홍세화 대표는 개개인을 실질적으로 설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러기 위해 이미 역사를 공부한 이들은 자기성찰을, 역사를 외면한 이들은 '부끄러움'을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반헌법 열전이 한국사회에 필요한 이유다.
편찬 작업을 앞둔 반헌법 열전의 의의를 듣고자 지난달 31일 홍세화 은행장을 만났다. 현 사회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을 외치고 있었다. 역사로부터 먼저 배운 이가 지녀야할 당연한 전망이라는 듯이. 다음은 홍세화 은행장과 나눈 일문일답 전문이다.
"반헌법 열전 편찬은 한국사회가 꼭 해야만 하는 과업"- 최근 한겨레신문에 '반헌법 열전' 편찬의 의의를 설명하는 칼럼을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과업이고, 꼭 해야만 하는 과업이죠. 역사를 알면,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는데 이 나라는 공부를 한 사람일수록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아요. 지나간 잘못들은 넘어가도 되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문제는 당대까지도 몰상식하고 반헌법적인 일들이 너무 만연해 있다는 거죠.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해요.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앞으로라도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죠."
- 과거 친일인명사전 편찬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는데요. "그때는 관련자 대부분이 사망한 뒤라서 그나마 덜 예민한 편이었죠. 이번에는 현실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래서 더 뻔뻔하게 방해공작을 할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어요. 어쨌건 친일인명사전이든 반헌법 행위자 열전이든, 한뿌리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과거처럼 중앙정보부에 끌고 들어가서 고문하는 시절은 아니니까, 그거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죠. 그래도 압박이랄지 다양한 방해 공작이 있을 수는 있겠죠."
- 친일인명사전은 (이명박 정부 때 완간했지만) 노무현 정부 때 국민의 열망을 모아 제작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무려 박근혜 정부인데. "애당초 노무현 정권이든 김대중 정부든, 실제로 그들은 정치부분에서만 잠시 소수파로 밀렸을 뿐이지, 정부든, 언론이든, 기업이든 대학이든 모든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여전히 그들이잖아요. 그 부분은 크게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은, 현실정치 영역에서 대통령을 빼앗겼고, 국회에서 잠시 소수파로 밀렸던 것 뿐이거든요.
사실 김대중 정부도 김종필과 DJP 연합을 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열세 때문에 삼성공화국과 같은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민주 정부 10년이 분명 의미 있는 기간이었지만, 분단 이후 70년 역사를 봤을 때 완벽한 분절이나 단절이었을까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 그 잃어버린 10년 이후 말씀하신 그 '뿌리'가 공고해진 느낌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열전의 의미가 더 소중하지 않는가요. 그런 시도를 시민사회가 한다는 것 자체가요. 워낙 저들의 힘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잘 진행될까 싶지만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거겠죠.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란 질문이 나온 시점에서 또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현실을 바꿔나가야 하는 거고."
"남북 문제는 남한 정권 꽃놀이패"
- 개인적으로, <암살>의 흥행은 둘째치더라도 관객들이 이렇게까지 공감하고 공분하는게 좀 놀라웠어요. "어쨌든 잘 만들었잖아요. 또 영화에서 (친일파 청산이) 실패로 돌아가고, 염석진(이정재 분)이 재판장에 서서 연설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잖아요. 나라가, 국가가 제대로 섰다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해방 후 암살이란 방법을 써야 하고. 일제 시기가 단절이 아니라 지속되고 있다는 걸 <암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죠.
관객들, 대중들도 그런 면에서 이중적이지 않은가 싶기도 해요. 현실의 문제가 잘못됐다고 알고 있는 거잖아요. 현실이나 일상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몰입하고 그 행위 자체를 위안으로 삼는 거고."
- 최근 정부는 광복 70주년을 성대히 치렀습니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을 것 같은데요. "전혀 없죠, 감흥이. 해방이란 의미 자체도 그렇고, 나라다운 나라인가 문제인 건데. 우리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 이런 얘기들도 하잖아요. 세월호 참사도, 메르스 사태도 그렇고, 국정원의 행패는 더 그렇고. 선거조작처럼 별짓을 다하고 해킹까지 마구 하고 있는데다 검찰과 사법부가 유신시대로 돌아가는 시대…. 흔히들 이게 나라인가라고 하는데, 감흥보단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앞서는 거죠."
