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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이 차린 밥상. 새우전이 달랑 세 개 밖에 없는 이유? 형아가 음식 하는 동안 꽃차남이 다람쥐처럼 부엌을 드나들며 다 집어먹었기 때문이다.
 제굴이 차린 밥상. 새우전이 달랑 세 개 밖에 없는 이유? 형아가 음식 하는 동안 꽃차남이 다람쥐처럼 부엌을 드나들며 다 집어먹었기 때문이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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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수학여행 가면 영어학원 어떻게 할 거예요? 갈 거예요? 꽃차남 누가 봐요?"
"(웃음) 네가 봐야지. 서울이 무슨 달나라냐? 가깝잖아. 너는 서울에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엄마가 학원 갈 시간에 군산 와서, 꽃차남 보면 되지. 엄마 오면, 다시 서울 숙소로 가고."
"진짜 장난 아니라고요!"

제굴은 하루에 다섯 번 이상 꽃차남을 윽박지른다. 성질나면, 꽃차남 몸에 '터치'도 한다. 그런데도 3박 4일간 수학여행을 가려니까 꽃차남이 걸린단다. 나 때문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영어학원에 간다. 일 끝나고 저녁 시간에 간다. 무결석, 무지각주의자라서 바쁜 날은 저녁밥도 안 먹고 간다. 그때마다 일곱 살 먹은 꽃차남을 돌본 사람이 제굴이다.

훈훈한 형제애는 페이크(속임수)였다. 수학여행을 간 제굴은 단 한 통의 전화도 걸어오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보내는 문자도 모조리 '쌩깠다'. 10월 16일, 제굴이가 나흘 만에 집에 와서 한 첫 마디는 "오늘 수민이네 집에 가서 자도 돼요?"였다. 나는 제굴을 째려보는 걸로 답을 했다. 남편은 "며칠 만에 왔으니까 식구들이랑 자야지" 하며 달랬다. 

다음 날, 제굴은 여독을 풀기 위해서 제 방과 거실 소파를 오가며 잤다. 해 질 녘에야 벌떡 일어났다. 수민의 전화를 받고서 "엄마, 수민이 밥 안 먹었는데 우리 집 앞이래요" 하면서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모차렐라 치즈와 토마토를 꺼내서 샐러드를 만들고, 국수를 삶고, 양념장을 만들었다. 신중하게 간을 봤다. 배고프다는 수민에게 자꾸 물었다. 

"수민아, 너는 맵게 먹잖아. 이거 어때? 입맛에 맞아?"   
"셰프 맘대로 해. 맛있겠지."

밥 안 먹은 친구에게 요리해주는 아들 제굴

제굴 친구 수민은 "나 밥 안 먹었어. 니네 집 앞이야" 하면서 갑자기 왔다. 제굴은 수민을 위해서 밥상을 차렸다.
 제굴 친구 수민은 "나 밥 안 먹었어. 니네 집 앞이야" 하면서 갑자기 왔다. 제굴은 수민을 위해서 밥상을 차렸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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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은 다 차려졌는데 수민은 수저를 들지 않고서 나를 봤다. 나는 "고마워, 네 얼굴 안 나오게 찍을게"라고 했다. 수민은 "나와도 돼요" 하면서도 얼굴이 안 나오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수민은 비빔국수를 먹었다. "이런 거 처음 먹는데, 뭐냐?" 하면서 카프레제 샐러드를 먹었다. 카레 밥을 먹었다. 수민은 제굴이가 차린 음식을 모두 완식했다.

나도 제굴처럼 열일곱 살인 적이 있었다. 늘 붙어 다니고 싶은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배고프다는 친구한테 "우리 집에 와, 밥 차려줄게" 한 적은 없다. 떡볶이나 라면을 사 먹는 게 전부였다. 어른이 되고, 아줌마가 되어서도 마찬가지. 때로는 사람 노릇 못 한다는 자괴감이 든다. 그러나 내 아들은 다르다. 음하하핫! 근사한 청소년으로 자랐다.         

