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밤이고 낮이고 아이는 책상 위와 침대 머리맡에 여행안내서만 쌓아두고 읽기 때문이다. 더욱이 2015학년도 2학기가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자유학기제'인지라 중간고사·기말고사 부담조차 없다. 아이는 물 만난 고기 마냥 연일 싱글벙글한다. 또래 친구들은 한창 학원에서 영어·수학 공부에 '올인'하고 있다는데, 끼니도 잊을 만큼 여행안내서 읽기에 '심취한'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매년 말 통계청이 발표하는 가구당 평균 학원비를 저축해 해마다 해외여행을 가자고 아이와 약속한 뒤부터 생겨난 '괴벽'이다. 여행 다녀오기가 무섭게 다음 여행지를 정하고, 학교 공부는 나 몰라라 한 채…, 다음 방학을 기다리며 학기 내내 관련 자료를 준비한다. 아이와 함께 다니기 전까지는 내가 주로 '즐겼던' 일이니, 아빠인 나로선 솔직히 막을 명분이 없다.
여행지가 정해지면, 항공권 구입과 동시에 시중에 나온 관련 여행안내서 전부를 싹쓸이하다시피 사서 챙겨놓는다. 해당 지역을 먼저 여행한 이들의 인터넷 블로그들을 두루 살펴봐도 될 일이건만, 아이는 한사코 눈이 아닌 손에 잡히는 책을 사달라고 조른다. 아이의 부탁에, 물론 아내는 늘 이래도 되나 걱정하면서도 카드를 긁고 만다. 여행안내서 꾸러미가 도착하면 아이의 표정은 달라진다. 제 생일에도 그렇게 환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여행안내서를 바라보는 아이의 입맛, 참 까다롭네
아이가 요즘 탐독하고 있는 건 웬만한 영어 사전 두께인 1000쪽이 넘는 유럽 여행안내서다. 한 달여 전 네덜란드 왕복 항공권을 끊으면서 또 그렇게 사들인 책 중 하나다. 이미 얇은 책 몇 권은 독파한 상태다.
떠나려면 앞으로 석 달 가까이나 남았는데, 사달라고 해도 더 이상 사줄 책이 없다. 해당 지역 관련 여행안내서는 이미 동이 났다. 아내는 슬그머니 책은 됐고, 그 나라에서 제작한 영화나 EBS <세계테마기행> 등 관련 영상을 찾아보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아이는 책들을 다 읽고 나면 이따금 출판사별로 '품평'을 내놓곤 한다. 언젠가는 시중 여행안내서들 중에는 인터넷 블로그 등에 이미 올라와 있는 자료들을 짜깁기한 것들이 적지 않다면서 그 책을 낸 출판사 서적은 앞으로 사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 나물에 그 밥'인 시중의 책들과는 다른 '진짜' 여행안내서를 써보고 싶다는 바람도 이야기했다.
이미 열 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경험한 아이에게 시중 여행안내서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여행 정보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최신'이라고 표지에 밝혔으면서도 막상 살펴보면 몇 해 전 정보와 똑같은 사진과 내용이 더러 있다는 게다. 특히 동남아시아나 중국과 같은 경우는 워낙 지리적 환경의 변화가 빨라서인지, 여행안내서가 그 속도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단다. 하긴 책 내용을 철석같이 믿고 시간 계획을 짰다가 외국에서 몇 차례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이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며 억울해한 적이 있다.
또, 천편일률적인 내용 구성도 마뜩잖다고 했다. 출판사마다 표지와 디자인만 다를 뿐 나머지는 한 사람이 쓴 것인 양 똑같다고 혹평했다. 아이는 '주요 관광지'를 소개해 놓고 동선까지 알려주는 친절함이 우스꽝스럽다고 말했다. 사람들마다 기호가 다르고, 여행 목적도 각기 다를 텐데, 안 가보면 후회한다며 '핫스폿'(Hot Spot) 운운하는 건 가르쳐준 대로 여행하라는 것밖에 더 되냐는 입장이다.
하긴 우리 가족 안에서도 이번 겨울 네덜란드 여행의 목적이 서로 달라 일정을 짜는 데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내게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맥주의 나라'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면적의 절반도 안 되는 두 나라에는 수천 종이나 되는 다양한 맥주가 생산되고 있다. 흔히 물보다 맥주를 더 많이 마신다고 알려진 나라들이다. 보름간의 일정 동안 최대한 많은 종류의 맥주를 맛보는 것이 나의 여행 목적이다.
그런가 하면, 아내는 렘브란트와 고흐로 대표되는 미술관들을 샅샅이 뒤져보고 싶어한다. 값비싼 입장료를 감안해 욕심부리지 말고 하루에 한 곳씩 느긋하게 섭렵하자는 쪽이다. 아이의 생각은 또 다르다. 아이에게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축구 왕국'이다. 현지에서 축구 경기를 직접 관람했으면 하는 눈치다. 네덜란드 축구팀의 광팬이기도 한 아이는, 현재 벨기에가 FIFA 랭킹 세계 1위로 올라섰다며 떠나기도 전에 흥분해 있는 상태다.
