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부모님과 식사를 했는데, 둘째 아이가 수능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수시 모집에서 6개 학교까지 지원이 가능하고, 전형 종류도 학업우수자 종합전형(학교장 추천), 교과우수자 전형, 미래인재 전형, 특기자 전형, 논술 전형 등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하니, 그때부터 이해하시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그리고 수시 모집과는 별도로 정시 모집이 있고, 수시에서 합격하면 아무리 수능 점수가 잘 나오더라도 정시 전형에 지원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지요.
저희 부모님은 6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니셨는데, 그때에는 예비고사와 본고사 체제로 시험을 치렀고 내신 성적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을 다녔던 80년대에는 학력고사와 내신 성적을 합산하여 합격 여부를 가렸지요.
'선택이 불편한 세대'와 '선택이 즐거운 세대'의 차이그런데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하나의 대학교만을 선택하여 학과를 1지망부터 3지망까지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대학교만을 선택하던 시대에서 이제 수시와 정시를 합하면 총 9개 대학교까지 지원할 수 있고, 각기 다른 전형으로 지원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당연히 이해가 어려울 수밖에요.
사실, 저 개인적으로도 대입 전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더군요. (물론, 지금도 100% 이해했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단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수시 및 정시 지원 전략을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치밀하게 짜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통용되겠습니까.
이번에 제 둘째 아이가 지원한 학업우수자 종합전형의 경우 생활기록부 상의 교과활동 및 비교과활동의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고3이 되어 준비해서는 요건을 맞추기 어렵습니다. 1~2학년부터 관리해야 되지요. 이처럼 제가 대입 제도의 변천에 대해 다소 장황하게 말씀드린 이유는, 어쩌면 이러한 변화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이번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와 관련된 갈등을 푸는 데에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세대 간 갈등 문제에서 하드웨어 세대와 콘텐츠 세대의 인식 차이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좀 더 명료하게 하자면 결국 "선택에 익숙하지 않아 선택이 도리어 혼란스러운 세대"와 "선택에 익숙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을 참을 수 없는 세대"간 소통 단절 및 갈등 고조가 이번 논란의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다방에 가면 메뉴에 '커피'라고만 쓰여 있던 시절 있었다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중고교 및 대학시절을 보냈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 당시에 모든 교과서는 국정교과서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지요. 교복, 구두, 가방, 학용품 등도 모두 사실상 동일한 것이었습니다.(어차피 학교 앞 문방구에서 모두가 같은 것을 구입했기 때문이죠.) 학교를 벗어나더라도 선택의 폭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방에 가면 메뉴에 '커피'라고만 쓰여 있었으며, 소주도 지역별로 하나밖에 없었으며, 영화도 한 극장에서 오직 한 편의 영화만 볼 수 있었죠. 사진관도 대체로 동네에 하나밖에 없었기에 인물만 바뀔 뿐 배경과 구도가 똑같았지요.
물론, 지금도 아이들은 교복을 입고 다닙니다. 그러나 가방 종류와 색깔은 천차만별이며, 신발도 다양한 브랜드와 디자인으로 차별화되지요. 학용품은 대형문구점에 워낙 다양한 종류가 있기에 나와 똑같은 볼펜 혹은 샤프펜을 쓰는 친구를 찾기가 힘듭니다. (제 아이들도 문구점 가면 마음에 드는 것 고르느라 몇 시간씩 걸리지요.)