제굴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학교 끝나고는 1시간 동안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온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놀이터에 놀고 있는 동생을 데리고 온다. "손발 씻어. 가방 똑바로 안 놔?" 큰소리 치고는 저녁밥을 한다. "형이 한 건 다 맛없어"라면서도 꽃차남은 다람쥐처럼 부엌을 드나든다. 제 형이 한 음식을 접시에 담기도 전에 집어먹는다. 

제굴이 한 '불고기 또띠아'와 갈비.
 제굴이 한 '불고기 또띠아'와 갈비.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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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제굴은 인터넷에서 본 '불고기 또띠아'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적양파가 꼭 필요한데 집 근처 시장과 마트에는 없었다. 그래서 아빠를 따라나섰다. 군산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에 가서 적양파 한 망을 샀다. 제굴 덕분에 우리 식구는 영원히 몰랐을, 멕시코 음식을 먹었다. 또, 제굴은 "고기는 진리야"라면서 냉장고를 뒤졌다. 쇠고기를 꺼내서 갈비를 했다. 

10월 23일 금요일, 제굴은 오전 7시 25분에 카풀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니까 느긋했다. 직업체험활동을 하러 군산 청소년회관으로 갔다. 오전 내내 직업에 대한 강연이 이어졌다고 한다. 서울의 유명 대학에서 온 교수의 강연이었다. 제굴은 "저는 쫌 와 닿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졸리더라고요"라고 했다. 점심 먹을 시간에야 일어났다고.

"오후에는 각자 직업체험 하러 갔어요. 나는 요리학원으로 갔어요. 스무 명 넘게 왔는데 직업 체험 할 게 별로 없으니까 그냥 요리학원에 온 애들도 많았어요."

그날의 요리는 잡채. 학원 선생님이 시범을 보이면, 네다섯 명씩 조를 이룬 학생들이 따라서 했다. 제굴은 '사공이 많아서 잡채가 산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는 '빨리 집에 가서 혼자 만들어 봐야지'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생각한대로 행동하는 게 쉬운가. 직업체험이 끝난 제굴의 몸은 어느새 친구들과 피(시)방에 가 있었다.^^ 

제굴은 주말 내내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놀았다. 다음 월요일 오후에야 잡채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학교에서 돌아온 제굴은 펄펄 끓는 물에 당면을 데쳤다. 당근이랑 호박, 버섯을 채 썰었다. 달걀도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서 지단을 부쳤다. 간장 2, 설탕 1, 마늘, 다진 파, 깨, 참기름을 넣어서 양념장을 만들었다.

"다 만든 양념장은 4개로 나눠요. 그 중에 한 개는 고기 볶을 때 써요. 데친 당면은 양념장 2개를 넣어서 볶아요. 당면에 잡채 색깔 나오면 돼지고기를 넣어서 볶아요. 당근, 양파랑 다 함께 넣고 볶아. 채소 즙이 나와서 물기가 생겨요. 팬 밑을 보면, 양파 물도 나오고요. 그때 당면을 넣어요. 양념장 1개 남았잖아. 이때 넣어요. 다시 팬에다가 돼지고기 재어놨던 거를 볶아요."

"엄마, 잡채는 여섯 가지 요리를 한꺼번에 하는 거랑 같아요"

제굴이 만든 잡채. 너무 먹고 싶어서 플레이팅은 생각하지 않았다. 듬뿍 담기만 해서 봉두난발 같았다.
 제굴이 만든 잡채. 너무 먹고 싶어서 플레이팅은 생각하지 않았다. 듬뿍 담기만 해서 봉두난발 같았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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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나는 밥상 앞에서 입이 딱 벌어졌다. 커다란 접시에 차려진 잡채는 봉두난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플레이팅에 신경 쓰는 제굴 스타일이 아니었다. 독심술이라도 쓰는지, 제굴은 나를 보면서 "너무 먹고 싶어서 막 담은 거예요"라고 했다. 내가 젓가락을 들자마자 제굴은 엄청난 속도로 잡채를 먹었다. 맛있다며 스스로를 치켜세웠다.