요컨대, 아이의 바람은 '자칭' 소박하다. 사람들의 다양한 기호를 반영한 주제별 여행안내서가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말로는 자유여행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써놓고는, 실제로는 단체 패키지여행 코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꼬집은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여행안내서들이 다녀왔다는 증거라도 남길 양 관광지 앞에서 우르르 사진만 한 장 찍고 부리나케 다음 코스로 이동하는 한국인들의 해외여행 행태를 조장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규슈의 재발견, <규슈 올레>
그즈음 난 9월 초 나온 신간 <규슈 올레>(중앙북스)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일본 규슈야 대학 시절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몇 차례 두루 돌아다닌 적 있는 익숙한 곳이라, 더 볼만한 게 있나 싶은, 조금은 '삐딱한'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책 제목의 '올레'라는 이름만 아니었어도, 굳이 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쨌든 옛 추억을 떠올리며 과거 내가 가본 곳을 사진으로나마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첫 장을 넘겼다.
분명 표지에 가이드북이라고 밝혔지만 여태껏 봐온 그렇고 그런 여행안내서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규슈를 찾는 '일반적인' 여행자들을 위한 안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골목길이라는 의미의 제주 방언인 '올레'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테마는 오직 '걷기'다. '규슈 올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보 여행길로 자리매김한 제주 올레를 벤치마킹한 규슈의 트레킹 코스다. 일본이 제주 올레를 '직수입'한 사례라고나 할까.
이렇게 술술 읽혀도 되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풍경 사진들과 전문여행기자인 저자 손민호씨의 맛깔스러운 글 솜씨가 버무려져 웬만한 소설보다 몰입도가 높다. 이 책은 2012년 2월부터 2015년 8월 현재까지 열린 총 열다섯 개 구간의 올레길을 지역과 주제별로 나눠 소개한다. 이전 코스에서 다음 코스로 건너가기가 아까워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지 않는다면, 2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다.
가히 '규슈의 재발견'이라 할 만하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한 고백이지만, 여러 차례 규슈 여행을 했는데도 이 책에 소개된 수많은 곳들 가운데 내가 가본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규슈 하면 당장 온천과 휴양부터 떠올리는 '일반적인' 여행자였던 탓일 테다. 그럼에도 각 장 말미마다 소개된 규슈 곳곳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새로운 것을 보면, 규슈를 수차례 생각 없이 돌아다녔던 셈이다.
'올레꾼'들을 위한 깨알 배려
국내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바야흐로 '걷기'가 대세다. 듣자하니, 제주국제공항의 렌터카 업체들이 울상일 만큼 제주 올레를 걷기 위해 일부러 그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제주뿐만 아니라, 지리산 둘레 길과 청송 외씨버선길, 여수 금오도 비렁길 등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앞다퉈 트레킹 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부작용이 걱정될 정도다.
'걷기'가 여행의 새로운 트렌드라면, <규슈 올레>는 여행안내서의 새로운 표준이라 할 만하다. 걷기라는 단일한 주제만 다뤄서인지 글과 사진에 담긴 내용이 깊고 촘촘하다. '주마간산' 격으로 훑고 지나가는 다른 여행안내서와는 확연히 결이 다르다. 압권은 부록처럼 매달아 놓은 '미니 가이드맵북'. 부록 형식이 고등학교 시절 문제집 뒤에 별책으로 붙여놓은 답안지 같아 피식 웃음이 나온다. '명작은 디테일'이라더니, '올레꾼'들을 위한 깨알 같은 배려다.
교통정보와 먹거리·숙소 등 중요한 여행정보를 소홀히 다뤘느냐면, 그건 아니다. 각 장의 첫머리와 말미에 각각 그림 지도와 도표 등 독특한 형식과 유머러스한 내용으로 가독성을 높였는데, 신세대적인 참신함이 느껴진다. 특히 먹거리를 소개하는 사진은 실제 군침이 돌 정도여서, 잠시 책을 덮고 스마트폰을 켜서 집 주변의 일식집을 잠시 검색해보게 만든다. 그 중 책의 32쪽부터 34쪽까지 실려 있는 '에키벤' 사진은 누구든 그냥 보고 지나치기 쉽지 않을 게다.
다 읽고 책장에 꽂아 뒀더니 언제 봤는지 아이도 이 책을 꺼내 읽고 있다. 여행안내서인 줄도 모르고, 처음엔 다홍색 표지가 '촌스러워' 눈에 들어왔단다. 한자를 병기한 일본말이 생소해 읽다가 흐름이 잠시 끊기기는 했어도, 그다지 어렵진 않았단다. 금세 읽더니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다. 나중에 커서 이런 여행안내서를 쓰려고 했다면서 자기가 꿈꾸고 있던 바로 그 책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게 뭐냐고 물으니, 생뚱맞게 각 코스를 상징하는 독특한 문양의 '스탬프'라고 답했다. 열다섯 개 코스의 스탬프를 모두 받게 된다면 '훈장'처럼 뿌듯할 것 같다면서, 나중에 완주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슬쩍 내비쳤다. 다만, 제주 올레처럼 이어져 있지 않고 각각 외따로 있어 완주하려면 열다섯 번이나 규슈를 찾아야 한다는 게 어째 좀 상술 같다며 능청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우리 가족의 다음 여행지는 규슈가 될 것 같다. 아이는 허락도 안 받고 책 뒤에 붙어있는 '미니 가이드맵북'을 오려갔다. 늘 그래 왔듯, 틈틈이 컴퓨터를 켜고 구글 지도를 열어 곳곳을 검색할 것이다. 그러고는 열다섯 코스 중 몇 군데를 지목해 가보자고 조를 것이다. 당장 가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좋은 여행안내서의 첫 번째 기준이라면, 이 책 <규슈 올레>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것 같다. 세상은 넓고, 가볼 곳은 정말 많다.
덧붙이는 글 | <규슈올레>(손민호 / 중앙북스 / 2015.09. /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