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날이 가물다. 우리 동네는 가뭄이 더 심한 것 같다. 봄 가뭄도 그렇고, 장마 때도 큰 비가 없었다. 올해 장마는 장마답지 않았다. 입추가 지나고서도 시원스레 비가 내린 날이 며칠 없었다.

한 줄기 소나기라도 오면 좋으련만, 그나마도 잦지 않다. 가끔 소나기 일기예보가 있긴한데, 우리 동네 강화는 꼭 비켜가는 것 같다. 예보 상으로 오늘(3일)은 소나기 소식이 있다. 그런데 하늘을 보니 비올 기미가 없어 보인다. 비 기다림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할 듯하다.

등잔 밑 어둡다더니, 바로 이웃마을에 문화재가...

이런 날씨는 고추말리기에 딱 좋다. 맑고 살랑살랑 바람까지 분다. 고추에 드는 가을바람이 고추의 깊은 맛을 더할 것 같다. 마당에 고추를 후딱 널고, 자전거에 몸에 실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려는데, 이웃집 아저씨가 길을 막아선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실까?"
"천제암궁지요."
"천제암궁지? 그게 뭔데요? 자전거 타고 가는 거보니까 가까운 덴가?"
"네. 이웃마을 문산리에 있는 문화재예요. 마니산 자락 좀 올라가면 있어요."
"걸어서 갈 곳은 아니구먼…."
"얼마 안 된대요. 저랑 같이 가시죠?"

 천제암궁지,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4호이다.
천제암궁지,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4호이다. ⓒ 전갑남

아저씨는 손사래를 친다. 당신은 뒷산에 올라 도토리나 밤을 주워야겠단다. 먼 데 문화재 탐방보다는 근처에서 도토리나 밤 줍는 일이 실속이 있는 모양이다. 다음에 한가할 때 같이 가자며 길을 비켜준다.

아저씨는 우리 마을로 이사온 지 1년이 안 됐다. 붙박이들이야 가까운 이웃마을에 누가 살며, 고샅길까지 훤히 알지만 타지에서 이사온 사람들은 바깥 마을 사정이나 문화재 소재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산에서 땔감도 하고, 나물 뜯으러 뒷산은 물론 이웃마을 먼 산까지 온 산을 뒤지며 살았다. 산길을 따라, 능선을 따라 널려있는 바위며 계곡 하나하나까지 빠삭했다. 문화재가 있는 곳으로는 소풍을 가기도 했다. 그래서 이웃마을 문화재도 눈감고도 찾을 정도였다.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서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잊고 산다. 자전거페달을 조심스럽게, 또 천천히 밟아본다. 자전거도로가 없는지라 찻길을 달려야 한다.

금표, 왜 들어가지 말라 했을까?

 천제암궁지 입구 표지판이다. 마니산 주차장으로 가다 화도면 문산리에 있다.
천제암궁지 입구 표지판이다. 마니산 주차장으로 가다 화도면 문산리에 있다. ⓒ 전갑남

10여 분 달렸을까? 가까운 거리에 '천제암궁지, 참성단금표' 입구 안내판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900m라고 돼 있다. 마을 안길로 접어들자 길이 가파르다. 엉덩이를 들고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숨이 턱에 차고, 힘에 부쳐 자전거를 끌며 숨을 고른다. 마을길이 한적하다.

조용한 마을에 나그네가 낯선 듯 개들이 무섭게 짖어댄다. 개 짖는 소리에 고추 따는 주민이 "저 놈이, 웬 야단이야!" 하면서 일손을 멈춘다.

"아저씨, 이길 따라 가면 천제암궁지 맞죠?"
"그래요. 근데 자전거 타고는 못 올라가는데…. 동네 끝집에다 세우고 걸어가세요."
"네, 고맙습니다. 얼마나 걸리죠?"
"금방이에요. 예전에 우리는 한달음에 다녔는걸!"

우리 고추밭은 끝물인데, 아저씨네 고추밭은 아직도 빨간 고추가 숱하게 달렸다. 고추농사가 잘 돼 부럽다는 내 말에 아저씨는 웃음으로 답한다. 이렇게 잘 되기까지 농부의 정성과 땀깨나 흘렸을 수고는 얼마였을까? 뭐든 그저 되는 법은 없다.

 천제암궁지로 가는 마을길이 호젓하다. 멀리 보이는 산이 마니산이다.
천제암궁지로 가는 마을길이 호젓하다. 멀리 보이는 산이 마니산이다. ⓒ 전갑남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을길이 끝났다. 아저씨가 일러 준 곳에 자전거를 세웠다. 이제부터는 산길이다. 산길 초입에 안내판이 또 보인다. 150m 남았다. '아저씨 말마따나 금방이네!' 머지않아 문화재를 만난다는 생각에 안내판이 반갑다. 흙길이 호젓하다. 간간히 매미소리가 들린다. 매미도 가는 여름이 아쉬운 듯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얼마 안가 녹색 쇠울타리를 친 큰 바위가 언덕에 보인다. 참성단금표이다. '금표(禁標)'란 각자(刻字)가 선명하다. 금표 글자 왼쪽으로 갑자 팔월 입(甲子 八月 立)이라는 글자도 있다. 갑자년 8월에 새겼다는 의미인 것 같다. 갑자년이면 어느 갑자년일까? 갑자년 팔월만으로는 정확한 연도를 헤아리기 어려운 게 안타깝다.

