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의 "피고인 준비됐으면 출석시켜라"는 말에 이태원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지목된 아더 존 패터슨(36)이 법정 안으로 들어왔다. 175cm가량의 키에 짧은 스포츠 머리의 패터슨은 긴장한 모습이었다. 녹색 계열의 수의를 입은 그는 검사와 변호인, 재판장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100여 명의 방청객을 보고 짐짓 놀란 표정을 짓기도 했다. 또 그는 직접 "일사부재리 원칙과 공소시효에 대해서도 심리가 이루어지는 것인가"라고 재판부에 물어보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8일 오전, 사건 18년 만에 이태원 살인사건의 진상규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기자·방청객 100여명 가득 차... 침착한 표정의 패터슨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심규홍 부장판사)는 이날 이태원 살인사건 1차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했다. 검찰 측은 패터슨이 진범이라고 몰아세웠고 패터슨 측은 "범인은 (함께 현장에 있던)에드워드 리"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재판이 열린 417호 법정은 기자들과 방청객 100여 명으로 가득 찼다. 피해자 조중필(당시 22세)씨의 부모와 패터슨과 사건 현장에 있었던 에드워드 리의 아버지도 법정에 왔다. 리의 아버지는 재판 시작 전 기자들에게 "지금도 살인을 안 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패터슨은 나쁜 사람"이라며 "이번 재판을 통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조씨의 아버지는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두 사람 모두, 살인범"이라며 원망했다. 이어 그는 "이 사건 때문에 집안이 망하고 지난 18년 동안 매일 술 먹고 다녔다"면서 "(이번 재판에서)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패터슨은 지난 1997년, 4월 3일 서울 이태원의 한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에서 조중필씨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사건 당시엔 리가 단독 살인범으로 기소됐으나 대법원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유죄 취지의 1, 2심 선고를 뒤집은 결과였다.
당시 패터슨은 흉기소지 등의 혐의로 실형을 받았다가 1998년 사면됐다. 그리고 검찰이 출국금지를 연장하지 않은 틈을 타 1999년 8월 미국으로 갔다. 검찰은 재수사를 통해 패터슨을 살인혐의로 기소했고, 지난달 23일 16년 만에 국내로 송환됐다.
"동기 없는 살인, 마약한 리가 진범" vs. "'피투성이' 패터슨이 살인"
패터슨 측 오병주 변호사는 먼저 이번 사건을 맡게 된 계기를 설명하며 패터슨이 결백하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지난 6월 남루한 옷차림의 한 어머니가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자신은 가진 것이 없고, 상대는 부유한 집안으로 여론전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이 이태원 살인사건인지 모른 상태로 피의자를 만났습니다. '진짜 죽였으면 유가족 앞에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패터슨은 진실된 표정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이어 오 변호사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가증스러운 살인범이다, 누가죽였느냐"면서 "이 사건은 동기와 목적이 없는 살인 사건으로 마약에 취해있거나 미치지 않고서는 (살해) 원인이 발견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리는 당시 마약에 취한 상태였고 마약 거래도 한 바 있다"며 "사건이 일어난 직후 지인에게 웃으며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등 리가 환각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패터슨은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피해자를) 찌른 사람은 바로 에드워드 리다. 나는 찌르지 않았다, 리는 항상 터프가이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사건 당시 패터슨이 머리 등 전신에 혈흔을 뒤집어썼던 점, 주변 친구들로부터 패터슨의 범행을 입증할 진술이 확보된 점 등을 증거로 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전 재판기록을 참고하되 백지상태에서 심리를 진행하며 6개월 안에 재판을 끝내겠다고 밝혔다. 다음 공판준비기일은 이달 22일에 열리며 이날 이번 재판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할지 여부를 결정하게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