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중국, 일본은 한창 역사전쟁 중이다. 올해 7월 일본이 '지옥 섬' 하시마 탄광을 비롯해 조선인 강제 노역과 관련된 7개의 시설을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근대화의 초석' 운운하며 세계문화유산에 올렸다. 지난 10일에는 중국이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들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일본이 조선인 강제 노역 시설을 '관광지'로 만들며 역사적 비극을 희석하려고 하자 한국이 반발했고, 중국이 난징대학살 기록물을 등재하며 일제의 부끄러운 역사를 건드리자 일본은 '극도로 유감스럽다'는 반응을 내놨다. 현재 한국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과 위안부 피해 기록 등의 등재를 추진하고 있어서, 아마 이런 싸움이 쉽사리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동북아시아 4개국이 모두 사실상의 세습 체제에 들어선 상황에서 이 지역의 역사 자체가 주요한 갈등 요소로 드러나는 셈이다. 3대 세습을 한 북한의 김정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괴뢰국가인 만주국과 지금의 자민당을 만든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 아베 신조, 공산 혁명 원로 시중쉰 전 부총리의 아들이자 '태자당'의 대표인물인 시진핑, 그리고 '친일과 독재의 아이콘' 박정희의 딸 박근혜.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박근혜 정권은 외부의 역사 왜곡보다는 내부의 역사 개조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수많은 교육자가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한국사 교과서를 기어이 국정화하면서, 일본의 치밀한 역사 왜곡에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역사 교육을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벌어졌던 일들을 단계별·시기별로 정리해 보자.
1단계, 뉴라이트 성향 한국사의 교과서 검정 통과2013년 5월 10일 국사편찬위원회는 뉴라이트 성향의 인사들이 대거 포진한 '한국현대사학회'의 초대 회장(권희영)과 2대 회장(이명희)이 주도적으로 집필한 교학사 한국사에 대해 교과서 검정 본심사에서 적합 판정을 내렸고, 이어서 8월 30일에는 검정 심의에서 최종 통과시켰다.
2단계, 한국사를 2017학년 수능부터 필수과목으로 지정뉴라이트 성향의 한국사를 교과서 검정심의에서 최종 통과시키기 3일 전인 2013년 8월 27일, 박근혜 정권의 교육부는 한국사를 당시 중학교 3학년(현재 고등학교 2학년)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2017학년 수능부터 사회탐구 영역에서 분리해 대입 필수과목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한다.
3단계, 한국현대사학회 관련 인사들 대거 중용국사편찬위원회가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킨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검정에서 최종 통과시키고 약 1달 후인 2013년 10월 1일, 한국현대사학회 고문이었던 유영익이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를 대표 집필한 권희영(한국현대사학회 초대 회장)은 2014년 5월 1일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학원장으로 취임한다.
또한 2014년 6월 17일에는 한국현대사학회 이사였던 박효종이 방송통신심의위원장으로 취임하고, 역시 이사였던 정종섭은 2014년 7월 16일에 안전행정부(현재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취임한다. 게다가 한국현대사학회 고문이었던 이인호까지 2014년 9월 5일 KBS 이사장으로 선출된다.
4단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결국 2015년 10월 12일, 박근혜 정권은 수많은 역사학도와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공식 발표했다(국정교과서는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뒤 도입한 국가 집필 교과서 체제). 교육부는 다음 달 2일까지 이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 뒤 확정 · 고시할 예정이다.
5단계, 2017학년부터 국정교과서로 역사 교육2013년 8월 27일 한국사의 수능 필수과목 지정으로 인해, 내년에 치러지는 2017 수능부터는 모든 응시생이 다 한국사 시험을 봐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2017학년부터는 모든 중·고등학생이 국정교과서로 역사 교육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2017년 이후에는 모든 학생이 다 국정교과서로 한국사를 공부하고 또 그걸로 대입시험을 치게 됐다.
우리가 일본 역사 왜곡을 비판할 수 있을까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발표된 12일, 교학사 역사교과서 논란이 한창이던 2013년 8월 28일에 썼던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대한민국 학생들의 대학입학시험에 한국사를 필수로 하겠다는데 특별히 문제를 제기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불안감이 있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제대로 된 역사교육에 대한 간절함과 동시에,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수능 한국사 필수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그리고 이인호가 KBS 이사장에 내정된 2014년 9월 1일에는 이런 글도 썼다.
"만약 뉴라이트든 한국현대사학회든 아무튼 이들이 '제2의 교학사 역사교과서' 같은 걸 집필하고, 이것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검정하여 합격시키며, KBS에서는 이에 우호적인 보도를 내보낸다면? 또 한편으론 한국방송이 이를 바탕으로 역사다큐를 제작하고, 방심위는 그저 수수방관한다면?"KBS는 방송 콘텐츠를 만들고(생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를 심의한다(관리).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같은 학계에서 교과서를 집필하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역사교과서의 개발과 관리를 총괄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 특정 성향의 집단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만약 권력층에서 이를 비호한다면?
우리는 일본의 역사 왜곡을 지금까지 계속 비판해 왔다. 그 중심에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다루지 않는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있었고(예전부터 이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자주 충돌했다), 결국 요즘 일본의 어린 학생들은 과거 '전범국가' 일본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수준까지 왔다.
이대로라면 2017년부터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게 된다. 과연, 이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그리고 5년이나 10년 뒤에 우리는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을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혁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arthurjung.tistory.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