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국정교과서에서 상고사·고대사의 비중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그는 "새 교과서는 상고사·고대사 서술을 보강해 동북아 역사 왜곡을 바로잡겠다"고 말했다. 현행 교과서에서 한 단원에 그친 상고사 서술을 두 단원으로 늘리는 것이 황우여 부총리가 이끄는 교육부의 계획이다.
황우여 부총리의 발언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고조선 역사에 대한 우리 교과서의 기술을 보면 이것을 한 단원 더 늘린다고 될 일인지, 또 국정교과서로 될 일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교과서의 고조선 부분에 심각한 오류가 담겨 있어 소수의 국정교과서 필진만으로는 이를 바로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우여 부총리의 계획에 대해 우려를 품지 않을 수 없다.
고조선에 대한 교과서의 기술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게 되면, 이것을 바로잡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이 필요한지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지를 모으는 길인 검정 교과서 집필이 상고사 복원에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고조선 역사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는, 고조선에 대한 대중의 기본 지식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고조선의 정통성이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계승되었다고 믿고 있다. 초대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이 중국인 기씨가 세운 기자조선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중국인 위씨가 세운 위만조선으로 이어졌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학의 기본 상식에 위반된다. 왕조국가에서는 왕실의 성이 바뀌면 왕조가 바뀌게 된다. 역성(易姓)혁명이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왕실의 성이 바뀌는 것은 혁명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었다.
왕조 국가 시절, 통치자의 성이 바뀌면 나라도 바뀌었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왕씨가 임금인 나라에서 이씨가 왕이 되면 왕씨의 나라는 그날로 사라지게 된다. 이성계는 1392년 8월 3일(실록 상의 음력 날짜는 7월 17일) 임금이 되었다. 그런데 이날 이성계는 공민왕의 부인인 대비 안정비(정비 안씨)의 승인을 얻어 고려 주상에 즉위했다.
이성계가 조선 주상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것은 그다음 해였다. 국호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 것은 이듬해인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형식상의 논리를 따지자면, 이성계는 처음에는 고려 주상이었다가 8개월 뒤에 비로소 조선 주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계가 1393년에 조선을 건국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1392년에 조선이 세워졌다고 믿고 있다. 조선이란 국호가 채택된 것은 1393년인데도 조선이 1392년에 세워졌다고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왕조 국가에서는 왕실의 성이 바뀌면 나라도 바뀐다는 역사학의 기본 상식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대통령이 노씨에서 이씨로, 이씨에서 박씨로 바뀌어도 국가의 정통성에 변화가 없지만, 옛날에는 통치자의 성이 바뀌는 순간에 나라도 바뀌었다. 이것이 왕조 국가의 상식이었다. 이런 당연한 말을 뭐 하러 하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당연한 이치가 고조선에 대한 역사교육에서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의 정통성이 중국인 기씨의 나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중국인 위씨의 나라로 이어졌다는 게 과연 상식에 맞는 논리일까? 기씨가 고조선을 차지했다면 그날로 고조선은 사라지는 것이다. 기씨의 나라가 조선이란 명칭을 사용했더라도, 앞의 조선과 기씨의 조선은 전혀 다른 나라가 된다.
상고사 및 고대사 복원에 열정을 쏟은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기자와 위만의 정권은 고조선 영토의 서쪽 일부를 차지했을 뿐이라고 고증했다. 이처럼 기자 정권과 위만 정권이 고조선 일부를 차지했기에 기자조선이니 위만조선이니 하는 관념이 나올 수 있었다.
기자 정권과 위만 정권은 고조선 일부를 차지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이들이 등장한 후에도 기존의 고조선 왕통은 계속해서 계승되었다. 이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료인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고대 군주들의 내력을 적은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는 고구려 시조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했다. 단군의 아들이라는 말은 고조선 군주의 후예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주몽이 고조선 왕실의 후예라는 지위를 이용해 고구려를 세웠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주몽의 성씨가 고조선 왕실의 성씨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주몽이 고주몽이니까 고조선 왕실은 고씨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주몽은 아버지한테 인정을 받지 못한 아들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와 다른 성씨인 고씨를 선택했다.
