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누하동에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주인공 승민과 서연이 아지트로 삼았던 한옥이 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꽉 찰 정도로 좁은 골목길을 돌아 걸어가면 기와지붕에 목재 대문이 있는 조그만 한옥들이 등장한다. 경복궁 서쪽에 있다 하여 '서촌'이라 불리는 이곳 한옥마을은 청와대 인근 고도제한으로 조선 시대 거주지의 모습이 남아있다.
출퇴근하는 내시들을 위한 작은 집들서촌 한옥은 고래 등 같은 북촌 기와집과는 대조를 이룬다. 북촌에는 사대부가, 서촌에는 중인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궐 밖에서 출퇴근하는 관리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왕을 가장 가까이서 돕는 임무를 맡은 내시도 서촌에 살면서 궁궐을 출입했다. 서촌 남쪽인 효자동, 체부동, 누하동 일대는 10평 남짓한 한옥의 밀집 지역이다. 내시들도 가정을 이룬 사람이 많았으나, 자식 없는 설움을 양자를 들여 달래는 수밖에 없었으니 집의 크기에 굳이 연연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내시는 궁궐에서 유숙하며 교대 없이 근무하는 장번(長番)내시와 궁 밖에서 출퇴근하는 출입번내시가 있었다. 김종직의 <내반원기>(內班院記) 서문에서 "내시부를 영추문 밖에 두었다"고 적고 있는데 오늘날 효자동 일대가 내시 거주지역이었음을 뜻한다. 정조 때 편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같은 지역을 가리킨다. 경복궁 경회루 남문의 서쪽에 내시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종로구 통인동과 효자동 근처가 이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북부의 준수방, 즉 인왕산 동쪽 아래편에 내시부가 있었다고 서술한다.
필요한 공간만을 차지하여 살다
서촌 남쪽의 내시 거주지는 소박하다. 주거 공간이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실무적 기능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촌 내 '쌍둥이 한옥'으로 알려진 누하동 162번지는 기역 형태의 6.5평짜리 소형 한옥 두 채가 나란히 붙어있다. 마을 사람들은 내시가 거주한 집이라고 이야기한다.
2009년 한옥 지원정책으로 '쌍둥이 한옥' 신축 의뢰를 받은 서울 한옥 황인범 대표는 "이 집에 내시가 살았다는 얘기가 예전부터 있었다"며 "60년대까지만 해도 서촌 한옥마을에 내시가 있었고 이 집은 한 사람이 살만한 조그만 크기의 한옥인 점으로 보아 합리적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건축 평론가인 에드윈 헤스코트는 자신의 책 <집을 철학하다>에서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기이한 측면이자 우리와 집의 관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변모한 측면은 거주지를 자산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저자의 시각으로 볼 때 소박한 크기의 내시촌은 현대 주거공간과 대조를 이룬다.
집은 투기와 과시의 대상이 됐다. '전세대란'으로 자신이 살 공간조차 구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다. 반면 살지 않는 집을 몇 채씩 소유하거나 강남의 유명 아파트에 필요 이상 평수로 사는 사람도 많다.
미디어가 만든 우스꽝스러운 모습
거세된 남자로 궁정 업무 전반을 담당하는 직책을 뜻하는 환관과 내시가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조선 시대부터였다. 고려 시대 내시는 유학을 공부하여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거나 왕을 대신해 궁궐 밖 민심을 살피고, 각종 사건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공민왕 5년(1356)에 새로 설치된 환관의 관청이 '내시부'로 불리면서 내시부 소속인 환관과 본래의 내시가 혼동되기 시작했다. 내시는 환관의 별칭이 되고, 본래의 내시는 고유의 역할과 지위를 잃어버렸다. 조선 세조 12년(1466) 내시원 폐지로 고려의 내시는 사라졌다. 그 후 내시는 환관의 동의어가 됐다.
"전쟁에 나갔다 그만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올해 초 방송된 한국방송(KBS) <개그콘서트> '왕입니다요' 코너에 등장한 '정 내시'는 자신이 내시가 된 배경을 그렇게 밝힌다. 실제로 중국처럼 궁형이 없었던 조선 시대의 내시 중에는, 어릴 적 사고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남성을 상실한 이들은 수염이 없고 중성적인 비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미디어에 나타난 이들의 외양적 묘사는 구부정한 어깨와 왜소한 몸집으로 임금을 따라다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직언하다 처형당한 김처선과 김순손
하지만 역사가 기억하는 내시는 다르다.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 시대에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한 이들이 있는데 바로 내시 김처선과 김순손이다.
김처선은 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내시로 수백 명을 통솔하는 내시부의 수장이었다. 그는 처용 놀이를 하며 음란한 짓을 하는 연산군에게 바른말을 한 대가로 다리와 혀가 잘려 죽었다. 부모의 묘까지 헐렸다. 자신의 안위보다 자신이 보필하는 국왕의 바른 정치를 간절히 바랐던 그는 입궐하기 전 아내인 정부인 서 씨에게 자기 죽음을 예견하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부인, 전하께서 주색에 빠져 정치가 어지러우니 내 오늘은 입궐하여 바른말로 아뢸 것이오. 혹시 내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구려."상중인데도 문란한 생활을 하는 연산군의 행동을 만류한 김순손 역시 충직한 내시였다. 본래부터 심지가 곧기로 유명한 김순손은 연산군의 탈선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왕명을 어긴 죄로 제주도 목마장에 보내져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후에 참수당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그의 뼛가루를 강 건너에 날리는 '쇄골표풍'을 명했다. 김순손의 충절은 후대에 다시 평가받는다. 1510년 중종은 그를 직신(直臣)이라 호칭하게 했으며 내시부 최고위직인 종2품의 '상선'에 추증했다.
내시는 조선 왕조 500년 흥망성쇠를 함께한 이들이었다. 법률상 내시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다. 재산 축적을 삶의 목표로 삼지 않았던 그들의 실용적인 자세와 왕을 향한 강직한 충심은 서촌 한옥마을의 좁은 골목길과 10평 남짓한 크기의 소박한 한옥에 여전히 남아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