- 하지만 남북의 고위급 회담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수직 상승했어요. "남북관계는 말 그대로 꽃놀이패예요. 남한의 지배세력은 북한을 이용할 수 있는 거죠. 북한이 도발을 하든 유인을 하든. 이후 완화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인기가 치솟고. 토크빌의 말처럼, 정부가 국민의 수준을 대변하는 건데. 여전히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40%대가 꼽는 걸 보면, 국민 수준이 그 정도라 말할 수밖에요. 세월호든, 메르스든, 국정원이든,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어떻게 이 정부를 지지하느냐. 이제 또 어떤 일이 일어나야 지지를 접을까 싶은 거죠.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거의 종교화, 신앙화된 건 아닌가."
-그런 종교화에 종편이 한몫을 하는 것 같습니다. "수구 기득권 세력들이 김대중 정부 이후 그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이 어떻게 가능했느냐를 따져보고선 공영방송을 지목한 거죠. 유월항쟁 이후 MBC나 KBS, YTN 노조가 상대적으로 민주적이고 건강했고, <PD수첩> 등 보도부문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인사권을 통해 무력화시킨 거죠. 이를테면, 방송의 조중동화라고 할 수 있고요. 공영방송을 그야말로 정권의 경비견으로 만드는."
- 같은 의미에서, 최근 교과서에서 1930년대 독립군에 대한 언급을 축소한다는 보도도 있었어요. "뿌리 자체가 일제에 부역을 했고, 그런 역사관으로 점철된 사람들이 재벌뿐만 아니라 정부, 군대, 언론, 법조, 문화예술 분야의 주도권을 다 장악한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부역의 역사를 감추려고 하는 거고. 제가 칼럼에도 썼지만, 3년 전 알제리 독립 50주년 때 알제리 국회에서 당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진실을 감추거나 잊거나 부정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건설할 수 없다'고 했어요. 감춘다고 해서, 왜곡한다고 해서 다 가능할 수는 없는 거죠."
- 정치의 영역에서 분명 해야 하고 할 일이 있을 텐데요. "그래왔고, 또 그래야 하는데요. 심각한 한계는 평가나 분석, 그에 따른 개탄은 잘 하는데, 그 종교화된 개개인에게 다가가 설득하는 일은 잘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끼리 세상이 엉망이라고 분개하는데 그치는 것 아닌가. 정치인들까지도요. 반면 플래카드 하나만 놓고 봐도, 새누리당이 대중과의 거리 좁히기는 훨씬 더 잘해요. 기득권 수구 세력이 정치에서 우위를 점하게 해주는 철통 지지자들에게 우리가 좀 더 다가서고 대화하고 설득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선 약하지 않았나 싶어요."
"진보정당과 야당은 지리멸렬"
- 노동당 당 대표까지 지냈는데, 진보정당의 대처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한마디로, 지리멸렬이죠. 그동안엔 오만했고요. 실제로 특징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면 지적 우월감, 지적 오만함과 더불어 열악한 진보진영에서 고생을 한다는 윤리적 우월감까지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고 학습도 실제로 잘 하지 않죠.
그런데, 요즘 당면한 문제들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미국, 분단, 일제 부역의 뿌리, 자본과 신자유주의, 재벌 문제, 생태주의, 가부장적인 문제까지 다 얽혀 있는데, 이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자체로도 어려운데 겸손하지 않다는 거죠. 그러한 우월감들이 진보진영을 지리멸렬하게 하는 요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2012년 대선 상황이나 <나는 꼼수다> 이후 야당 지지자들의 성향도 조금씩 변한 게 아닌가 싶어요.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참여가 자위하거나 끼리끼리 즐기게 하는 것이었지, 기존의 생각을 바꾸었는가. 애당초 야당 지지자들은 투표를 할 사람들이었어요. 반대편 지지자들을 끌어 온 게 아니라는 말이죠. 실제로 수구 기득권 세력을 결집시킨 부분도 있고요.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현상만 보고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죠. 현혹되면 안 됩니다. 통찰이 필요해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언론도 그래요. 오마이뉴스든 프레시안이든 한겨레·경향이든, 누가 보느냐는 거죠. 뉴스타파도 그렇고, 이미 접하는 사람들은 일정 정도 생각을 가진 이들이라는 거죠. 내용에 충실해질 뿐이지 방향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다. 기득권들은 기대난망이고요."
