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3일. 제 86회 '학생의 날'에 정부는 몇 달 동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 했다. 분단 국가로서 이념 대립이 첨예한 대한민국에서 이번 문제 역시 종북, 친일 등의 단어가 연일 함께 오르락내리락 했다.
국정화 교과서를 찬성하는 쪽은 종북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역사 왜곡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며 올바르고 공정한 역사책을 만들겠다 주장했고 반대하는 쪽은 권력이 역사를 만질 때 '일어나게 될' 역사 왜곡을 우려하며 획일화 된 역사책의 문제점을 외쳤다.
그리고 지난 3일.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히 이뤄져야 할 충분한 논의와 합의점 도출의 노력 없이 예정보다 일찍 한 쪽의 의견만이 채택되었다. 이제 2017년, 국가에 의해 선택되고 편찬된 하나의 역사가 학생들에게 제공될 것이다. 국정화 교과서에 찬성한 사람들의 말처럼 역사왜곡을 바로 잡을 것인지. 아니면 반대의견처럼 역사왜곡이 일어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미 국정화 역사 교과서를 통해 배우고 있는 나라는 어떤 상황일까. 국정화 교과서에 대한 뜨거운 찬반 대립이 이뤄지고 있을 때 이미 국정화 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 다른 국가들이 자주 거론되었다. 현재 국정교과서만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북한, 베트남, 스리랑카, 몽골 등이다.
내전 종식시킨 영웅, 독재자로 불리다그 중 스리랑카는 대한민국처럼 이념대립이 첨예하지는 않지만 인구 74.88%를 차지하는 신할러족과 15.4%의 소수민족인 타밀족의 내부 인종 갈등이 심한 국가이다. 이 갈등은 타밀족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투쟁을 해온 반군단체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 와 신할러 정부 간의 27년이라는 긴 내전(1983-2009)을 겪게 했다. 바로 전 대통령인 마힌다 라자팍사는 정부군의 승리로 내전을 종식시킨 인기에 힘입어 재선에 성공했다.
재집권 후 그는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임기제한 조항을 삭제하고 행정부 권한을 확대했으며 판사를 대통령이 직접 임명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성 또한 무너뜨렸다. 결국 2015년 1월 실시된 대선에서 10년의 군국주의, 족벌주의 정치를 끝으로 정권이 바뀌게 된다. 마힌다 라자팍사는 27년의 내전을 종식시킨 영웅이라는 타이틀이 있는 반면 다양한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법치주의 시스템을 마비시킨 독재자이기도 했다.
내전이 종식되고 정권이 바뀐 지금, 스리랑카 정부가 쓴 역사책에서는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서술하고 있는지 알아봤다. 스리랑카 교육제도는 크게 일반교육(1-13학년) 및 고등교육(대학)과 직업훈련교육으로 대별된다. 우리나라의 초∙중∙고에 해당하는 일반교육은 다시 primary(1-5학년), secondary(6-11학년), collegiate(12-13학년)으로 구별된다.
너무 짧게 끝나버리는 현대사6·7·9·11학년의 역사 교과서와 12-13학년 역사 과목 교수 요목을 찾아 확인해 보았다. 저학년 역사책의 경우 스리랑카 역사만 배우고 있었고 고학년은 세계사와 스리랑카 국사가 구별되지 않고 한 권에 서술돼 있었다.
대부분 100페이지 이내의 얇은 책이었다. 저학년 교과서는 스리랑카 역사 중에서도 고대사만 언급하고 있으며 고학년 교과서는 고대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세계사 부분은 두 번의 세계 대전과 냉전 위주로 서술돼 있었다.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현대사를 살펴보니, 영국 식민지배로부터의 독립(1948년)부터 내각책임제 정부 형태를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1978년)한 부분에서 끝나 있었다. 그 이후의 스리랑카 역사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교과서는 8년마다 개정하는데 2007년에 개정해서 2009년부터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최신판임에는 분명했다. 2007년에 개정할 당시 마힌다 라자팍사 정부였고 내전이 종식되기 전이라는 걸 감안하면 일부 이해는 간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 문제라고 보기에는 현대사 부분이 너무 일찍 끝나 있었다. 1978년 이후 대통령이 6번이 바뀌었고 반군단체 LTTE의 테러와 6차례의 평화 회담 과정, 스리랑카 최초의 엑스포 개최, 대통령과 의원, 시장 등의 암살, 스리랑카와 미국, 인도의 다양한 협정체결 등 스리랑카 역사에서 언급되어야 할 많은 일들이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역사책에 기록 되고 있는 1948-1978년의 현대사도 누락된 부분이 많았다.
20페이지 분량인 스리랑카 현대사 부분에서 11.6.1단원은 의원내각제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는데 스리랑카의 역사라기보다는 다양한 정당 체제의 개념과 용어에 대한 설명이었다.
약 5페이지 분량에서 스리랑카를 언급하고 있는데 내각제도를 설명하며(현재 스리랑카는 대통령 중심제이다) 대통령과 내각이 스리랑카의 행정부에 속하고 있으며 총리가 선출되는 방식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한 단락이 전부였다. 11.6.2와 11.6.3 단원도 다르지 않다.
타밀족이 분리 독립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차별 정책들에 대해서나 1971년에 발생한 극좌 민족해방전선 청년 주도 폭동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스리랑카의 주요 당들에 대한 내용도 찾아볼 수 없었다.
12-13학년 역사책 교수요목에 역사교육의 목적이 명시돼 있다.
'사건의 본질과 인과관계를 연대순으로 공부함으로써 배우게 되는 지식과 규율을 실생활에 적응하고자 한다. 민족 정체성과 국민적 화합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과거에 대해 공부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자 한다. 국가 문제에 대해 의무적으로 공부하게 하고자 한다.'이 역사책에서 주는 제한적인 현대사 범위와 얕은 정보만으로 이 중 몇 가지를 이룰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현대사의 범위와 서술 내용에 대해 스리랑카 교육부에 문의 메일을 보냈지만 2주가 지난 현재까지 답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몇 년 전의 현대사, 역사가 되지 못하다그렇다면 이 국정화 역사 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스리랑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놀랍게도 대답하는 사람 모두 문제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스리랑카 역사 교과서에 문제가 있는 거 같냐는 질문에 모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학교 안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교과서만을 배워야 하지만 학교 밖에서 충분히 다른 의견의 역사책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일찍 잘려 버린 현대사를 배우고 있는 그들에게 역사는 그저 오래 전의 이야기인 게 당연하다. 그리고 몇 년 전의 현대사는 아직 역사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대통령 중심제가 된 이후의 정부에 대한 부분을 전혀 배우지 않고 이로써 어떤 쪽으로든 생각해 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자라난다.
놀랍게도 질문을 조금 달리해서 국가가 역사를 만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갹하냐고 물으니 모두가 '부정적'이었다. 역사가 국가에 의해 이용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더불어 많은 아시아 국가가 역사를 마음대로 바꾸려 한다면서 안타까움까지 내비쳤다.
이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국가가 만든 교과서 자체에서는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 역설을 대화할 때마다 마주해야 했다. 다른 역사를 배운 적 없이 정부가 골라 보여준 역사를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역설이 아닐 테지만.
정부가 어떤 부분을 드러내든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그걸 배운 아이들이 자라나면 그게 대한민국 역사의 전부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역사 국정화 교과서의 논란이 중요하다.
단지 찬반의 의견 중 하나를 관철시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 속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고 합의점을 도출하는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는 없었나 아쉬움이 드는 이유다. 그래서 정부의 국정화 교과서 확정 고시는 너무 이르고 독단적인 결정인 듯하다.