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3일 현행 검정교과서가 좌편향됐다면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 가운데,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걸쳐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가 "국정화로 바꿀 만큼 현행 교과서가 좌로 편향돼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태진 전 위원장은 3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식당에서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일부 언론사 기자들과 만나 "과거 집필 기준과 이에 근거한 검정 심사에 따라, (현행 검정교과서는) 북한 공산 정권을 두둔하는 내용 등 좌편향 서술은 엄격하게 배제됐다"고 밝혔다.
이 전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인 2010년 9월 취임해 박근혜 정부인 2013년 9월 퇴임했다. 최근 정부·여당이 '좌편향 교과서'라 주장하는 8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경우, 그의 책임 하에 검정 절차가 진행됐다. 최근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었으나, 그는 "자칫 변명처럼 보일 수 있다"며 한 라디오 프로그램 전화 인터뷰 외에는 인터뷰를 고사해왔다.
그가 갑작스럽게 기자들을 만난 이유는 뭘까. 그는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현 교과서는 종북 성향'이라는 등 국민에게 잘못된 사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이날 역사교과서 국정화 확정 고시를 서두른 것도 이유가 됐다. 그는 "(국편위에서) 저말고도 많은 이들이 함께 고생했다, 그런데도 마치 8종 교과서가 다 좌편향인 양 말하는 것은 검인정 책임자로서 용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 교과서가 자꾸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듯해 안타깝다"며 "제가 볼 때 국정화는 제도적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현행 교과서에 문제점이 있다면 같은 검인정 제도 아래 개선하는 게 옳다"고 덧붙였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다수가 검정제를 택했다, (국정 아닌) 검정제가 민주주의 역량 강화에도 더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같은 시각 이 전 위원장이 기자들과 만난 장소에서 약 1km 떨어진 정부서울청사에서 황교안 국무총리는 "더는 왜곡·편향된 역사교과서로 우리 소중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며 국정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관련기사:
시종일관 '좌편향·친북' 황교안의 '종북몰이' 기자회견)
"현 역사 교과서, 청와대에서 열흘간 검토한 결과"
이 전 위원장은 "당시 교과서 중 북한 공산정권을 두둔하는 서술, 종북 성향 서술은 집필 기준에 따라 검정 심사에서 엄격히 배제됐다"라고 말했다. 국편위 업무는 "교과서 검정 심사위원을 선정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며, 따라서 "학계·교육계에서 편향성이 없다고 인정받는 사람들로 (검정위원을) 구성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근거로 2012년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 과거 이명박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정책 추이 등을 들며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교과부 방침에 따라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남북 서술 비율을 6:4 정도로 유지하게 됐다"며 "따라서 북한 서술이 많아 보일 수는 있지만, 과거에 비해 좌편향은 크게 개선됐다"고 말했다.
이태진 전 위원장에 따르면 당시 이명박 정부는 현 교과서를 중도 노선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정부·여당이 '좌편향'이라 주장하는 현 교과서는 이명박 정부의 작품인 셈이다. 그는 지난달 30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현행 교과서를) 청와대 교문수석실에서 가져가 열흘간 검토했다, 좌편향 내용이 담긴 책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는 이전 (노무현) 정권 교과서를 개혁하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갑작스러운 우경 선회보다는 중도나 중도·우의 노선, 예컨대 경제 개발과 반독재 투쟁을 동시 서술하는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며 "공식 석상은 아니지만 이 전 대통령이 제게 직접 그런 취지로 얘기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현재 정부와 새누리당 지도부가 지적하는 검정교과서의 현대사 관련 문제점은 과거 2011~2012년 2년간 시한부 사용됐다가 폐기된 교과서 내용을 대상으로 하는 면이 많다"고 말했다. 정부·여당이 이미 폐기된 교과서를 근거로 문제 삼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정부가) 대상을 잘못 짚고 비평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전 위원장은 "문제점이 있다면 출판사가 검정 심사본을 만드는 데 1년밖에 허용되지 않았던 탓"이며 "단기간의 잦은 교과서 개편이 낳은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말했다. 그는 "(1년이란 짧은 기간도) 이명박 정부 안에서 끝내기 위한 일정이었다"며 "이번에도 똑같다, 비슷한 문제점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박정희·김일성 사진 1:3장' 발언, 사실 아냐"
이태진 전 위원장은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현행 8종의 검정교과서를 분석한 '2013년 검정 고교 한국사 사진 게재 현황' 분석표를 내보였다. 이는 지난달 31일 "교과서에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은 단 1장, 김일성 사진은 3장이나 나온다"는 김무성 대표의 발언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전 위원장은 "김 대표의 발언 근거가 잘못됐다는 판단 아래, 최소한 이건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분석한 표를 보면 그 말처럼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이 1장, 김일성 사진이 3장인 교과서는 어느 곳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일성 쪽에 비중을 둔 경우도 없다고 판단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체적으로 볼 때 (8종의 검정교과서 중) 중도가 3종, 중도우가 4종, 교학사가 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행 검정교과서에 있는 문제점은 같은 검인정 제도 아래 재차 개선하는 게 옳다"며 "현 교과서가 국정화할 만큼 심각한 좌편향, 종북 성향을 띠지는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그는 교학사 교과서와 관련해 "당시 교학사 교과서는 심사위원 점수가 좋지 않았다, 당시 교과서 대표집필자가 사망하는 등 지휘탑을 잃은 탓인지 근현대사 부분 서술이 매우 혼란스러웠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중 특히 일제시기 서술에는 '식민지 근대화론(한국의 경제·정치적 성장이 일제식민시절 비롯됐다는 관점 - 기자주)'이 담겨 있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