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베르너 홀츠바르트 글/ 볼프 에를브루흐 그림
▲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베르너 홀츠바르트 글/ 볼프 에를브루흐 그림
ⓒ 사계절 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처음 이 그림책을 보았을 때, 키득키득 웃음부터 나왔다. 똥모자를 쓴 두더지의 화난 표정이 꼭 누군가의 얼굴 같았기 때문이다. 똥 밟은 표정 짓지마, 라는 말도 있잖니. 밟은 것도 기분 나쁜데, 똥덩어리를 머리에 이고 있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찝찝한 기분일까. 그 똥이 두더지의 머리 위로 불시착한 이유가 궁금해 얼른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이 안경 쓴 두더지 좀 봐. 다른 동물들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네가 내 머리에 똥 쌌지? 이 얼마나 낯 뜨거운 직설법인가! 감정의 군더더기 없이 파고드는 날카로운 물음이라니. 그것은 눈이 나쁜 두더지가 선택한 날 것 그대로의 솔직함이었다. 두더지는 똥모자를 쓴 창피함 대신 노상방변을 감행한 범인을 찾고 싶었다.

이 질문을 받은 동물들의 대답 역시 기가 찰 노릇이다. 나? 아니야. 내가 왜? 내 똥은 이렇게 생겼는걸. 동물들의 얼굴이 제 각각이듯 똥의 모양도 다 달랐다. 솔직함의 극치에 도달한 이 동물들의 설문설답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두더지가 알고 싶은 궁극적인 실체를 거리낌 없이 보여주다니, 과히 득도의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두더지의 험난한 여정에 마침표를 찍어준 이는 바로 파리였다. 세상의 모든 똥을 섭렵한 파리가 말했다. 이건 개의 똥이야! 두더지는 얼른 똥모자를 벗어던졌다. 드디어 복수혈전을 벌일 절호의 찬스를 맞이한 셈이었다. 두더지의 똥모자보다 몇 배는 더 큰 것이어야 속이 후련할 텐데. 개의 집을 향해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채로, 두더지는 장렬한 한방을 날려 보냈다.

그런데 두더지의 똥을 보려무나. 고작 까만 곶감 씨 같은 똥이라니. 그건 두더지의 야심찬 포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초라했다. 커다란 개의 머리에 두더지의 똥은 작은 먼지에 불과했다. 바람에 실려 온 먼지쪼가리에 꿀맛 같은 단잠이 토막 날 리 없었다.

이런 소심한 복수를 하자고 자기 머리만한 똥을 짊어지는 고생을 했다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허무한 결말을 위로해주기 위해, 작가는 두더지의 똥에 반짝거리는 표시를 해두었다. 지저분한 똥 덩어리에 지친 독자를 위해 유쾌한 웃음의 코드를 달아두었다. 작가의 마지막 선물에 하하하, 큰 웃음으로 화답할 밖에!

똥, 이야기 하면 엄마도 과히 할 말이 많다. 너는 아가였을 때 묽은 똥을 많이도 쌌다. 모유를 먹어서 그랬을까. 젖을 물리고 나면 바로 기저귀를 갈았다. 한 차례 젖을 물리면 엄마의 배는 푹 껴져 버렸다. 자석에 이끌리듯 밥통 앞으로 달려갔다. 밥 먹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던 너는 속이 허전한지 다시 칭얼거렸다. 그 칭얼거림에 안절부절 하다 젖을 물린 채로 밥을 먹었던 적도 있다. 젖이 물젖이라 분유로 바꿔보라는 주위의 조언도 있었다. 늦은 밤, 컴퓨터 앞에 앉아 이곳저곳을 클릭할 때였다. 그때 우연히 이 글귀를 만났다.

'빈자의 젖이나 부자의 젖이나 모두 똑같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다.'

웰빙의 붐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국민 모두가 건강한 음식에 열광을 보냈다. 산모가 섭취한 영양이 그대로 모유 성분이 되는지 불안스러웠다. 우연히 만난 이 글귀는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안도감을 주었다. 의학적으로 맞는지 잘 모르면서도, 왠지 그 말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때 엄마는 황금색의 찰진 똥이 간절히 보고 싶었다. 모유를 먹는 아기의 똥은 분유를 먹는 아기와는 달랐다. 별 걸 다 마음 쓰는 것이 미련스럽지만, 뭐든 처음이라 조심스러웠다. 네가 조금씩 커가면서 똥의 묽기도 단단해져 한시름 놓았지만 말이다.

