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주에서 만리장성의 서쪽 시작점인 가욕관까지 약 740km. 우리가 야간 열차를 타러 난주역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10시다. 이곳에서 기차를 타려면 엄격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권을 꺼내 공안에게 건네면, 그들은 승차권과 대조한 뒤 통과 여부를 통보한다. 물론 짐도 검색대를 거쳐야 한다.
오후 10시에 난주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가욕관에 도착한 시각은 8시간 후인 오전 6시 30분이다. 때로 장거리 기차 여행은 추억이 된다. 객실은 비교적 깔끔한데 양 옆에 이층 침대 두 개가 있어 총 4명이 들어갈 수 있다. 벽에는 여행객들을 위한 전기소켓은 물론 전기포트도 설치돼 있다.
기차 여행의 즐거움은 누가 뭐라 해도 침대칸에 앉아 맥주 한 잔씩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다. 담소를 나누다 누운 침대에서 덜컹거리는 소리를 듣다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눈을 떠 차창을 보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사막을 지나가는 기차에서 보는 일출은 지금까지의 일출과는 다른 신기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가욕관은 원래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있는 관문이라고 한다. 즉 만리장성을 지키는 주둔군이 있는 곳이다. 세계문화유산인 만리장성의 길이는 약 2700여 km 정도로, 서쪽 끝 지점의 관문이 가욕관이고 동쪽 끝 지점은 하북성 산해관이라고 한다. 이 가욕관은 명나라 1372년에 완공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 임광산씨는 "원래 이곳의 지명이 '주천'이었는데 1965년에 가욕관시로 바꾸었다"며 이곳 이름을 주천이라고 붙인 유래를 말해줬다.
"한나라 때 곽거병 장군이 전쟁에 나가 승리하자 이 소식을 들은 한무제가 축하해주기 위하여 자신이 마시던 술 한 병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과거병 장군은 황제가 하사한 술을 혼자 마실 수 없다고 하여 그 술을 우물에 부어 모든 병사들과 같이 마셨대요. 그래서 이곳 이름을 '주천(酒泉)'이라고 하였대요." 해발 1700m 정도의 고비사막에 위치한 가욕관시는 도시 계획이 잘 되어 있다. 인구는 약 50만 정도인데 주로 한족이 거주한다고 한다. 사막 지역이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기련산맥 정상(5400m)의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이곳까지 흐르게 하여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근무하는 사람들만 약 6만 명 정도 되는 강철회사가 있어, 주민들의 경제적 수준도 높은 편이라고 했다. 지역적으로 주위가 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검은 산의 돌에 철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서 1950년 대 말에 '주천강철회사'를 지었다고 했다.
만리장성 쌓으러 간 남편 찾아 떠난 아내
가욕관 입구에는 표지석에 '천하제일웅관 - 가욕관(天下第一雄關 - 嘉峪關)'이라는 문구와 세계문화유산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었는데, 이는 만리장성 서쪽 관문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자 길쭉길쭉 뻗은 백양나무들과 붉게 핀 백일홍 등 여러 나무들과 꽃이 잘 다듬어져 있는 화단이 우리를 맞이했다. 꽃밭을 돌아 들어가니 외성문 오른 쪽에 만리장성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엔 소식을 전한 죽간자들, 봉화대의 횃불 재료, 복원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 성벽 벽돌에 그려진 그림들, 그리고 만리장성 여러 곳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만리장성은 진시황 때 쌓기 시작하여 60~70% 정도 완성하고 그 뒤 계속 쌓아가다가 명나라 때 완성하였다고 한다.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는 흉노, 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만리장성엔 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는데, 맹강이란 여성이 만리장성을 쌓으러 간 남편을 만나기 위해 공사 현장을 찾았으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전설만 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만리장성을 쌓다 죽고, 고통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들을 보니, 지역마다 장성을 쌓은 모습이나 재료들이 다르다. 만리장성을 쌓을 때에는 그 지역의 특색을 많이 이용하여 쌓았다고 하는데, 동쪽인 북경 지역부근엔 바위들이 많아 바위로 성을 쌓았고, 내몽고 지역은 사막과 초원으로 되어 있어서 언덕을 그대로 이용한 곳도 많다고 한다. 서쪽 사막지역은 흙벽돌로 쌓았다고 한다.
이곳의 성벽은 높이가 2m 정도 되는 흙벽돌로 쌓았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자갈과 황토로 된 사막지역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이곳에서는 기병들끼리 싸우기 때문에 말이 뛰어 넘지 못할 정도로만 쌓았다고 한다.