- 야당이 제대로 역할을 못한다는 평가와 함께 실망하는 목소리도 늘고 있습니다. "야당이, 진보진영이 지리멸렬하니까요. 야당답게 제대로 싸우고 있나? 메르스 사태, 세월호 참사, 국정원 사건을 지나면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전혀 못 내고 있어요. 경제 정책도 복지나 경제민주화나 공약만 내걸고 입을 싹 씻었는데 공격도 잘 못하는 걸 보면 야당이 맞나 싶고요. 실망이 커지고 좌절감이 무관심으로 기울면서, 탈정치화가 이어질 위험이 있어요. 엄중한 세상입니다. 조건은 나빠지고 있는데, 내년은 총선이, 또 대선이 다가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대상과 경쟁대상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해요."
- 최근 20대들의 안보의식이 강화됐다는 보도도 있고, 일베를 비롯해 20대들의 보수화 혹은 우경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20대의 경우 전망이 불투명하니까 불안한 거죠. '삼포'니 '오포'니 전망이 없을 때는 방어할 수밖에 없죠. 전 세계적으로 공통인 건, 불만이 쌓이면 희생양을 만든다는 거죠. 책임을 반사시키고. 극우세력들이 그렇게 이주노동자를 활용하잖아요. 한국은 분단 상황이라 더 심하죠. '일베'가 약자와 여성을 공격하는 게 좋은 예고요. 이런 상황에 새누리당이 일자리를 주겠다는 플래카드를 걸고 있는 걸 보면…. 미래에 대한 전망 부재가 불안요인인데, 청사진이 없다는 게 불안한 인간성을 더 훼손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이, 설득이 중요하다"
- 계속 답답한 현실에 대한 얘기만 나누는 것 같네요. 이런 상황에서 반헌법 열전이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까요. "박근혜 대통령이나 집권층들이 바로 '친일' 부역에 근간을 둔 세력인데, 그간 한 번도 정리가 없었어요. 이게 필요한 거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과거 친일인명사전이 나온 거잖아요. 여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지만, 과거를 오늘의 문제로 연결하고자 열전이 나오는 거고요. 그만큼 역사를 두려워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해요.
유럽만 해도,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의 쌍두마차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은 독일이 나치의 역사 범죄를 철저히 반성하고 그에 따른 조처를 했기 때문이거든요. 프랑스도 프랑스대로 4년에 걸쳐 부역자를 철저히 심판했고. 양자가 서로 맞아 떨어진 거죠. 반면 일본이 우리 위안부 문제도 그렇고 제대로 사과를 안 하는 게 결국 친일이라는 우리 안의 문제가 반사된 거거든요. 우리 스스로 제대로 청산하고 매듭을 끊어야 합니다. 그 일환이 바로 이번 반헌법 열전이고요."
- 그 매듭을 끊기 위해 또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물론 쉽지 않아요. 한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설득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아니, 설득이 정말 안 되는 사회죠. 근본 문제를 우리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어릴 때부터 생각을 하고 사고를 해야 반성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죄다 암기 위주로 공부를 하니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설득이 안 되죠.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회의를 해야 상대방을 설득하고 경청할 수 있는데 한국 사람이 어디 경청을 하나요. 그래도 계속해서 설득을 해 나가야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 그러한 반헌법적인 조직과 개인들에게 고초를 겪기도 하셨습니다. 반헌법 열전의 편찬이 개인적으로도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개인적인 과거야 중요한 건 아니고요. 칼럼에도 썼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어요. 일제 부역자들은 삼대가 잘 먹고 잘 살고, 독립운동가들은 자식들까지 가난에 찌들고. 통계가 실제로 그렇게 나타나잖아요. 이게 다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해 나타난 결과겠죠.
인간은 죽는 순간이 되면 순수해진다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자들이나 1970~80년대 고문을 일삼았던 이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반성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더 열전이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결국 힘의 문제니까요. 힘이 없고, 한번도 정리해 본 적이 없으니까 저들이 철저하게 오만한 거죠. 말 그대로, 불의한 사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