 참성단금표이다. 천제암궁지를 가다 만난다.
참성단금표이다. 천제암궁지를 가다 만난다. ⓒ 전갑남

'금표라는 글자로 무엇을 금하고자 했을까?' 안내문에는 벌채(伐採)를 금하고 관청에서 나무를 가꾸고 기르기(養木)를 주관했다고 돼 있다. 그 옛날에 벌채를 금했다니! 그럼 마니산 주변에 사는 백성들은 추운 겨울, 어디서 땔감을 얻었을까? 벌채하다 들키기라도 하면 관가에 끌려가 곤장은 맞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해본다. 금표대로 지켜야 한다는 순박한 민심의 안타까움, 이에 따른 민초들의 아픔이 아른거린다.

 금표란 각자가 선명하다.
금표란 각자가 선명하다. ⓒ 전갑남

금표는 이곳이 신성한 곳이니까 함부로 드나들지 말라는 뜻도 있었을 법하다. 마니산 정상에 단군께서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를 지냈다는 곳이 아닌가!

이곳에서 천제암궁지까지는 400m라는 안내판이 또 있다. 전의 안내판은 금표까지를 말한 듯하다.

재궁터, 하늘에 국태민안과 감사하는 마음이

금표에서 다시 계곡을 끼고 오른다. 크게 가파르지 않은 길을 가는데도 땀이 흥건하다. 한참을 가쁜 숨을 몰아 오르니, 그리 넓지 않은 평탄지에 천제암궁지가 있다.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4호라는 문화재 안내판이 서있다.

천제암궁지(天祭菴宮址)는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던 제기(祭器)를 보관하고, 제물(祭物)을 준비하는 재궁(齋宮)터다. 재궁터가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단다. 다만, 고려 말 이색이 마니산 기행 때 지은 '재궁(齋宮)에 차운(次韻)하다'는 2편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시가 알려져 고려 때부터 재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중기 이형상(李衡祥)의 강도지(江都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도면에 속한 마니산에 천재궁이 있다. 우리 태종대왕이 고려 말에 대언벼슬을 하고 계실 때 이곳에서 제를 지내기 위해 머무셨다."(天齋宫在摩尼山 屬下道面 祭官齋宿之所 我太宗大王 麗末以代言 齋宿于此)

이는 태종이 왕에 오르기 전, 마니산 이곳 천재궁에 머물면서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다. 또, 연산군 6년(1500)에는 재궁의 전사청(典祀廳)을 고쳐 지을 때, 수군이 직접 양식을 가지고 다니면서 매우 힘들게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곳 재궁을 나라에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천재암궁지는 3단 축대로 돼 있고, 네 개의 돌기둥이 서 있다. 돌기둥은 아랫단 축대 밑에 있다. 맨 위 축대에는 기왓장 조각들을 모아 놓았다. 예전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천제암궁지는 3단 축대와 4개의 돌기둥이 서있다.
천제암궁지는 3단 축대와 4개의 돌기둥이 서있다. ⓒ 전갑남

 축대 맨 윗단에는 기와장이 놓여있다. 출토된 것으로 여겨진다.
축대 맨 윗단에는 기와장이 놓여있다. 출토된 것으로 여겨진다. ⓒ 전갑남

너무 오래된 유적지라서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백성들의 안녕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위해 하늘에 제를 지내던 조상들의 깊은 얼을 우리는 지금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언제부터 재궁을 소홀히 여겼는지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든다. 조용한 숲속에서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가만히 느껴본다.

우측 방향으로 길이 있다. 몇 걸음에 약수터가 보인다. 물바가지가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주민들이 자주 찾는 것 같다. 음식을 만들려면 물이 있어야 했고, 물이 있는 곳에 재궁을 지었을 법하다.

 천제암궁지 오른쪽으로 우물터가 있다.
천제암궁지 오른쪽으로 우물터가 있다. ⓒ 전갑남

약수터 문이 굳게 닫혀있다. 문을 열어보니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다. 가뭄으로 약수가 마른 것 같다. 올 가뭄이 유난히 심한 것을 여기서도 실감한다. 물 한 모금 축이지 못한 게 아쉽다.

산길은 걷고, 마을길은 자전거를 타고 내려온다. 내리막길에서 자전거에 맡긴 몸에 날개를 달아 달린다. 온몸에 젖은 땀은 일시에 식어 내린다.

집 가까이 도착했다. 이웃집아저씨가 마당에서 도토리를 손질하다 나를 붙잡고서 묻는다.

"잘 다녀왔어요? 천제암궁지는 뭐하는 곳이었대요?"

덧붙이는 글 | 천제암궁지를 찾아가려면 초지대교를 넘어 화도면 마니산 주차장 쪽으로 오다가 문산리에 있는 안내판을 따라 오르면 된다. 인천광역시 화도면 문산리 산65번지에 위치한다.



#천제암궁지#참성단금표#마니산#참성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