주몽의 아버지는 해씨인 해모수다. 주몽이 아버지의 인정을 받았다면, 고주몽이 아니라 해주몽으로 불렸을 것이다. 주몽이 단군의 후예라는 기록과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종합하면, 고조선 왕실은 해씨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대로 된 고대사 복원, 소수 필진으로 가능할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해모수가 부여 군주였다고 했다. 고조선 왕실의 혈통을 계승한 인물이 어째서 부여 군주가 되었을까? 부여라는 말의 의미를 음미해보면, 이 의문을 풀 수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부여는 국호가 아니라 수도의 명칭이라고 말했다. 부여는 들판을 의미하는 우리말 '불'을 음역한 한자라고 그는 고증했다. 이 말이 고조선 수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백제 성왕 이후의 백제 도읍이 부여로 불린 것도 이런 고증과 일맥상통한다. 부여가 국호가 아니라 도읍 명칭이었기 때문에,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을 수 있었다.
부여가 국호가 아니라 도읍 명칭인데도 해모수가 부여 군주로 불린 것은, 워싱턴을 미국의 대명사로 받아들이고 베이징을 중국의 대명사로 받아들이는 언어 습관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해모수가 부여 군주라는 말은, 그가 부여를 도읍으로 둔 고조선의 군주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해모수가 부여 군주 즉 고조선 군주였다는 사실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 얼마 전까지도 해씨 왕실이 고조선을 지배했음을 뜻한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세워지기 얼마 전까지도 고조선 왕실이 해씨였다면, 고조선이 기씨 조선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위씨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논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다.
고조선 왕실의 정통성이 해씨에게 있었는데도, 중국인인 기씨와 위씨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논리가 나온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은 조선 전기에 유학자들에 의해 벌어진 역사 왜곡에서 찾을 수 있다.
세조 3년 5월 26일 자(1457년 6월 17일 자) <세조실록>이나 예종 1년 9월 18일 자(1469년 10월 22일 자) <예종실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전기에는 고조선 역사서를 불태우고 우리 역사의 뿌리를 중국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유학자들이었다.
유학자들은 중국 중심과 농경민 중심의 역사관을 가진 지식인들이었다. 이들 입장에서는 중국과 대립했을 뿐만 아니라 유목 문화를 상당 부분 보유하고 거기다가 샤머니즘 성격의 신선교 문화를 보유한 고조선 역사를 어떻게든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고조선의 정통성이 중국인들에게 이어졌다는 식의 엉터리 논리를 만들어냈다. 이런 논리가 지금의 역사교육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조선의 정통성을 무시한 엉터리 역사교육이 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은 고조선 역사 교육이 근본에서부터 잘못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실의 성이 바뀌면 왕조가 끝나던 시대에 고조선 왕실의 성씨가 기씨로 바뀌고 위씨로 바뀌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마치 '왕건 고려'의 정통성이 '이성계 고려'로 계승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황당한 일이다. 왕조의 주인이 무슨 성씨였나를 파악하는 것은 그 왕조의 역사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그런데도 고조선에 대한 우리의 역사교육은 그 첫걸음도 떼지 못한 상태다.
이런 잘못을 바로잡고 고조선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려면, 한두 명의 지식과 지혜로는 부족하다. 고조선 시대의 상고사 복원은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는 소수의 필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상호 협력적으로 진행되는 역사연구가 보장되지 않으면, 고조선 역사를 올바로 복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의 중지(衆志)를 모아야 하는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황우여 부총리는 소수의 국정교과서 필진만으로 상고사를 보강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고조선 역사교육을 정상화하는 일은 집을 새로 짓는 일이나 마찬가지인데, 이것을 소수의 필진이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조선 역사교육이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더 파행을 겪어야 할지,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