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경북 영양에 다녀왔다. 이번 탐방은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경북 구미시립도서관에서 기획한 행사였다. 이번 탐방 제목은 "멋과 지조의 시인 조지훈을 만나다"였다. 강연과 인솔을 담당한 김문주 교수는 현재 영남대학교 국문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정지용과 조지훈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집필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원면 주곡리에 위치한 주실마을이다. 영양에서도 작은 마을인 주실마을에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 호은고택이 있다. 그 밖에도 주실마을에는 옥천고택, 월록서당과 같은 오래된 건축물 있다. 또한 조지훈을 기리는 지훈문학관과 조지훈의 시가 곳곳에 새겨진 시비가 있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지사' 조지훈,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라"
조지훈의 본명은 조동탁이다. 그는 1920년 경북 영양에서 출생했다. 주실마을은 조선시대에 한양 조씨 일가들이 만든 마을이다. 조선 중종 시대에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정암 조광조의 친척들이 사화를 피해서 영주와 영양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조지훈의 가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남인계열에 속했다. 조지훈의 증조부는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경북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조지훈의 조부는 유학자였지만, 개화 사상을 받아들여서 고향에서 젊은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은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6.25 전쟁 당시 납북된 이후 북에서 한의학을 연구했다.
조지훈은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다.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다양한 서구 문학작품을 접했다. 그는 1939년과 1940년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한다. <봉황수>는 주권을 상실한 식민지 청년의 슬픔이 스며들어 있다. 정지용은 일본 강점기 시대에 우리말로 우리의 정서를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던 거미줄 친 옥좌(玉座)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 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 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십품(從十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봉황수>조지훈의 시에는 민족정서, 전통에 대한 향수, 불가 사상이 스며들어 있다. 조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학문을 다져나간다. 태평양 전쟁 시절에는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조선어큰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한다.
조지훈은 광복이 되자, 국어와 국사 편찬원이 되어 국어와 국사 교과서를 편찬하는 작업을 한다. 이후 조지훈은 고려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한다. 조지훈은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부정과 부패를 질타했다. 이 시기에 조지훈은 수필 <지조론>을 발표했으며, 사회에 참여하는 지사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 당시 발표한 <잠언>은 그의 지사적인 성품을 대변한다.
잠언 너희 그 착하디 착한 마음을 짓밟는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라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세상에 그것을 그런 양하려는 너의 그 더러운 마음을 고발하라 보리를 콩이라고 짐짓 눈감으려는 너희 그 거짓 초연한 마음을 침 뱉으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둥근 돌은 굴러서 떨어지는니 병든 세월에 포용되지 말고 너희 양심을 끝까지 소인의 칼날 앞에 겨누라 먼저 너 자신의 더러운 마음에 저항하라 사륵한 마음을 고발하라 그리고 통곡하라 사시사철 어느 때라도 주실마을에 가면 조지훈을 만날 수 있다. 조지훈이 태어난 호은고택과 그가 어린 시절 공부한 월록서당, 그리고 그가 산책하던 주실마을 뒷동산에는 그의 시가 새겨진 돌이 곳곳에 있다. 주실마을 입구에 있는 주실마을 숲은 조지훈을 만나는 과거로의 여행의 통로가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경수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hunlaw.tistory.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