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일 년 전이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 날 나는 서울 신촌의 한 건물 옥상에 올라가 박 대통령 풍자 전단을 빗줄기에 담아 뿌렸다. 딱히 무슨 대단한 신념에서라기 보다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마음이었다.
정신없이 전단을 허공에 뿌려대고 나니까 뭔가 후련해졌다. 이 답답한 세계를 향해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소리친 느낌이었다. 흡사 아무도 없는 숲을 향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전래동화 속 신하의 마음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얼마 후 '건조물침입죄'라는 혐의를 받고 마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내가 잊은 것이 있었다. 지금 내가 사는 사회는 전래동화에 나오는 그 옛날보다 더 억압된 사회라는 사실 말이다(관련 기사 :
'박근혜 풍자 포스터' 옥상에서 뿌렸더니...).
경찰 조사가 끝나고 난 올해 2월, 나는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딱히 기쁘지도 않았고 그냥 덤덤한 심정이었다. 고작 저런 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부터가 한심한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비슷한 사건으로 고통받는 분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만 혼자 무혐의가 되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26일,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납벌과금 납부명령서'라는 것을 받았다. 나 혼자 풀려났다는 죄스러움을 면해줄 요량이었던지 검찰은 무혐의로 끝난 내 사건을 갑자기 재수사했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약식기소와 함께 벌금형 300만 원에 처했다.
나 같은 서민들에게 300만 원이라는 벌금이 주는 심리적 압박은 상당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한 건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포스터 뿌리고 벌금형, 지지 않기 위해서 싸우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비참했던 것은, 용납하기 힘든 이 처사에 대한 분노 이전에 겁이 먼저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바로 서민들의 슬픈 생리다. 벌금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알리면서 싸우는 것보다 돈을 마련하는 방법과 혹시 줄일 수는 없는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더 싸울 수 있는 여력이 내게 있는가를 고민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대다수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생활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벌금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장 정식재판을 청구해야 한다. 적지 않은 변호사 수임료를 생각한다면 변호사 도움 없이 나 혼자 재판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현재 나는 제주의 시골마을에 살면서 작은 떡볶이 가게를 운영 중이다. 한 달 수입이라고 해봐야 도시근로자 평균 소득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덜 일하는 대신 더 놀자'는 생각으로 제주에 내려온 것이므로 크게 불만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홀로 재판을 준비하고 결국 이겼을 때, 과연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왕복 항공료와 서울 체류비용, 또 그로 인한 휴무로 인해 매출 감소를 생각한다면 그걸 과연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이유로 가난한 서민들은 대개 참는다. 참고 싶어서 참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 전단을 뿌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만약 이런 일을 참았을 때 찾아올,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이 너무도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이기기 위해서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지지 않기 위해서 재판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져버리면 최소한의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로 표현의 자유다.
지금은 왕조 시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 시대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므로 비판받을 수 있고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국격을 핑계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힘들더라도 참고 견디면 언젠가 좋은 결과가 온다'는 식의 명제를 학습 받고 자라왔다. 그리고는 힘든 환경에서도 잘 참고, 잘 견디고, 불평·불만도 않는, 언제나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연 좋은 결과가 지금 우리에게 놓여 있나? 대체 얼마나 더 참고 견뎌야 좋은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이제는 눈치챌 때가 되었다. 그것이 더 많은 노예를, 더 오랫동안 부리기 위한 술책이었음을 말이다. 나는 그런 세상을 더는 참을 수 없고 동조할 수 없다. 그래서 싸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