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역사란 객관적일 수 없으며 주관적이란 걸 압니다. 인간의 시야란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역사적 '사실'은 단번에 포착할 수 없는 거대한 강물과 같다는 걸 압니다. 손에 묻은 물기의 무늬들을 보며 상념에 잠기듯, 그저 남겨진 역사적 흔적들의 중요성을 판별하고 선택해 겸손하게 해석만 할 따름이란 걸 압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역사적 해석들에는 '살아 숨 쉬는' 가치관과 철학 또 시대정신이 반영돼 있다는 걸 압니다. 사람들은 서로 생각을 나누면서 높은 정신의 품격으로 고양되고, 때로는 갈등에 빠질 수 있을망정 역동적이고 '리듬감'있게 살아간다는 걸 압니다. 리듬감 없는 역사는 죽은 '사념체'(死念體)일 뿐이라는 걸 압니다.
말싸움을 능수능란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히 진리와 정의를 참칭하며, 국민을 기망하고 내려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국정교과서를 도입하려는 정부·여당이지요. 이들은 진중한 학술적 논쟁으로, 자신들의 설득력을 높일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학문을 이념으로 몰고 가고, '종북 검정교과서'가 없는 데도 있다며 흑색선전을 일삼습니다. 나라는 분열됐고, 대통령은 어김없이 해외순방 중입니다.
정부·여당의 무리수 뒤에는, 박근혜 정권의 정치적 '실패'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공약을 지키지 못하니 남는 건 '정신승리'뿐입니다. 가장 강력한 정신승리는 역사의 조작입니다. 그들은 '삶의 리듬감'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꼰대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변하며, 삶은 공수래공수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꼰대들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인 '삶의 리듬감'을 '혼란과 분열'로 폄하합니다. '고정불변하고 절대적인' 어떤 올바름이라는 망상을 만듭니다. 꼰대 자신은 죽어도, 꼰대의 미화된 이미지는 '정신 식민지화'를 통해 영원히 존재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 봤자 모든 꼰대는 죽을 뿐이며, 그저 꼰대의 욕심 때문에 민초들만 고통받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정신 식민지화는 민초들이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기회만 박탈합니다. 그래서 양심 있는 학자라면, 일제 식민지배와 박정희 군사독재를 경제발전과 잘 연관시키지 않습니다. 일제와 박정희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은, 공동체 구성원 전반을 고려할 때 '미미'합니다. "5.16혁명이 없었다면"(김무성 왈) 나라 잘못됐을 거라는 서사는 역사라기보다는 판타지 소설입니다.
한국은 나라님, 회장님 신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프랑스인 에리크 쉬르데주가 10년간 한국에서 일한 경험으로 <한국인은 미쳤다>에서 지적했듯, 노동자들은 조직의 부품 정도로만 취급됩니다. 지도자의 노동은 과대평가되고, 노동자들의 노동은 과소평가됩니다.
'박정희는 반인반신' '5.16은 혁명'이라는, 인물중심 사관에서 수천만 민초들은 들러리가 되고 박정희는 신이 됩니다. 경제과실을 분배할 때 노동자들의 노동생산성은 엄혹히 따지지만, 정작 회장님의 업적은 '기업가정신' 같은 얼렁뚱땅 신비주의적 환상으로 수렴됩니다.
민초들은 '박정희'를 영접하며 대리만족과 추억이나 젖어들면서, '산업화의 주역' 따위의 실질은 없는 립서비스에 만족하게 됩니다. 역사에서 박정희 경제정책을 덜 조명하는 이유는, 그가 경제발전의 영광을 독차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반의 지도자에 대한 신앙심을 걷어치우고, 민초들의 기여와 권리를 더 공정하게 조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 독재자를 비판적으로 보고 현재의 타산으로 삼는 건, 자학적인 게 아니라 영리한 전략이지요.
