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인천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평 미군기지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기지촌 출신 혼혈인들의 삶과 그들의 절규를 담아내고자 기획취재를 진행한다. 이와 관련한 기사를 몇 차례 연재한다. -기자 말애스컴 시티 배경 혼혈아 성장 소설 출간 예정"한국전쟁이 끝나고 15년이 지나 한국인 '기지촌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버지 없는 흑인 남자아이가 있었다. 오랜 시간 엄마가 일하는 동안 친구들과 어울려 캠프타운(애스컴 시티) 근처를 배회하며 싸우고 도둑질하고 술을 마셨다. 여덟 살에 텍사스-워싱턴의 흑인 미군 가정에 입양될 때까지 누구도 이 아이를 책임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엄마를 잃은 'slicky boy(떠돌이 아이)'는 남은 생을 함께 보낼 다른 엄마(입양해줄 엄마)를 찾고 있다."1968년 인천 부평 '애스컴 시티(ASCOM City)'에서 태어나 1978년 입양됐다가 그다음해 미국으로 입양된 밀톤 워싱톤(Milton Washington)이 구상 중인 책의 이야기다. 그를 지난달 26일(현지시각) 미국에서 열린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에서 만났다. 그의 생모가 생존했다면 올해로 88세다. 그는 애스컴 시티에서의 어린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그래도 신촌(현 부평구 부평3동)에서 친구들과 놀았다. 딱지치기하고, 술을 훔치고, 다른 동네 아이들과 싸웠던 것이 기억난다. 어릴 때 신촌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배경으로 해서 나의 성장 소설을 쓸 것이다. 애스컴 시티가 배경이 될 것이다."
그는 그의 생모가 '기지촌 여성'임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가 미군과 함께 잠자리를 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방 한 칸에 살았던 거 같다. 엄마는 날 사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양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공부하기 힘들어했는데, 양부모와 가족 전체가 부지런했고 성실했다. 이런 환경을 제공한 가족들에게 감사한다."1945년 9월 일본군 조병창을 접수한 미군은 부평을 군수기지로 활용했다. 38도선 이남 지역의 점령 임무를 맡은 미 24군단 중에서 인천지역을 맡았던 부대가 24군수지원사령부(ASCOM 24)다. 한국전쟁 중에 잠시 3군수사령부(The 3rd Logistical Command)가 설치되기도 했다. 곧 기지가 재편되면서 애스컴 시티로 정착해갔다. 애스컴에는 병력대기소도 설치돼 있었기에 미국에서 건너온 병사들이 여기를 거쳐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물자가 넘치는 곳에 사람도 몰리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 조병창과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애스컴 시티로 몰려들었다.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아 돈을 벌려는 '기지촌 여성'들도 모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혼혈인이 태어났다. 혈통 중심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대부분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미국 등으로 입양됐다. 이제 성장한 그들은 자신의 생모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57년 전 헤어진 어머니를 찾습니다... 1958년 미국으로 입양된 김경순씨지난 7월 17일 미국에 있는 'ME&KOREA'의 대표 김민영씨가 강화도를 방문했다. 김씨는 미국으로 입양된 김경순(Noel Cross)씨와 함께 김경순씨가 태어난 강화도를 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경순씨는 몸이 좋지 않아 오지 못했다.
1956년 강화도에서 태어난 김경순씨는 2년 뒤 충현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생모는 당시 26세의 미망인으로 성격이 온화하고 조용했다고 한다. 생모는 경제적 사정으로 김경순씨와 김경순씨의 의붓동생을 키울 수 없자 강화읍에 있는 성공회성당 서양인 신부(고요한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생모는 당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서 살았고, 이름은 김행주 또는 김향주로 추측된다. 생존했다면 올해 83세다.
김민영씨는 김경순씨가 몇 해 전에 강화도에 왔을 때 쓴 글을 보여줬다.
"내가 태어난 강화에 가봤다. 그곳에서 엄마가 걸었을 길을 걸었고, 엄마가 나를 두고 떠났던 교회 계단도 올랐고, 그곳의 산과 바다의 냄새도 맡았다. 어떤 사람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이 일이 한국에 아무도 없는 나에겐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지난 (7월) 9일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힘들었다. 난 잘 우는 사람은 아닌데, 그날은 슬픔과 기쁨이 섞인 눈물을 많이 흘렸다. 어머니와 살던 곳, 강화를 방문해 성공회성당도 가보고 강화읍의 거리도 걸었다."한국전쟁 후 강화도에도 미군이 상당수 주둔했다. 과거 기지촌 주변의 흔적들이 제법 남아 있다. 하지만 강화도에 미군기지가 있었고, 기지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서 만난 박아무개 노인은 "워낙 오래된 일이라 알 만한 사람이 몇 안 남았지. 김행주라는 이름은 모르겠고, 김행자라는 이름은 기억이 나네. 그때 일을 알려면 80세가 넘어야하는데, 강화읍에 사는 A 할머니가 알고 있을 거야"라며 A 할머니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그 노인은 "당시 이곳이 흥청거렸지. 양색시가 100명이 넘었으니까. 강화읍에서도 이곳으로 놀러오곤 했어"라고 말했다. 당시 사용하던 공중화장실과 세탁소 자리, '기지촌 여성'들이 살았던 집들의 위치를 알려줬다.
A 할머니는 멀리서 찾아온 김민영씨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고, 미군기지 얘기가 나오자 문을 닫아버렸다.
고려산 자락엔 아직도 미군 레이더 기지가 있다. 부평미군기지 노무자들이 지금도 이 기지의 공사 등을 담당한다. 일반인의 접근은 완전히 차단돼있다.
김민영씨는 "그래도 성과가 있었다. 살던 동네와 그때 일들을 기억하는 이들을 만났으니 김경순씨가 기뻐할 거다"라고 말했다.
입양 수출 대국, 대한민국의 민낯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가난에 허덕였다. 부모 잃은 아이뿐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한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정부는 이들을 대거 입양 보냈다. 전쟁 피해 복구가 끝나고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 이후엔 오히려 입양이 늘었다. 같은 전쟁의 참화를 겪은 북한이나 베트남은 한국처럼 대규모로 입양을 보내지는 않았다.
2013년 보건복지부 입양 통계를 보면, 2012년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은 집계된 수만 16만5367명이다. 국내 입양은 7만7082명으로 해외 입양의 절반도 안 된다.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해외 입양된 것을 감안하면, 해외 입양 아동의 수는 더 된다.
이로 인해 한국은 '아동 수출국'이란 오명을 안게 됐다.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IT 강국임을 자랑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아이를 해외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 취재과정에서 만난 입양 혼혈인들은 자신을 버린 한국에 대한 애증을 드러냈다. 한국에 꼭 가보고 싶다는 의지도 보였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첫 장을 찾으러 한국에 가고 싶다. 내가 태어난 곳, 엄마의 고향, 내가 뛰어다녔던 골목, 엄마가 생활했던 곳. 엄마가 걸었던 곳을 나도 걸어보고 싶다. 나나 엄마가 봤을 산이나 바다, 골목을 보고 싶다"입양 혼혈인으로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에 참석한 수지 게이지(Sue-Je Lee Gagem) 이타카대학 인류학과 교수는 "자라면서 어머니가 나를 떠났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직도 남동생과 여동생의 손을 잡고 나를 떠났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미혼모의 삶은 힘들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 기사]"기지촌 여성 정보, 한국에선 왜 찾을 수 없나""미군 성접대가 애국" 정부가 '위안부' 부추겼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