커피는 워낙 종류가 많아 이름을 다 외우기가 불가능하며, 영화도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10여 편 중 하나를 선택해서 봅니다. 사진은 각자가 다른 카메라와 앵글로 찍어 각자의 취향에 맞게 보정하고 편집하므로 절대로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는 "올바르고 균형 잡힌" 국정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정말로 심혈을 기울이고 충분한 여론수렴 절차를 거치면 어쩌면 그런 교과서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청소년들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이 배우는 교과서인데 자신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고 그냥 누군가가 결정해서 일방적으로 위에서 내려오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과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올바르고 균형 잡힌" 교과서이지만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것과, "다소 미흡할 수 있는" 검정 교과서이지만 선택의 폭이 넓고 자발적인 것 중 어느 것이 이들에게 더 친화적인 것이 될 수 있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버스를 타고 출근하면서 대단히 이례적인 광경을 저는 보았습니다. 20~40대 승객 중 상당수가 '국정교과서 논란' 관련 기사검색을 해서 주의 깊게 읽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 페이스북에 제가 올리는 글의 조회수, '좋아요', 댓글 등이 평소 수준의 5~10배에 달합니다. 그중에는 제가 정치이슈 관련 글을 쓸 때는 거의 반응을 안 하시고 일상에 관한 글에만 반응하셨던 분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브랜드와 기능 민감하고 맛과 분위기 많이 따지는 '지금 아이들'그만큼 선택에 익숙한 세대 및 선택에 익숙한 세대를 자녀로 두고 있는 세대에게 이번 국정화 이슈가 파급력이 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5070세대는 국정교과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더 나아가 '올바른 국가관과 역사관'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지도자가 정한 것을 당연히 우리가 따라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자녀에게도 선택권을 부여하는 상황이 거의 없었던 세대입니다.
퇴근길에 아버지가 통닭을 사들고 가면 당연히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이고, 짜장면을 시켜주던 돈가스를 사주던 손뼉 치며 맛있게 먹을 거라고 생각하며 지냈지요.
그런데 제가 아이들을 키워보니 지금의 아이들은 이와 사뭇 다릅니다. 브랜드와 기능에 대단히 민감하고, 맛과 분위기도 많이 따집니다. 그러니 휴가지를 선택을 하건 호텔이나 콘도를 예약을 하건 자신들이 직접 이미지와 동영상을 훑어보고 심지어는 블로그 후기까지 면밀히 읽어보고 결정하지요. 제 입장에서 보자면 그냥 아무 곳이나 대충 정해서 가면 될 일인데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세대에게는 그러한 일들이 귀찮고 스트레스 받는 것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것도 하나의 재미있는 과정이고 작은 행복인 것이지요. 선택이 주는 묘미를 누리는 겁니다.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의 간절한 소망에 힘입어 국정교과서가 성공리에 편찬되어 일선 학교로 배포되었다고 가정합시다. 과연 그 후에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요? 어떠한 선택권도 자신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어떠한 다른 콘텐츠도 교과 과정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을 학생과 학부모들이 그냥 일사불란하게 복종하고 수용할까요?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국정교과서만으로는 도저히 학생들의 흥미와 참여를 끌어모을 수 없기에 교사와 학부모들은 다양한 보충교재를 확보하여 수업은 사실상 국정교과서가 아닌 보충교재를 중심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수능시험이 국정교과서에서 출제되는데 그래도 되나? 어차피 수능대비는 EBS 교재와 모의시험으로 하는 것이기에 수업 내용은 국정교과서가 아닌 다른 것으로 하고, 수능대비 문제풀이만 막판에 국정교과서 범위 안에서 하면 됩니다.
그러니, 현재 교사의 90% 이상을 물갈이하고, 학부모와 학생들의 혁명적인 의식전환이 수반되지 않는 이상 바뀌는 건 별로 없지요. 아니, 바뀌는 것은 있습니다. 국정교과서가 채택되어 그것으로 수능시험을 치루는 세대는 빨라야 2018년 혹은 2019년에 고3이 되는 세대일 것이므로 어차피 그전까지는 수능 출제위원들이 논란과 혼선의 여지가 큰 근현대사 부분 출제 비중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정책 입안자가 범하기 가장 쉬운 오류그러다보니 어차피 그때까지는 시험에 출제될 가능성이 낮으므로 교과 과정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향후 2~3년간 근현대사 출제 비중이 낮아지다 보면 기출문제도 축적되지 않으므로 누가 출제위원이 되더라도 근현대사 부분에서의 출제에 큰 부담을 느끼게 될 겁니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가 강조하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우리 자랑스러운 근현대사에 대해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겠다"는 것은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정책 입안자가 범하기 가장 쉬운 오류는 정책 수혜자에 대해 잘못된 관점과 정보를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지고 지원내용과 지원대상간 심각한 불일치(Mis-match)가 발생하는 것이죠.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생각하는 '중고등학생'이 현재의 '중고등학생'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과 파국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죠. 따라서 불행과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측도 물론 박 대통령과 김 대표쪽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지금도 끝까지 가겠다고 합니다. 불행과 파국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