가욕관은 만리장성의 성문 중 보전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고 했다. 외성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을 보니 '천하웅관'이란 비석이 있고, 그 뒤에는 원래의 성벽 모습이 그대로 뻗어 있다. 내성으로 들어가는 길엔 최근 다시 복원하였다는 내용과 복원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안내판이 쭉 게시되어 있고, 내성문 오른쪽에는 복원을 위해 가려놓은 가림막들이 그대로 있었다.
내성으로 들어가는 성문의 2층짜리 성루가 우람하다. 입구에서 펄럭이는 깃발들이 그 시대의 분위기를 드러냈고, 많은 사람들이 둘러보고 있었다. 성문 앞에는 그 시대의 의상들을 구비하여 대여하고 있는 곳이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옷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었다.
가욕관의 구조는 내성, 외성으로 되어 있었는데 내성의 둘레는 640m로 대부분 흙벽돌로 돼 있었다. 내성에는 광화문, 유원문이란 성문이 있고, 그 위에 성루가 있었다. 내성과 외성뒷문의 성루를 멀리서 보면 두 채의 성루가 나란히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장면은 가욕관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인쇄물에 나와 있었다.
내성을 밟고 성위로 한 바퀴 돌 수 있다. 성에 올라 왼쪽으로 돌자 멀리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아스라이 보이고, 그 위에 구름 몇 점이 떠 있다. 외성 밖에로는 사막으로 뻗어가는 만리장성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내에는 200여명의 군인들이 주둔하며 지역을 지켰다고 하는데, 성 안에 그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우선 지도부가 거주했던 집들은 내성 오른쪽에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었고, 안에는 집무의 모습들을 각종 인형으로 제작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관우를 신으로 모실 정도로 존경하여 관우 장군을 모시는 사당도 있다.
또 내성 왼쪽에는 초원이나 사막에서 주로 사용하는 게르 몇 동이 설치되어 있고, 포대, 깃발 등 당시의 모습들이 재현되어 있었다. 메를 쳐 엿을 만드는 곳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영화나 TV 드라마 등도 촬영되었다고 한다.
뒤쪽 외성문으로 나가니 사막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낙타 타기 체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글라이더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막으로 나가서 둘러보기도 했다.
새로 지은 듯한, 그러나 600여 년 전의 모습을 드러내는 가욕관은 사막 가운데 우뚝 솟은 서역길의 관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관문을 통과하여 서역기행을 다녀왔을 것이다. 새로 복원한 성벽과 성루가 더 우람하게 사람들을 맞이하는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옥관이 만리장성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돌아보고 나오다 보니 내성문 왼쪽에 희대라는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각종 공연을 하는 무대라고 한다.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불교와 도교가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천장의 태극문양이 눈에 띄었다.
그림이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무대 오른쪽 벽에는 노승이 근엄하게 앉아 있고, 왼쪽에는 어느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근엄한 노승 앞에는 거울을 든 동자승이 있고, 왼쪽 벽 목욕하는 여인의 뒤에도 동자승이 거울을 들고 있다. 즉 근엄한 노승이 거울을 통해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그림이다. 가이드 임광산씨는 이 그림을 그려 놓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웃는다. '믿거나 말거나'라고.
"이런 그림을 이곳 희대에 그려 놓은 이유가 교훈을 주기 위해서란 말도 있고, 병사들을 위로하려고 그린 것이라는 말도 있어요. 병사들에게 목욕하는 여인을 훔쳐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성교육이란 거죠. 또 하나는 남자들만 있는 병영에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서 그들의 마음을 풀게 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춘화에 해당한 그림이지요." 덧붙이는 글 | 7. 29(수)부터 8.6(목)까지 9일 동안 풀꽃산악회 회원 20명은 혜초여행사의 기획으로 신서역길의 중국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신서역기행은 서안에서 천수까지 320km를 버스로 약 5시간, 천수에서 난주까지 330km를 버스로 약 5시간, 난주에서 가욕관까지 740km를 기차로 약 8시간, 가욕관에서 돈황까지 400km를 버스로 약 5시간, 돈황에서 유원가지 120km를 버스로 2시간, 유원에서 선선까지 620km를 기차로 약 9시간, 선선에서 투루판까지 약 150km를 버스로 약 3시간, 투루판에서 우루무치까지 190km를 버스로 약 3시간이 걸리는 총 2800km의 대장정입니다.
‘버스와 기차로 간 서역기행’은 총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1) 사막을 가로지르는 신서역기행, (2) 서안(西安), 당나라의 흔적, (3) 진시황과 병마용, (4) 화청지, 양귀비에 대한 인식, (5) 천수, 맥적굴, (6) 난주, 황하와 유가협댐, (7) 가욕관, 만리장성의 시작, (8) 돈황 석굴 막고굴, ((9) 투루판, 사막에 사는 사람들, (10) 사라진 왕국 고창고성과 교하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