꼰대들은 합성·보정 효과라도 노리는 걸까요? 박정희 군사독재 서술 근처에 경제발전을 넣는 '끼워 팔기'든, 근현대사에서 아예 정치사 비중을 줄이는 '기억 지우기'든, 이 작업은 결국 역사 서술의 비율을 조작하게 됩니다. 양쪽 모두 식민지배와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약화시키는 '물타기 사관'이 될 것이니, 야당은 이걸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공정함'이라는 물타기와 '긍정사관'이라는 함정에 국민들이 빠지지 않게 하려면, 이를 받아칠 '금수저 사관' '정신승리 사관' '물타기 사관' '끼워팔기 사관' '기억삭제 사관' 등 재해석된 언어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의 대부분은, 말싸움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탈교과서'가 우리의 탈출구일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말싸움만으로 충분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야당은 현재 '친일·독재 미화 반대' 프레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옳은 말도 중요하지만 민초들에게 좋은 말을 해줘서 신뢰를 주는 게 중요합니다. 좋은 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민초들 삶의 '실질'을 개선해주는 대안을 말합니다. 야당은 현재 '상상력'이 부족합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빙하기 마지막 인류가 '설국열차' 안에서 꼬리 칸 사람들과 머리 칸 사람들이 한정된 자원을 놓고 박 터지게 싸우지요. 그런데 아무도 세상이 녹고 있는데 눈치채지도 열차 밖으로 나가겠다는 생각도 못 합니다. 오직 열차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사상가의 은유)만이 인화물질인 크로놀(철학 사상의 은유)을 모으며 탈출 계획을 세울 뿐입니다.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만 있지 않습니다. 말 잘하는 명문대 출신과 지방대 출신 사이에도 있을 수 있으며(학벌 정치), 80년대 운동권 '자의식'을 가진 사람과 청년 신입 당원 사이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짬의 정치). 이제 80년대에 운동을 했던 김씨·홍씨·박씨·최씨 등은 남더라도, '운동권'이라는 언어 자체는 탈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함으로써 연대할 수 있는 언어로 말입니다.
자의식 과잉은 구분을 만들고, 구분은 경계를 만들며, 경계는 분열을 만듭니다. 그래서 정치에서 '언어'의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새로운 연대를 만들려면,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야 합니다. 공통의 관심사를 찾으려면, 신선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 특히 청년들과 다양한 의제를 교환해 승률을 높여야 합니다.
신선한 생각을 지닌 청년들을 많이 내 편으로 만들려면, 교육의 눈을 돌려야 하고 그러다 보면 여전히 교과서라는 <설국열차>를 벗어나지 못한 채 뭘 '더 넣느냐 빼느냐' 싸우는 게 실질이 없다는 걸 통찰해야 합니다. 지금 야당에게 필요한 건 더 공격적인 대안입니다. 꼰대들이 '국정교과서'를 들고나오면, '친일·독재 미화'로 받아만 칠 게 아니라 의제를 선점하고, 국민들을 '실질'을 앞세워 설득해야 합니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건 '탈교과서'입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해방시켜주자는 겁니다. 리듬감을 경험할 수 있게끔 토론 교육을 정착시키자는 겁니다. 학부모들의 사교육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교사의 자율권을 늘리자는 겁니다. 역사·철학 교사들을 더 임용해 덤으로 '인구론'(인문계 90%가 논다)도 좀 해소하자는 겁니다.
개인들이 역사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과 철학을 가질 기회를 박탈하는 주입식 교육, 성적을 매기고 줄을 세워야 한다는 발상은 '미개'합니다. 역사 과목에서만큼은 교과서를 없애고, 성적은 합불(P/F)만 평가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역사 지식을 주입하기보다,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근거들을 능동적으로 수집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논거를 갖춰 토론에 임하게끔 유도하는 '역사철학적' 전환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의 쇠사슬을 끊어주자는 겁니다.
프랑스와 독일에는 우리가 검토해볼 만한 철학교육·작문교육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교육을 받은 이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수준 높은 교양인으로서 스스로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힙니다. 아이들이 남의 꿈만 좇는 노예가 아닌, 자신들의 꿈을 말할 수 있는 주인이 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야당은 <설국열차> 안에서의 싸움이 아닌 탈출구를 주목해주세요. 여기에 귀 기울여줄 '진정성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요즘 청년들 사이에 '헬조선'과 '탈조선'이라는 말이 급부상했습니다. 탈교과서가 진정한 탈조선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