배부르게 먹고 기분 좋아진 우리는 식탁에 그대로 앉아서 잡담했다. 제굴은 얼마 전에 나와 대판 싸운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그건 우리 둘의 흑역사예요, 그러니까 이제 서로 고운 말 써요, 성질부터 내지 말고요"라고 했다. 나는 부끄러웠다. 별 거 아닌 일로 제굴과 싸운 거니까. 먼저 미안하다고 못 했으니까. 그래서 말을 돌렸다.

"제굴아. 너 돌 지났을 때, 엄마도 잡채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 있어."
"잡채 정도는? 엄마, 잡채 굉~장히 힘들거든요. 재료 손질 하는 게 반절이야. 여섯 가지 요리를 한꺼번에 하는 거랑 똑같다고요."
"알징~. 아빠가 하는 거 보니까 너무 손이 많이 가는 거야. 그래서 잽싸게 포기했지."

제굴은 잡채 사진을 프린트 했다. 레시피를 영어(담임선생님이 신경 써서 봐 주심)로 쓰기 위해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집어넣었다. 꽃차남을 씻기고, 책을 읽어주고, 재울 준비를 했다. 글 쓴다는 제굴은 스마트폰으로 온라인 게임 '하스스톤'을 보고 있었다. 고운 말을 쓰겠다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강제굴! 뭐하고 있냐고?" 큰소리를 쳤다.

생각해보면, 제굴은 많이 달라졌다. 1학기 때는 아침마다 제굴을 깨우는 게 큰 일, 내 얼굴은 '쓰레기 봉다리'가 되었다. 카풀버스도 자주 놓쳤다. 자동차로 태워다 주거나 택시(요금 9천 원)를 타고 학교에 가던 제굴. 이제는 스스로 일어난다. "엄마가 안 일어나니까 내가 일어나야지, 택시비 아깝잖아요"라면서 혼자 아침밥을 챙겨 먹는다. 

제굴이 우발적으로 만든 짬뽕. "매운 맛 내려고 소주 깠어요"라고 했다.
 제굴이 우발적으로 만든 짬뽕. "매운 맛 내려고 소주 깠어요"라고 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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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돌아온 제굴은 손 씻자마자 냉장고를 연다. 어제는 새우전(꽃차남이 몹시 좋아함)을 하려고 새우를 다졌다. 그런데 달걀이 없었다. 장 보러 가기에는 귀찮아서 새우볶음밥으로 메뉴를 변경했다. 다져놓은 새우에다가 후추를 뿌렸다. 버섯과 양파, 호박도 잘게 다졌다. 그때 갑자기 짬뽕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한국식 찌개는 재료 볶다가 물이나 육수 넣고 끓인대요. 그래서 나도 재료를 볶아서 고춧가루를 알아서 적당히 뿌렸어요. 매운 맛을 더 강하게 하려고 소주도 넣고요. 근데 소주는 음식에 한 번도 안 써 봤으니까 조금만 넣었어요. 그렇게 하니까 짬뽕 냄새가 나요. 근데 중국집에서 짬뽕 시키면 손이 가는데 이건 좀 감칠맛이 부족해서 손이 덜 가는 것 같아요."

나는 중국음식점에서 먹는 짬뽕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 짬뽕이요' 하는 것처럼 강하게 풍기는 맛을 저어해서 해물만 좀 건져먹고 만다. 그런 내 입맛에는 제굴이 만든 짬뽕이 딱 맞았다. (만들 생각은 없으면서도) 음식 만드는 과정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래서 제굴에게 "왜 만드는 장면을 사진으로 안 찍어?" 라고 물었다.

"엄마, 음식 할 때는 핸드폰 만지기 싫어요. 드럽잖아요. 얼마나 세균이 많겠어?"
"헐! 멋있다잉."
"레시피도 안 보고 하니까 가끔은 맛이 부족한 것 같애. 그래도 핸드폰은 안 만져요."

잔소리 해도 소용없다. 늘 스마트폰을 끼고 다닌다. 같이 놀면서도 각자 스마트폰을 한다.
▲ 제굴, 수민, 주형. 잔소리 해도 소용없다. 늘 스마트폰을 끼고 다닌다. 같이 놀면서도 각자 스마트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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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짬뽕 잡채, #스마트폰 쫌!,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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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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