이제 원초적인 이야기는 접어두고, 고차원적인 감정의 배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배설, 이라는 원초적인 단어를 감정이라는 형이상학적인 단어와 연결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배설은 음식의 소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들어온 만큼 내보내야 조화로운 섭생의 질서가 유지된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독이 되지 않으려면, 표현하고 드러내야 한다.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려야 한다. 감정의 찌꺼기를 버려야 할 순간,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찌꺼기를 어떻게 버릴 것인가. 다른 이의 머리 위로 아무렇게나 떨어뜨리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 자신에게 화를 낼 때의 상황이란 두더지가 갑작스럽게 맞는 똥벼락과 비슷하다. 아니, 왜 나한테 그러지? 황당하기까지 하다. 인간의 마음은 눈먼 두더지와 같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 위에 놓인 똥 뭉치를 보지 못하는 두더지의 처지와 비슷하다. 저 쪽에서 날아왔는데 무슨 의미로 던져졌는지, 헤아리기가 어렵다.

두더지의 똥모자는 날벼락처럼 날아든 감정의 배설물이다. 똥모자의 정체를 알기 위해 두더지는 온전히 똥을 머리에 짊어졌다. 솔직하게 자신의 궁금증을 다른 동물들에게 보여주었다. 불쾌한 기분에 빠져 인상을 찡그리며 똥모자를 벗어던졌다면 말이야. 두더지의 마음속에 생겨난 똥모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영영 해결하지 못했을 거야.

공부하기 싫었던 너는 엄마에게 투덜거렸다.
"이딴 걸 왜 외우라는 거야? 이걸 어떻게 외워? "
엉겁결에 쏟아 놓은 그 말의 후폭풍을 넌 짐작조차 못했겠지. 장황한 잔소리가 시작될 즈음, 넌 엄마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또 시작이야. 내가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되는데?"
음식의 소화 과정과 달리 뇌의 인식 과정은 노력 없이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냐고 말할 때였다. 이만하면 알아차렸겠지! 명쾌한 설명에 나름 흡족할 때였다.
"그래서 엄마는 성공했어?"
그 순간 엄마의 가슴은 산산이 부서졌다. 복수의 펀치라도 날릴 태세로 퍼부었던 엄마의 말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너 그거 똥 싼 거야."

이해하지는 못하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부모의 권위에 대해 비판할만큼 너는 훌쩍 자란 거겠지. 까발려진 엉덩이의 맨살을 본 것 같아 순간 어쩔 줄 모르고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고작 그런 낯뜨거운 말로 협박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이 한 밤의 치열한 공방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우리가 서로에게 쏟아부은 감정의 배설물을 들여다보게 되는구나. 그 순간 엄마는 네가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식의 헤아림은 할 수 없었다. 그저 내 자식의 수준이 이 정도라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감정을 배설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데 그걸 어떻게 할지,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키 작은 두더지의 나쁜 시력으로는 토막토막 조각난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동물들의 입만 혹은 엉덩이밖에 보지 못했다. 그 파격적인 그림의 스케치가 독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섬뜩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두더지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가슴을 스쳤다.

염소를 부분적으로 바라보는 두더지의 시선 속에서 얄팍한 인간의 마음이 엿보였다. 우왕좌왕 하다 자신이 본 것만을 믿으려는 슬픈 눈동자가 그 속에서 번뜩였다. 퍼즐처럼 잘려나간 조각들을 꿰어 맞추느라 머릿속은 늘 어지러웠다. 눈이 나쁘면 두더지처럼 솔직하면 좋은데. 비좁은 시야에 세상 전부가 담겨진다고만 생각했다. 내가 보는 것이 곧 세상이라는 자만에 젖어 있었다. 입 모양만 혹은 엉덩이만 크게 확대하는 자신의 괴상한 시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그때, 답답한 네 마음을 다독거려주지 못해 미안했다. 너는 네 마음을 알아달라는 하소연을 했는데, 엄마는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은 부모의 심정만 헤아렸구나. 엄마의 말이 지나쳤다는 생각도 들고, 성숙한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는구나.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식은 꼭 키워볼 만한 존재이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울프 에를브루흐 그림, 베르너 홀츠바르트 글, 사계절(2002)


태그:#사춘기 , #감정, #부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